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 511 (작은글씨) - 라로슈푸코의 잠언과 성찰 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 511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 지음, 강주헌 옮김 / 나무생각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주요한 모랄리스트> 못마땅한 인생사, 풍자, 불만, 그리고 시 - 라로슈푸코

 

흔히 모랄리스트를 이야기할 때는 '파스칼'과 '라로슈푸코'를 지목한다. 라로슈푸코는 국내에서는 잘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세계의 수많은 저술가들이 '라로슈푸코'가 남긴 구절을 애용한다.

파스칼과 라로슈푸코는 똑같이 인간성을 탐구했으나, 두드러진 차이점이 있다. 파스칼은 사상의 근원을 영성에서 찾고 있는 반면 라로슈푸코는 허무하지만 생동감 있는 현장의 삶에서 찾고 있다. 자연히 파스칼의 어조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세계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고귀하고 벅찬 '원천'이 그에게는 있는 것이다. 라로슈푸코는 정치하다가 숙청된 인물로 세상에 대한 강한 반감을 숨기지 않는다. 너무 노골적으로 염세적 풍자를 드러내기 때문에 당대에도 많은 비판과 비난을 피할 수 없었으나, 그가 인생의 리얼리티를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그려냈다는 점은 찬사를 받는 점이다. 다만 파스칼은 '실존'을, 라로슈푸코는 '염세'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이들이 생각하는 인생이란 '녹록치' 않거나 '탐탁치' 않은 둘 중의 하나이다. 이것이 두 사람이 만나는 '최소한의 지점'이다.

 

 자연은 모든 진리를 각각 그 자신 속에 두었다. 우리는 그들 중에 일자를 타자에게 포함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각자는 그 자신의 위치를 가지고 있다. - 파스칼, '팡세'

 

라로슈푸코에게서 위와 같은 언어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자기가 자기를 깎아내는 것은 다만 남에게 칭찬을 받기 위함이다. - 라로슈푸코, '잠언과 성찰'

 

위의 언어는 부분에 불과하지만, 진정 '라로슈푸코적'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인간성의 허위를 이토록 적나라하며 불만에 가득찬 표정으로 그려내는 것은 '라'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 그러나 라로슈푸코의 사상은 삶과 현실, 생활과 허위 등 인간의 '드러나 있는 면모'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글의 '문학성' 측면으로 본다면 '라로슈푸코'가 파스칼보다 더욱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특히 라로슈푸코의 언어는 '시'에 가깝거나, 그 자체로 '시'인 경우가 많았다.

 

운명과 운명 사이에 얼마만한 차별이 보이게 될지라도, 거기에는 여전히 길흉화복의 어떤 상쇄가 있어서 운명과 운명을 평등하게 한다.

 

운명은 이성도 교정할 수 없는 많은 결점을 교정하여 준다.

 

위선이란 악덕이 미덕에게 바치는 찬사인 것이다.

 

늙음의 고개를 오를 무렵이 되면, 육신이 쇠퇴하는 소식을 알려주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젊지만 아름답지 않고, 또 아름답지만 젊지 않은 것은 아무 쓸모도 없다. - 이상, '잠언과 성찰' 본문

 

위의 문구를 접하며 우리는 달관한 인생관이 묻어나는 시 구절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라로슈푸코를 '염세와 불만'의 사상가로만 보기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글귀 안에는 '정의'와 '섭리', 세상사에 대한 애정이 녹아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작가는 자신의 글 속에 풍자와 애정을 골고루 섞어 놓았다. 가끔 번뜩이는 심리학자의 면모 또한 곳곳에서 포착된다.

 

아무리 화려한 행위일지라도 그것이 위대한 계획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닌 한 위대하다고 간과할 것은 못된다.

 

군자의 무리에게 끊임없이 주목을 끌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이야말로 참다운 군자의 몸가짐이다.

 

너무 성급하게 은혜를 갚고자 하는 것은 일종의 배은망덕이다.

 

얻어진 명예는 얻어야 할 명예의 담보물이다.

