[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37] 이유 없는 인내심은 없다
군 입대를 며칠 앞두고 있었을 때 어머니가 제 손을 잡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형제들에 비해서 나를 닮아서 유독 인내가 강하니 군 생활을 잘 견뎌낼 거다."
그 때부터 내 마음속에 '인내'라는 두 글자가 새겨졌습니다. 폐쇄적인 군대 사회를 견디기에는 지나치게 섬세한 감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별탈없이 전역할 수 있었던 것도 특유의 인내력 덕분입니다. 그 이후에도 나에게 '인내'를 가르쳐준 사람은 많았습니다. 창작욕구에 불타고 있을 때 나의 인내심을 자극시켜준 것은 도스토옙스키의 한마디였습니다.
젊은 때는 여러 가지 관념이 믿을 수 없으리만큼 몰려들어서 시끄럽게 머리 속을 울리고 있지만, 그 하나하나를 모조리 포착하여 성급하게 발표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더욱 종합되기를 기다리고 더욱 충분히 사색함으로써, 즉 하나의 관념을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개개의 세부가 자연히 하나의 핵으로까지 응집하여, 한 폭의 당당한 큰 화면을 이루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붓을 들고 써 내려가야 하는 것이며, 그 이전에는 붓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거장이 창조하였던 위대한 인물들은, 이따금 긴 긴 집요한 노력에서 탄생된 것입니다.
-도스또옙스끼, J.R. 마리의 '도스또옙스끼의 문학과 사상'
아이들에게 인내를 가르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인내'는 다른 덕목과 마찬가지로 가르친다고 해서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의 인내는 나의 것이고 아이의 인내는 아이의 것입니다. 어느날 민준이가 사촌누나와 놀이터에서 주먹다짐을 하고 난 후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울고 있었습니다. 자세한 사정을 들어보고 사과를 하면 어떨까 하고 제안을 했지만, 사촌누나도 화가 났는지 화해를 할 의향이 없었습니다. 애써 사과를 한 민준이의 마음이 복잡해지고 서글퍼하는 모습이 표정에 그대로 읽혔습니다. 인내를 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고 나는 '시간'이라는 친구를 불러냅니다.
"민준아, 시간은 참 똑똑한 친구야. 시간에게 좀 맡겨놓으면 어떨까?"
민준이와 다른 놀이를 하고 있었지만 서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도 민준이는 잘 참아 주었습니다. 다행히 조금 후에 사촌누나도 민준이에게 사과를 해서 둘은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화해를 하지 않고 기다리는 동안 아이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그것은 역시 아이의 마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민서와 민준이 모두 나에게 하는 말투가 있습니다. 예컨대 민서가 길을 가다가 넘어지면 벌떡 일어나서 "나 아팠는데 참았어!"입니다. '~했는데 참았어.'라는 말은 스스로가 인내의 가치를 아는 것이므로 당연히 아이의 요구대로 칭찬을 해줘야 합니다. 엄마 없이 일주일 동안 여행을 할 때 민서는 엄마 보고 싶다고 마구 울었지만 민준이는 "엄마 보고 싶은데 나 지금 참고 있어."라고 말하며 금세 울음이 터질 것 같은 표정이 되었습니다. 나는 "아빠도 엄마가 보고 싶은데 민준이 참는 거 보고 참고 있어."라고 칭찬을 해줬습니다. 하지만 민서가 워낙 서럽게 우는 통에 민준이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냥 그 동안은 10분 동안 우는 시간을 정해 놓고 맘껏 울도록 해주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인내에 대해서 생각할 때 막연히 참는 것과 인내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참는 것은 인내라고 할 수 없으니 참는 이유가 있을 때는 참고, 그렇지 않을 때는 감정이 가는 대로 놔둬도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양에서는 어떻게 인내를 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동양의 인내는 확실한 명분이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막연히 참는 것이 인내가 아니라 반드시 이유를 가지고 있는 인내죠. 전국시대의 형세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때 진(秦)나라를 위협하던 강대국은 조(趙)나라였습니다. 장평대전이라는 전쟁에서 조나라 병사 45만명이 몰살당하기 전에 조나라와 진나라의 전세는 비등했습니다. 조나라를 부국강벽하게 만든 불멸의 파트너는 유세가 인상여와 장군 염파였습니다. 두 사람이 불멸의 파트너가 된 데에는 인상여의 인내가 절대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염파 장군 입장에서는 목숨을 걸고 전쟁터의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고생했는데 좋은 옷을 차려 입고 유세를 하면서 세 치 혀를 쓸 뿐인데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앉는다는 게 못마땅했습니다. 염파 장군은 길 가다가 인상여를 만나면 반드시 모욕를 줘야겠다며 벼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상여는 멀리서 염파 장군이 보이면 일부러 길을 비켜 갔기 때문에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은 부딪칠 기회가 없었습니다. 인상여의 측근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결국 이별을 고하자 인상여가 말을 꺼냅니다.
