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철학 이야기
윌 듀란트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1년 5월
평점 :
내가 철학을 접하게 된 계기는 아주 우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현학적으로 말하자면, 외부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나는 내적으로 항상 불만에 가득차 있었고, 그것을 표출할 만한 기제를 마련하지 못했다. 나는 촌구석의 꼬마 아이에 불과했으며, 읽은 책이라고는 교과서가 전부였다. 나는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골을 떠난 것은 고등학생이 되어서였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넓은 세계에 발을 들여논 것은 대학생이 되어서였던 것 같다. 새로운 세계에서 친구가 찾아왔다. 나는 그 녀석이 주는 책들을 낼름낼름 받아먹었다. 그 중에 이 책이 끼어 있었다. 전혀 새로운 사고방식이었지만, 굉장히 익숙했다. 나의 거대한 물음표가 드디어 언어의 옷을 입는 순간이었다.
윌 듀런트의 성공은 대단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온 번역서만 백 편 가까이 된다고 하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책에서는 철학의 주제들과 철학하기의 방법이 비교적 성실히 담겨 있다.
이 책을 처음 만난 지도 10년이 다 돼 가지만, 나는 '철학' 을 생각하면서, 번번이 이 책으로 되돌아오곤 한다. 이 책의 저자가 시대의 철학자들의 저서를 독파해서 그들의 언어로 서술했다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인문학적 뻥'에 불과하다. 그러면 세상의 번역가들은 모두 원 저자를 뛰어넘었다는 말인가.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도 좋은 '광고 효과'가 되지 못한다. 좀 더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저자의 사상과 문체를 현대에 가깝게 재구성해놓았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원저자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윌 듀런트가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저자를 통해 원저자의 생각을 우리 현실에 더욱 가까이 적용시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이야기햇듯, 철학사는 아니다. 그렇지만,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철학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이 현실의 문제와 철학의 기본적인 물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거나, 이 책이 철학사의 커다란 줄기를 비교적 '극적'으로, 혹은 '의미있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이 이야기에서는 사상보다 인물이 먼저 나온다. 인물의 성격과 시대, 사고방식이 전면에 내세워지며, 인물이 그것을 극복하거나 좌절하는 그림을 보여준다. 그것은 곧 우리가 겪게 될 일이기도 하다.
이 안에 있는 이야기를 상세히 다루기 위해서는 많은 지면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표적인 몇 사람의 '뻔히 알려지지 않은' 사례를 일별하는 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는 플라톤을 사랑하지만, 진리를 더욱 사랑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플라톤에 대한 선전포고이자, 철학의 사조를 둘로 딱 가르는 선언이 된다. 즉 근대철학에서 극명하게 나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은 이로부터 흘러나온다. 추상적인 정신을 우위에 두느냐, 실재의 세계를 우위에 두느냐는 선택 자체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종합을 위한 시도는 철학의 가장 진지한 과제가 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정론을 인용하는 것이 나을 듯싶다.
행복에 대한 외부적 보조 중에서 가장 고상한 것은 우정이다. 사실상 우정은 불행한 사람보다는 행복한 사람에게 더 필요한 것이다. 행복은 서로 나누어 가짐으로써 증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정은 정의보다도 더 중요하다. 「사람들이 벗인 경우에는 정의는 불필요하지만 사람들이 공정한 경우에는 우정은 여전히 혜택이고」 「벗은 두 육체에 깃들 하나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정은 많은 벗들 사이에서보다 오히려 소수의 벗들 사이에서 가능하다. 「벗이 많은 사람은 벗이 없는 것과 같다.」「완전한 우정을 갖고 많은 사람들의 벗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문 중에서
친구가 많다는 것은 친구가 없다는 것과 같다는 역설적인 화법에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우정이란 두 육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는 그의 정의는 어떤 해설보다 우정의 의미를 잘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 명의 철학자가 원천기술을 내놓으면, 다음 철학자가 그것을 도드라지도록 연구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스피노자의 다음과 같은 발견은 니체, 쇼펜하우어, 프로이트 등에게 영감을 주었다.
쾌락과 고통은 우리들의 욕망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기 때문에 그 사물을 욕망 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 사물을 욕망하기 때문에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욕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물을 욕망 한다. 따라서 자유로운 의지는 없다. - 본문 중에서
쇼펜하우어는 이 패스를 받아서 수동적 의지론을 펼친다.
자연은 개인의 의지에 이바지하도록 지성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므로 지성은, 오직 사물이 의지의 동기가 되는 한에서만 사물을 인식하게 되어 있고 사물의 근본을 캐거나 사물의 참된 존재를 파악하게 되어 있지는 않다. - 본문 중에서
때문에 천재는 의지가 없는 인식의 최고의 형태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천재론을 펼칠 때의 천재는 아마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스피노자의 이야기 중에 '사과나무 이야기' 말고 익숙한 이야기가 있는데, '지복(至福)은 덕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덕 자체'라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보상을 위해 노력을 하지만, 그 노력 속에 보상이 대부분 들어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철학자들은 오류와 실패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위대한 발견의 핵심 속성으로 파악한다. 사람은 성공보다 실패에 많은 것을 배우듯이 말이다.
악한 일에 친절한 영혼이 존재할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오류 속에 진리의 정신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고 있다. -하버트 스펜서, 본문 중에서
철학의 이야기가 즐겁고 밝은 것만은 아니다. 철학으로 인해 평생 고통 속에서 살다 간 사람이 많다. 니체가 특히 그렇다. 니체의 열정적인 삶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피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나의 눈가를 축축하게 했던 이 자극적인 멘트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이 자극적인 이유는 너무나 시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니체의 인생은 한 편의 슬프고 격정적인 서사시이기도 하다.
「리스베드」하고 그는 물었다. 「왜 우느냐? 우리는 행복하지 않느냐?」-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