 

우리들은 왕왕 우리들을 괴롭히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쪽에서 짓궂게 구는 상대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 

 

인간 전반을 안다는 것은 개개의 인간을 아는 것보다 쉽다.(히틀러 : 군중을 속이는 것이 개인을 속이는 것보다 쉽다.) - 이상, '잠언과 성찰' 본문

 

보이는 것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것은 문학자의 첫째 덕목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스칼은 철학자에 가깝고, 라로슈푸코는 문학자에 가깝다. 인생을 함께 할 든든한 벗 하나 없고, 허위와 기만에 가득 찬 사람들을 쳐다보아야 하는 고통을 우리는 라로슈푸코에게서 더 많이 보게 되기 때문이다. 모랄리스트들은 도덕과 가치를 위해서 '인간성'을 탐구하는 사명을 가지지만, '도덕과 가치'보다는 '인간성 반성'에 더욱 무게를 실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각자가 '모랄리스트'를 판단하는 척도가 되며, 나와 당신의 생각 차이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무비 2006-02-05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모랄에 관심은 있는데 깊이 생각해 보는 건 싫네요.
그래도 이 책은 재밌게 읽을 수 있을 듯.
아침에 읽고 답글은 지금.

승주나무 2006-02-05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엔 깊이 생각하는 것에 손을 놓고 있습니다. 자꾸 우려내는 것 같잖아요.
그래서 '한적한 생각'이 좋습니다. 요즘은^^
 
팡세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 고전총서 서양문학 4
B. 파스칼 지음, 김형길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2006년의 설을 전후로 '미래'와 '현재'에 치중하던 나의 '읽고 쓰기'가 '과거'로 약간 이동했다. 지나간 글을 돌이켜 보고, 정리를 하자는 뜻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속도에 대한 반성'이다.

동양철학은 허투루로 배운 줄 아느냐! '느림의 미학'보다 중요한 미학은 '일시정지' 즉, '엑스캔버스하다(XCANVAS-hada)'이며, '돌아감'이다. '돌아감'이라는 말은 참으로 풍부하게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안성맞춤의 용어이다. '빙 돌아감'과 '회귀'와 '돌아가심'이라는 뜻이 모두 담겨 있다. 옛말에 '게으른 선비가 책장을 헤아린다'는 속담이 있다. 책을 읽다 보면 '권수'와 '페이지수'에 눈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텍스트와의 진정한 독대'를 이루기 위해서는 뒤로 돌아가 보기도 하고, 처음부터 다시 읽기도 하고, 아예 베껴써보기도 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과거 읽기'가 천박한 '쪽수 헤아리기'의 못된 병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에잇! 서두가 너무 길어졌다.

철학자가 가장 철학자다워 보일 때는 '모순'이나 '역설'을 이용해서 사상을 전개할 때이다. "쾌락과 고통은 우리들의 욕망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기 때문에 그 사물을 욕망 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 사물을 욕망하기 때문에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다"라고 한 스피노자의 명쾌한 주장도 유쾌하며, "의미는 말에 품위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에서 품위를 얻는다"는 파스칼의 주장도 시원스러워서 좋다.

자타가 공인하는 파스칼의 미덕은 '간명한 문장'이다. 다른 말로는 '금언', '격언', '아포리즘', '잠언' 등 여러 가지 말로 불리기도 하는데, 파스칼 자신이 '늘어지는 문장'을 매우 싫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정신이 번뜩 하는 것은 한 줄이면 충분하다. 그것이 시가 영원히 살아남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랄리스트'는 '인간성' 자체를 탐구하는 사람들이다. 도덕적 사상이 전개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솔직담백한 각성이 필요하다. 때문에 '도덕'으로 가기 위한 '자기 반성'이 모랄리스트들이 주로 한 일이었다. 이 두 가지 키워드를 고르게 묻혀야 그 의미가 드러나므로 한쪽의 의미에만 너무 경도되지 않기를 바란다.

파스칼의 모랄리스트적 면모는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처세'에 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보다 '근원적인 것'에 있다. 이 역시 서로를 염두에 둔 철학이기 때문에 양분하기 힘들다. 팡세의 구절 중에

남을 효과적으로 훈계하고 그의 잘못을 지적해 주려 한다면, 그가 사물을 어떤 측면에서 보고 있는가를 관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사물은 보통 그 측면에서는 올바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올바른 점을 인정하면서 그의 잘못된 다른 측면을 지적해 주어야 한다. - 본문 중에서

라는 내용을 보자. 이것은 '처세'와 더욱 연관이 있겠지만, '근원적인 것'을 무시하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파스칼의 철학은 근원적인 것이 처세적인 것을 향하며, 처세적인 것은 근원적인 것을 줄기차게 향하는 구도로 정리돼 있다.

파스칼의 '근원적인 사유'를 이야기할 때 가장 어울리는 말은 '모순'이다. 철학자든 문학자든 모두 이 동굴에서 태어났다. 파스칼은 철학, 문학, 과학에 두루 걸쳐 있기 때문에 그의 '모순'은 보다 강력한 힘을 갖는다.

