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가족과 아이를 지키는 최종 수비수



사회를 바꿔보겠다고 사회운동을 몇 년 하고, 가족 먹여살린답시고 사업을 몇 년 하다가 뒤늦게 육아에 참여한 늦깎이 아빠로서 아이들과 교감을 맺을 수 있었던 까닭은 아내의 신뢰 덕분입니다. 처음에는 육아서와 심리학 등 내가 아는 지식을 육아에 적용하며 시행착오도 많았고 아내와의 다툼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차차 엄마의 자리와 아빠의 자리가 잡혀가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이 정서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적극적인 육아 참여가 아이에게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무수히 보고되고 있습니다.

1950년대에 심리학자 로버트 시어스와 그의 동료들은 다섯 살짜리 자녀를 둔 300명이 넘는 미국인 부모들을 대상으로 자녀 양육 관행을 조사했다. 26년 후에 또 다른 연구자 집단이 이 원래 연구 대상의 자식들 중 일부와 접촉했다. 그 목적은 그들의 감정이입의 정도를 측정하여, 그것을 시어스의 원래 조사 결과와 비교해 보기 위한 것이었다. 나중의 연구자들의 발견에 따르면, 성인기 감정이입의 가장 강력한 예측자는 다섯 살 때 아버지의 양육 관여였다. 이 요소는 몇몇 어머니의 관련 예측자보다 더 나은 예측자임이 증명되었으며, 이는 소년과 소녀 모두에게 분명하게 드러났다.
- 로스D 파크, 아민 A 브로, <나쁜 아빠>(이학사), 27쪽


하 지만 육아에 있어서 아버지의 자리는 마치 변방과 같습니다. 문화센터나 공공도서관에서 ‘가족과 함께 함는 책놀이 잔치’이라는 행사를 마련하면 참여 부모의 10% 정도가 아버지입니다. (10가족 중의 1가족) 뿐만 아니라 ‘아빠와 함께 하는 책놀이 잔치’라고 ‘아빠’를 명시했을 때도 아버지의 참여는 50%가 겨우 넘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참여가 흔하지 않기 때문에 가끔 아버지들이 참여할 때는 유심히 살펴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같이 온 경우는 대개 아버지는 뒤쪽으로 물러나 스마트폰을 보거나 구경을 합니다. 아버지들이 적극적으로 책 놀이에 참여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가정 내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편하지 않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는 회사와 주주의 관계처럼 됩니다. 주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보고를 하고, 돈이 많이 드는 완구나 책을 구매할 때 아버지가 가끔 이의제기를 하는 정도입니다. 아버지의 역할이 이처럼 소극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가족의 행복은 점점 달아납니다. 나는 육아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던 아버지로부터 적극적으로 육아에 참여하는 아버지로 변신했는데, 그 과정을 동양철학의 한 구절로 담았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을 것이다."
- <논어> 4-25

육 아를 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간직하는 최소한의 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와 가족을 향한 사랑과 선의입니다. 당연한 말처럼 보이지만 실제 일상생활에서 이 선을 시나브로 넘어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완구 세트를 사겠다는 어머니의 주장과 이를 반대하는 아버지의 주장이 충돌할 때 아버지는 아이의 앞길을 막아세우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지나치다고 생각했거나 가정형편상 무리라고 생각했을 확률이 큽니다. 부부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주지 않는다며 원망하며 싸웁니다. 부부 간의 신뢰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만약 아내와 남편이 아이에 대한 선의와 사랑을 인정하고, 서로에 대해 존중하고 지켜준다면 자신의 생각과 다른 주장을 들어도 자세히 들어보고 설득을 하거나 반영을 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갈등이 심화된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대방을 부정하거나 비하하고, 아이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각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이를 진심으로 염려하며 소신껏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부부가 서로의 육아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아이에 대한 사랑과 선의로 충만합니다. 신뢰의 문제는 엄연히 있는 사랑의 감정을 애써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의 덕을 살펴보는 다정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과 아이에 대한 선의를 존중하는 것이 신뢰의 첫 번째 원칙이라면,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두 번째 원칙입니다. <논어>를 읽을 때는 다른 책을 읽을 때보다 기분이 좋은데, 특히 스승과 제자가 서로에 대해서 이해하고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신뢰라는 것은 ‘이해’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자와 자로의 신뢰 관계가 특히 인상적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유(자로)의 비파 솜씨로 어찌 내 문하에서 탈 수 있느냐?”
그런 일이 있은 뒤로 문인들이 자로를 공경하지 않았다. 이에 공자가 말했다.
“유는 이미 수준이 당(堂) 위에 올라 있다. 다만 방[室] 안까지는 들어오지 못했을 뿐이다.”
- <논어> 11-14