"저 진나라 왕의 위세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궁정에서 꾸짖고 그의 신하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소. 내가 아무리 어리석기로 염파 장군을 겁내겠소?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를 치지 못하는 까닭은 나와 염파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만일 지금 호랑이 두 마리가 어울려서 싸우면 결국은 둘 다 살지 못할 것이오. 내가 염파를 피하는 이유는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사사로운 원망을 뒤로 하기 때문이오."
- 사마천, <사기열전>, '염파·인상여 열전'
이 말을 들은 염파 장군은 부끄러움에 사무쳐 웃옷을 벗고 가시채찍을 등에 짊어지고 인상여 집 마당에서 사죄를 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조나라는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습니다. 인상여는 단지 인내를 한 것이 아니라 인내를 한 이유를 드러내서 염파 장군을 깨우쳤습니다. 참으로 값진 인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상여의 인내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대단한 인내는 바로 '사마천'의 인내입니다. 사마천은 비운의 영웅 이릉 장군이 적군[흉노족]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 유일하게 한무제 앞에서 변호를 자처했다가 화를 입어서 사형의 죄를 얻었지만 생식기를 거세하는 혹형인 궁형(宮刑)을 선택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대부로서 궁형을 당해 환관(宦官)이 된 자는 함께 자리를 하거나 말을 섞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는 당대 실정 속에서도 굳이 목숨을 연명하게 된 사정을 친구인 임안에게만 설명을 합니다. 그 구절 중에서 명문 중의 명문을 소개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습니다.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 사마천, <보임안서> 일부
사마천은 세상에 반드시 남겨야 할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가볍게 목숨을 끊을 수 없었노라고 고백합니다. 중국 3,000년 통사를 정리하는 선친의 작업을 마무리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천이 비분강개하며 써내려간 52만 6,500자에 이르는 대작 <사기(史記)>가 태어난 것도 결국 '인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마천의 인내 역시 마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밖에도 한(漢)나라의 통일 작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한신 장군이 소시적에 동네 건달과 시비가 붙어서 그 건달의 가랑이 밑을 기는 수모를 참았다는 유명한 과하지욕(胯下之辱) 역시 동양의 인내가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한신이 단지 건달의 가랑이 밑을 기었다면 굴욕이 되었겠지만, 뜻과 기상이 높은데 건달을 죽이는 죄를 지으면 모든 게 한 순간의 물거품이 되기 때문에 몸의 굴욕을 자처한 것입니다.
아이에게 인내를 가르쳐줄 때는 부모가 몸소 인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중요합니다. 아이는 부모님이 왜 인내를 하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합니다. 인내를 해야 하는 이유를 들으면 아이의 가슴속에 깊이 남아 있어서 인내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참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인내, 목표가 있는 인내는 결국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할 때, 일이나 인간관계의 옳음이 명확할 때 빛이 날 수 있습니다. 인내심은 결국 자신감과 정의가 행동으로 표현된 것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