인간의 위대성은 자기의 비참함을 아는데 있다. 나무는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자기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위대한 일이기도 하다. - 본문 중에서

위대성과 비참함은 묘하게 중첩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안정된 '의미'를 이룬다. 모순과 역설이 '강력한 철학'의 동력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들의 타성에게는 '경종'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바꾸어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철학자는 간단히 앞과 뒤의 말을 바꿈으로써 놀랄 만한 의미를 만들어낸다. 습관과 본성은 어떠한가.

습관은 제2의 본성이며, 이 제1의 본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성이란 무엇인가? 습관은 본성적이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될까? 습관이 제2의 본성인 것처럼 이 본성 자체가 제1의 습관이 아닐까? - 본문 중에서

이것뿐만 아니다. 방정식에 비유하자면, 우리는 좌변과 우변을 거꾸로 두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아예 중요 지수를 빠뜨리는 일도 많다. '잃어버린 지수, 언어'를 되돌리는 일도 철학자의 역할이다. 문학자와 철학자가 자꾸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은 '창조자'가 아니다.

나의 저작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의 저작에는 이미 많은 사람의 저작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저작'이라고 해야 한다. - 본문 중에서

파스칼은 그의 학문 영역 만큼이나 사유의 스펙트럼이 넓다. 단순히 한 문구씩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유익하고 놀라운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요즘도 많은 문필가들에게 인용되는 단골 문구인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는 말과 같이 파스칼은 '실존 철학'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종교' 이야기이다. 우리는 '신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종교를 부정하지만, 파스칼은 '신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종교를 긍정한다. 신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신이 아니라 인간과 다름 없는 어리석고 미천한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그의 화법이 어김없이 드러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는 신이나 종교에게 무리한 '인간적 강요'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팡세의 상투적인 수식어로 빠지지 않는 것이 '미완성'이라는 꼬리표이다. 물론 파스칼이 '필생의 역작'을 의도로 작업을 하다가 요절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다면 너무 '무책임한 독자'가 되어버리지 않을까? 그것을 '완결'짓는 것은 파스칼이 아니라 '나'가 아닐까. 모든 '완결'된 저작들이 그러하듯이.


댓글(3)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무비 2006-02-02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어진 서두가 재밌습니다.
저도 <팡세> 읽어보고 싶어서 한 권 사두고는 못 읽고 있네요.
이상하단 말예요.
어떤 책은 그 책 속의 몇 줄을 아는 것만으로 전부 읽은 것처럼 생각돼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승주나무 2006-02-02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몇 줄을 하고 싶어서 그 사람은 그 '두꺼운' 책을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다시 읽고 싶은 책입니다.
"학자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고서도, 15분간 더 이야기를 했으면 하는 충동으로 가득 차 있다." <본문>

가넷 2006-07-26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국내에 나온 <팡세> 중에 이 책이 가장 좋을까요?
 
철학 이야기
윌 듀란트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철학을 접하게 된 계기는 아주 우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현학적으로 말하자면, 외부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나는 내적으로 항상 불만에 가득차 있었고, 그것을 표출할 만한 기제를 마련하지 못했다. 나는 촌구석의 꼬마 아이에 불과했으며, 읽은 책이라고는 교과서가 전부였다. 나는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골을 떠난 것은 고등학생이 되어서였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넓은 세계에 발을 들여논 것은 대학생이 되어서였던 것 같다. 새로운 세계에서 친구가 찾아왔다. 나는 그 녀석이 주는 책들을 낼름낼름 받아먹었다. 그 중에 이 책이 끼어 있었다. 전혀 새로운 사고방식이었지만, 굉장히 익숙했다. 나의 거대한 물음표가 드디어 언어의 옷을 입는 순간이었다.

윌 듀런트의 성공은 대단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온 번역서만 백 편 가까이 된다고 하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책에서는 철학의 주제들과 철학하기의 방법이 비교적 성실히 담겨 있다.

이 책을 처음 만난 지도 10년이 다 돼 가지만, 나는 '철학' 을 생각하면서, 번번이 이 책으로 되돌아오곤 한다. 이 책의 저자가 시대의 철학자들의 저서를 독파해서 그들의 언어로 서술했다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인문학적 뻥'에 불과하다. 그러면 세상의 번역가들은 모두 원 저자를 뛰어넘었다는 말인가.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도 좋은 '광고 효과'가 되지 못한다. 좀 더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저자의 사상과 문체를 현대에 가깝게 재구성해놓았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원저자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윌 듀런트가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저자를 통해 원저자의 생각을 우리 현실에 더욱 가까이 적용시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이야기햇듯, 철학사는 아니다. 그렇지만,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철학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이 현실의 문제와 철학의 기본적인 물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거나, 이 책이 철학사의 커다란 줄기를 비교적 '극적'으로, 혹은 '의미있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이 이야기에서는 사상보다 인물이 먼저 나온다. 인물의 성격과 시대, 사고방식이 전면에 내세워지며, 인물이 그것을 극복하거나 좌절하는 그림을 보여준다. 그것은 곧 우리가 겪게 될 일이기도 하다.