자 로는 공자와 가장 나이차가 적을 뿐만 아니라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제자입니다. 제자들이 불만이 있을 때 자로가 대표로 따져 묻기도 하고, 공자가 면전에서 대놓고 욕을 하기도 해서 때로는 당황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비파 사건 역시 공자와 자로의 친근한 관계를 보여주는 모습이지만, 제자들은 공자에게 꾸지람을 받는 자로를 오해한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알아줌’이 참으로 존경스럽고 부럽습니다. 부부 사이도 이처럼 알아줄 수 있다면 신뢰가 깨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거꾸로 공자가 모함을 받았을 때 제자가 버팀목이 되는 대목을 소개합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 자공(子貢)은 공자보다 위세가 더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공자 사후에 나라의 선비들은 자공을 찬양하기 위해서 공자를 헐뜯기도 했습니다. 이때 자공이 보여준 모습은 사람에 대한 이해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공손무숙이 조정에서 대부에게 말하였다. "자공이 중니보다 어질도다." 자복경백이 그 말을 자공에게 전하니, 자공이 말했다. "궁실의 담에 비유하면, 나의 담은 어깨에 닿아서 집안의 좋은 것을 엿볼 수가 있거니와, 선생님의 담은 몇 길이나 되어서 그 문을 들어가지 못하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풍요함을 볼 수 없다. 그 문에 들어간 자가 적으니, 무숙의 말이 또한 마땅치 않겠는가?"
- <논어> 19-23

진 자금이 자공에게 이르기를 "자네가 겸손해서 그렇지, 중니가 어찌 그대보다 어질겠는가?" 자공이 말했다. "군자란 한마디 말로 지혜롭게 되기도 하고, 한마디 말로 지혜롭지 못하게 되니, 말은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선생님께 미칠 수 없는 것은 마치 하늘을 사다리로 오를 수 없는 것과 같다. 선생님께서 나라를 얻어 다스린다면, 이른바 민생을 세워 주매 민생이 서고, 덕으로 인도하매 백성이 따르고, 인정으로 편안하게 하매 백성이 모여들고, 예약으로 고무시키매 백성이 화하게 되어, 살아계실 때는 사람마다 받들어 모시고, 돌아가신 때에는 모두 슬퍼한다는 것이니, 어떻게 이에 미칠 수 있겠는가?"
- <논어> 19-25


공 자가 자로를 변호한 일과 자공이 공자를 변호한 일의 공통점은 서로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이므로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습니다. 반면 형제들이나 지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배우자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무시하거나, 특정한 행동에 대해서 비난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의지할 사람은 가족밖에 없습니다. 같이 맞장구를 치면서 호응을 하면 배우자의 자리는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만 제대로 지켜진다면 신뢰의 끈은 견고해집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형성하는 육아의 기초일 뿐 서로가 채워야 하는 게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버지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그 어떤 육아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아내에게 육아를 맡겨놓고 돈을 벌거나 바깥일을 하는 것은 독립운동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사회적으로 아버지의 자리를 제대로 지켜주지 않지만, 집에 있을 때 집안일을 하거나 아이 돌보는 것을 피하지 않고 자주 기회를 가지려고 노력하면 육아와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생활까지 좋은 기운이 뻗칩니다. 사람이 가족의 사랑으로 태어난 것처럼, 가족으로부터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거나, 아이들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 부모님에게는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집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사랑’의 개념이 무척이나 폭넓고 깊은데, 특히 ‘가족의 사랑’을 으뜸으로 칩니다. 심지어 이상적 인물로 추앙받는 순임금의 아버지가 만약 죄를 받는다면 임금 자리도 헌신짝처럼 던져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숨는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입니다. 따라서 가정교육이 모든 교육에 앞서고, 가정의 사랑으로부터 모든 사회체제와 제도로 확장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가족은 사회의 요구에 맞게 아이를 키우고, 학교나 학원의 지시에 복종하는 세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동양의 철학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가족의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졌기 때문이고, 가족의 자존감이 이 지경까지 떨어진 까닭은 가족 구성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족이 최소한의 신뢰의 끈만 붙잡는다면 이런 상황까지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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