이 안에 있는 이야기를 상세히 다루기 위해서는 많은 지면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표적인 몇 사람의 '뻔히 알려지지 않은' 사례를 일별하는 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는 플라톤을 사랑하지만, 진리를 더욱 사랑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플라톤에 대한 선전포고이자, 철학의 사조를 둘로 딱 가르는 선언이 된다. 즉 근대철학에서 극명하게 나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은 이로부터 흘러나온다. 추상적인 정신을 우위에 두느냐, 실재의 세계를 우위에 두느냐는 선택 자체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종합을 위한 시도는 철학의 가장 진지한 과제가 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정론을 인용하는 것이 나을 듯싶다.

행복에 대한 외부적 보조 중에서 가장 고상한 것은 우정이다. 사실상 우정은 불행한 사람보다는 행복한 사람에게 더 필요한 것이다. 행복은 서로 나누어 가짐으로써 증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정은 정의보다도 더 중요하다. 「사람들이 벗인 경우에는 정의는 불필요하지만 사람들이 공정한 경우에는 우정은 여전히 혜택이고」 「벗은 두 육체에 깃들 하나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정은 많은 벗들 사이에서보다 오히려 소수의 벗들 사이에서 가능하다. 「벗이 많은 사람은 벗이 없는 것과 같다.」「완전한 우정을 갖고 많은 사람들의 벗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문 중에서

친구가 많다는 것은 친구가 없다는 것과 같다는 역설적인 화법에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우정이란 두 육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는 그의 정의는 어떤 해설보다 우정의 의미를 잘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 명의 철학자가 원천기술을 내놓으면, 다음 철학자가 그것을 도드라지도록 연구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스피노자의 다음과 같은 발견은 니체, 쇼펜하우어, 프로이트 등에게 영감을 주었다.

쾌락과 고통은 우리들의 욕망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기 때문에 그 사물을 욕망 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 사물을 욕망하기 때문에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욕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물을 욕망 한다.  따라서 자유로운 의지는 없다. - 본문 중에서

쇼펜하우어는 이 패스를 받아서 수동적 의지론을 펼친다.

자연은 개인의 의지에 이바지하도록 지성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므로 지성은, 오직 사물이 의지의 동기가 되는 한에서만 사물을 인식하게 되어 있고 사물의 근본을 캐거나 사물의 참된 존재를 파악하게 되어 있지는 않다. - 본문 중에서

때문에 천재는 의지가 없는 인식의 최고의 형태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천재론을 펼칠 때의 천재는 아마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스피노자의 이야기 중에 '사과나무 이야기' 말고 익숙한 이야기가 있는데, '지복(至福)은 덕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덕 자체'라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보상을 위해 노력을 하지만, 그 노력 속에 보상이 대부분 들어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철학자들은 오류와 실패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위대한 발견의 핵심 속성으로 파악한다. 사람은 성공보다 실패에 많은 것을 배우듯이 말이다.

악한 일에 친절한 영혼이 존재할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오류 속에 진리의 정신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고 있다. -하버트 스펜서, 본문 중에서

철학의 이야기가 즐겁고 밝은 것만은 아니다. 철학으로 인해 평생 고통 속에서 살다 간 사람이 많다. 니체가 특히 그렇다. 니체의 열정적인 삶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피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나의 눈가를 축축하게 했던 이 자극적인 멘트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이 자극적인 이유는 너무나 시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니체의 인생은 한 편의 슬프고 격정적인 서사시이기도 하다.

「리스베드」하고 그는 물었다. 「왜 우느냐? 우리는 행복하지 않느냐?」- 본문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티카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 서광사 / 1990년 10월
평점 :
절판


지난번에는 스피노자의 주장을 핵문제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이번에는 스트레스와 관련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스트레스는 내가 아는 한 인류의 최대의 적이자 골치덩어리가 아닐까 한다. 특히 스트레스가 신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서, 이제는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 않으면 안되게 생겼다.

스피노자는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비롯해서 하나의 주제나 힘은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반드시 행동의 형식으로 실현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감정일 경우에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알기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것보다 더 큰 감정으로 이겨내는 것이다. 예컨대 삼국지에서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형제들이 국가의 왕위와 영토를 두고 서로 다투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자가 나타나서 그들의 국가를 통째로 삼키려 하자 그들은 싸움을 멈추고 제삼자를 대항해서 열심히 싸웠다. 서로 협력하면서... 그리고 제삼자가 물러나자 다시 그 전의 싸움을 계속했다. 그러나 더욱 커다란 감정이 나타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한 가지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마음을 괴롭히는 어떤 슬픔이나 괴로움도 일단 그것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더 이상 그를 괴롭힐 수 없다.'

이것은 오랜 시간 동안 내 생활에 지혜를 적셔 주었다. 나는 참는 것은 잘 하지만, 그것은 무조건적인 '참음'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어머니의 예민한 성격을 받아서, 조금이라도 괴로운 문제가 있으면 크게 반응하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막상 이해하려고 하자 여러 괴로움들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화를 내지 않고도 얼마든지 어떠한 말을 할 수 있으며 모든 생활이 가능하다는 가설을 추진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것에 관한 예증을 몇 가지 발견했다.*

우당도서관을 나와서 산책로를 걷고 있을 때였다. 밑에는 물웅덩이가 있었고 말 두 마리가 버려진 시체처럼 자고 있었다. 정말 어떻게 저렇게 잘 수 있을까 하고 나는 놀랐다. 지난번 술먹고 집에서 '꼬라박아' 같이 잔 것과 거의 같았다. 까치들은 그 옆에 벌떼처럼 몰려들었는데, 앉아서 쉬고 있는 말 위에까지 다니면서 말을 희롱하고 있었다. 그 때 숲에서 우렁찬 말의 울음 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마치 사자가 '으르렁' 하는 소리를 말의 그것으로만 바꿔놓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많은 까치들 중에서 한 마리도 놀라서 날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걸 보고 이제는 참새들이 허수아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상기했으며, 인간과 세균과의 진화하는 전쟁에 대해서도 상기했다. 물론 그것들은 오래된 타성과 습관에 기인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저 무서운 울음소리가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화를 내면서 말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과장이거나 '오해' 또는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무지는 누구나 가지고 있겠지만, 펼쳐 놓으면 정말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우리를 대한다. 예컨대 소크라테스의 무지가 그렇다. 그러나 무지를 애써 달고 사는 사람들은 밉다.

화를 내거나 감정을 일으키는 것중에 정당한 것이 있다. 그것은 그 오버액션이 필요한 상황에서 했을 때이다. 인자한 선생님은 누구나 좋아하지만, 사람이란 편하게 되면 기어오르기 마련이다. 그것이 또한 극을 넘어가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는데, 학생 시절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 때 선생님은 크게 화를 내서 학생들의 잘못된 생각을 돌려 놓는데, 그러한 액션은 정당하다.


그렇다면 이해에 관해서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겠는데, 무엇을 이해라고 하며, 어디까지 이해라고 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나는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는 것, 특히 이해를 하려고 참는 것 자체가 이해의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직관'이 '그것은 완전히 아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그 문제를 일단 보류해둔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돈을 내놓지 않는다고 어머니를 죽이는 등의 파렴치한 모습을 보고 '어떻게 저럴 수 있느냐?' 하면서 화를 내고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지만, 그 행동이 이해가 가기 때문에 화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것을 이해한 것은 그 살인사건이 그 사람의 죄만이 아니라, 나도 당연히 그 중의 한 부분을 물려받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사회적인 문제로 보기도 하는데, 그것도 역시 이해의 한 부분이다. 지하철 사고 역시 그렇다. 그것은 괴로운 문제이지 화가 나는 문제들은 아니다. 화를 내는 사람들은 무책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회근 선생의 알기 쉬운 논어강의 - 상
남회근 지음, 채책 기록. 송찬문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독후감이라고 쓰니 참 감회가 새롭다. 이것을 번역해서 뜻을 알아낸 것은 최근이었는데 '읽은 후의 감동'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남회근 선생의 논어강의라는 책은 다시 생각해봐도 너무 비싸다. 특히 나처럼 별다른 생계도 없는 학생에게 삼만여원의 돈은 형성하기 힘들다. 게다가 상하권을 구입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 그래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내게 있어서는 하나의 발견이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친 김에 미친척하고 하권을 주문했다. 그리고 하권이 도착하기 전에 냉큼 상권에 대한 독후감을 써버릴테다.

글을 쓰는 건 아무리 봐도 힘들다. 방금 전까지 독후감을 쓰기 위해 책을 좀 봤는데 지금 내 눈 사정이 말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눈을 더 좁혀서 거의 졸린 눈을 하고 쓰고 있다. 작가들이 참 존경스러울 때가 바로 지금이다.

하나의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 글을 쓸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러나 원작에 촛점이 실리느냐, 독자에게 촛점이 실리느냐에 따라서 내용이 달라지게 된다. 전문직종이 아닌 바에야 대체로 쓰는 타입은 후자가 될 것인데 그것도 아직 숙성하지는 않다.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이 그러한데 머릿속에 생각나는 것을 다 비워내야 속이 풀린다. 그것은 시적 거리감을 위해서도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고 감상으로 도배를 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이럴 거면 차라리 창작을 하는 편이 수월하겠다. 다른 책을 보고 혹은 작품을 보고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자기 지론이나 문장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할 것 같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더 솔직한 이유는 전일에 노래를 부르고 다녔던 그리스 철학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다. 많은 자료들 앞에 선뜻 집필을 하기가 머뭇거려지지만 빨리 내가 선정한 자료들을 훑어보고 칼을 뽑아야겠다. 아! 오늘도 서론이 너무 길다.

사실 논어에 관한 에세이라면 논어 자체의 내용만 두고라고 유익한 일이다. 덕분에 나는 논어와 한 노인의 이야기 두 맛을 한꺼번에 보았다. 그전에는 그래도 논어책 한두번은 읽은 경력으로 자신있게 책을 쥐었다.(참고로 이 책을 읽기 전에 논어 전편을 어느 텍스트라도 잡고 봐두면 도움이 크다) 그러나 이전에 내가 익혔던 해석의 방침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말았다. 대개 이러한 경우에 남는 것은 허무한 공허나 독단의 기만 정도인데 그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회근이라는 파격적 해석자는 모습을 살짝 감추고 건강한 원시의 깔끔함이 남겨졌다. (공맹 유학을 원시 유학이라고도 한다) 확실히 노인의 노련함이 진가를 발휘한 것이다. 남회근이라는 노인이 구름을 걷어가고 남은 뚜렷한 자리는 사실 한마디 뿐이다. 그것은 '경으로 경을 이해한다'는 이른바 '以經解經'이다.

나는 책을 고를 때 대개 머리말을 보는 타입이다. 머리말에 들어가기 전에 흑백사진으로 남회근 선생의 근영이 나왔는데, 일자눈썹에다 코든 머리든 손가락이든 볼이든 둥글둥글하다. 웃는 표정도 그렇다. 그 웃는 표정은 머리말에서 나에게 한가지 암시를 주었다. 그것은 마지막 대목이었는데

이 책이름을 '별재別裁'라고 정한 것도 이번의 강의가 정통유가의 정학 밖에서 다른 체재로ㅎ 이루어진 단지 개인적인 견해일 뿐, 학술적인 부류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학상달下學上達의 일을 논할 만한 정도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초판 머리말 중에서

별재라는 것은 아마 우리말로 별책부록 정도가 아닐까 한다. 저잣거리에서 파는 눈요기용 책이라는 의미가 문맥에 보인다. 왜 정통유학에 깊이 통하고 불교 도교에다가 대학 교수까지 하여 논문이라면 달인이 되었을텐데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물론 이 의문은 책을 선택한 후에 자세히 느낀 것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남선생이 문화와 민족의 근대사적 아픔을 온몸으로 쓰리도록 감당했고 누구보다 사랑했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욕구에 가득 차 있다는 억측으로 본다면 이는 분명히 이전 학문적 접근에 대한 회의일 것 같았다. (이것에 대해 여친은 좀처럼 수긍할 수 없다는 눈치다) 그리고 어투를 존댓말로 써 내려가는 것도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존댓말로 써 내려간다는 말은 내가 생각할 때 상당한 경지에서 나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그리고 차분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실타래를 풀어나가듯이 말 속에서 같이 돌면서 풀어나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크리슈나무르티가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은 종전에 원문과 주석을 두루두루 보던 습관을 버리고 주석을 일단 버려둘 것을 제안한다틀렸다고 하기 일쑤다. 이 글을 읽고 과거 문화와 선인들을 내가 얼마나 과소평가하고 있었는지 새삼 알게 되었다. 그것은 특히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그 원문을 앞뒤좌우로 잘 살펴보라고 한다. 뭐가 보이지 않느냐 하면서. 사실 우리는 죽은 사람들의 위치나 존재를 너무 자의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정리해내지 못하면 그것을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내 의도와는 관계없이 선현들을 무시하거나 마음대로 다루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기 때문에 더욱 가려내기 어렵다.

문화와 기술이 언제부터 결별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혹은 결별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둘은 서로 뜻이 맞지 않았는지 기술은 앞만 보고 내달렸고 문화는 가만히 멈춰 버린 것 같다. 선현들과 이전문화의 성실치 못한 재판(再版)에 불과한 우리는 실마리도 알지 못하고 사장시켜버린 고귀한 유산들이 얼마나 많은가. 축성술, 건축술, 종을 만드는 기술, 도자기 만드는 기술 등 많은 기술은 선현의 업적을 따라가지 못할 뿐더러 제대로 모방하지도 못한다고 한다. 그것은 책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마침 최근에 내가 다니는 서당의 훈장님이 말씀하셨는데, 이전에 편집 기술은 정말 오묘하고 세밀하다고 한다. 그 때도 당연히 '영원한 맹자'를 보고 있었는데, 맹자는 권도라는 말은 한마디도 안하면서 권도에 대해서 여러 방향으로 말하고 있었다. 맹자도 이러할진대 할아버지 혹은 증조할아버 격인 논어는 어떠하겠는가? 한학에 정통한 학자들도 한문의 문장은 모두 맹자나 논어에서 나온다고 한다. 당시로 말하면 세계제일의 인재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논어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지금 각국의 석학들이 성경을 자국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과 비슷하다. 남회근 선생은 논어의 문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된 잘된 글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러한 문맥적 상호작용을 염두해 두면서 한권의 책을 서술해 나갔다. 역사가는 하나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카아가 말하듯이 한 사상에 대한 해석도 관점으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물론 관점이 있으면 그에 대한 비약도 따르기 마련이다. 간간히 그런 부분이 없지 않지만 노인의 숙련된 이야기로 충분히 커버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 다음으로 눈에 띄는 부분은 이전의 해석에 대한 비판이다. 중국이 한창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있을 때는 많은 중국인들이 세계 정세에 궤를 같이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절박한 위기감에 휩싸였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공자의 상을 부수고 그의 토대 위에 세워진 문화를 논리적, 비논리적으로 비판하려고 달려들었지만 화무십일홍처럼 얼마 못가 다시 복원하기 시작하였고 오히려 비판에 가세하던 서양에서 공자를 배우려고 혈안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의 시대가 그들에게 준 너무나 무거운 짐을 어떻게든 감당하려는 절박한 발상에서 시작한 사건이었다고 저자는 그들을 조용히 두둔해주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최근 김교수라는 사람이 공자를 죽이고자 나섰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읽어보았는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지금도 변하지 않는 생각이지만 나는 그가 진정으로 공자를 죽이기를, 그렇지 못한다면 후세에 교훈이 되도록 정당하게 죽이려는 시도라도 남겼으면 했다. 진정한 질문이 진정한 가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서점에서 그 책을 보았는데 커버 색깔이 시원한 바다출판사 색으로 바뀌었고 판과 쇄를 수십번 하였더랬다. 씁쓸한 미소 외에 별로 느껴지는 게 없었다. '당신은 공자를 죽였다기 보다 쉽게 열정을 보이는 국민의 기질을 이용해서 돈을 챙긴 거요?'라는 질문을 견딜 수 있는지 마음속으로 물음을 가져본다.
논어강의의 저자는 공자의 해석자들이 공자를 의곡하였기 때문에 지금의 이 사태에 직면했다고 풀이하고 있다. 물론 내 생각에 그것은 하나의 가설이라고 본다. 좀 더 다른 무엇이 요구되는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공자가 영원에 닿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논어텍스트는 대개 주자집주일텐데 주자주 정도를 버리는 것은 아깝지 않으나 존경하는 율곡선생의 구결까지 때로는 버려야 한다는 대가가 따른다. 한문에 달려 있는 토씨를 구결이라고 한느데, 그것은 옛부터 율곡 선생의 그것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구결이 바뀌면 문장 성분도 바뀌고 해석 자체가 바뀌게 된다. 이것이 저자가 보이는 두번째 억측의 여지도 되지만 그는 자신의 해석의 확실한 근거들을 들고 있다. 가끔 쉽게 넘어가 버리기는 하지만 다른 해석들처럼 빙산을 절단기로 깎아서 공허하게 하는 형세가 아니라 새로운 빙산으로 예전의 빙산을 쳐서 대치시키는 형세라고 표현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보고서 내가 얻은 소득이라면 숨겨졌던 문맥이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경전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故의 수수께끼'에 말려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의 내용 뒤에 '때문에'라는 말이 나오면 분명히 인과관계가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이전에 논어를 읽을 때 공자는 어쩔 때는 유동적이며 인정세태에 두루 통한 듯한 인상을 주지만 어떤 때는 완고한 할아버지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공자의 말 자체가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어려움에 특히 배려를 하고 문맥을 살리고 공자의 본의를 복원하는데 거의 모든 페이지를 썼다. 덕분에 나는 공자의 올바른 모델에 접근하는 상을 머릿속에 갖게 되었고, 한 이십년 정도 젊은 공자를 모시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읽은 가장 큰 소득이다.

좀더 본격적인 글을 써서 이 글이 나타내고 있는 특징들을 살펴보고 싶지만 글의 성격도 성격이고, 그렇게 할 시간이 없기도 하기 때문에 예고편으로 하나의 대목만 귀뜸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논어의 제일 첫편은 학이편으로 '배움'이라는 의미를 알려주는 중요한 장이다. 이 때의 '학'이라는 개념은 좀 더 확장을 해야 하는 개념이다. 나는 독서라는 개념에서부터 출발해서 더욱 넓은 개념으로 가고자 하였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이 '학'의 개념은 심오하기도 해서 지금까지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나름대로 그것을 해석해 본다면 '하나하나 체험하고 직접 깨우쳐 가면서 얻은 진정한 지식이 몸에 배어 있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자하는 '현명한 자를 벗으로 두어 자기의 잘못을 고쳐나가고 제힘껏 부모를 모시고 온몸으로 주인을 섬기고 벗과 교제할 때는 신의 있게 말을 한다면 비록 글공부는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고 나는 반드시 학문을 한다고 평가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공자가 말하는 학문정신의 모습이 보인다. 또한 자로가 공자에게 '선생님, 백성들이 있고 사직이 있는데 꼭 독서를 해야만 학문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은 대목에서는 분명히 차이점이 드러난다. 학이시습지운운 하는 장 다음에는 바로 유자가 효제를 강조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효제와 학을 연결시켜 이해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즉 효제는 가족들에 대한 윤리를 강조하고 있는 덕목이며 뿐만 아니라 독특하게 벗과의 교제도 강조한다. 가족은 가깝게는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 있는데 어버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몸을 잘 아껴서 과로사에 이르거나 상하지 말하야 하며 형제들과의 우애도 잘 지켜야 한다.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안다. 세상에 가족에 대해서 부끄러운 점이 없거나 잘못이 없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일 것이다. 그 점으로 따지면 아직 나는 '학' 자의 한 획도 긋지 못했다. 항상 누나에게는 성급하고 애티나는 말을 쉽게 내뱉고 내몸을 관리하지 못해 벌써 열번이 넘는 전신마취를 하여 부모의 속을 태웠다. 이것은 나를 모르는 다른 사람에게 적절히 대응하는 것의 몇백배는 더 힘든 경지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과거 중국의 국가 개념은 하나의 대가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유가는 그러한 관계에 주목한 학파다. '가'는 할아방(할아버지)의 할아방의 할아방 중에 왕할아방에서부터 시작해서 씨를 낳고 또 그 씨가 씨를 낳아서 형성된 국가이다. 때문에 왕실이 한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효제라는 것은 나라 전체로 연결되는 개념이다. 게다가 친구와의 관계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라면 사회관계까지 효가 걸쳐 있는 셈이다. 그것이 바로 '인'과 '학'의 근본이자 시작이라고 저자는 보고 있다. 일단 본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한다.

논어의 백미는 담박함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논어를 읽고 있으면 자꾸 눈물이 나려구 한다. 안연이 죽어서 공자가 통곡할 때는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공자가 제자들과 산책을 가거나 조용하게 한마디 하는 대목에서는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 답답하고 눈물이 콱 쏟아질 것 같다. 그 이유를 한번 고민해봐야겠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하권을 보고나서 논어를 마음속에서나마 정리해야겠다.

사람의 뼈대를 형성하는 것은 고전이지만 고전에 침잠하면 그만큼 고전적인 사람이 된다는 단점이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고전적인 부분을 유머로 승화시켜서 하나의 장점을 갖지 못한다면 어딜 가서 사랑받을 생각은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것이 요즘 나의 큰 숙제이다.



* 賢賢易色, 事父母, 能竭其力, 事君, 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胃之學矣 -學而 8
** 有民人焉, 有社稷焉, 何必讀書, 然後爲學
- 先進 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