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 서광사 / 1990년 10월
평점 :
절판


지난번에는 스피노자의 주장을 핵문제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이번에는 스트레스와 관련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스트레스는 내가 아는 한 인류의 최대의 적이자 골치덩어리가 아닐까 한다. 특히 스트레스가 신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서, 이제는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 않으면 안되게 생겼다.

스피노자는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비롯해서 하나의 주제나 힘은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반드시 행동의 형식으로 실현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감정일 경우에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알기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것보다 더 큰 감정으로 이겨내는 것이다. 예컨대 삼국지에서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형제들이 국가의 왕위와 영토를 두고 서로 다투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자가 나타나서 그들의 국가를 통째로 삼키려 하자 그들은 싸움을 멈추고 제삼자를 대항해서 열심히 싸웠다. 서로 협력하면서... 그리고 제삼자가 물러나자 다시 그 전의 싸움을 계속했다. 그러나 더욱 커다란 감정이 나타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한 가지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마음을 괴롭히는 어떤 슬픔이나 괴로움도 일단 그것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더 이상 그를 괴롭힐 수 없다.'

이것은 오랜 시간 동안 내 생활에 지혜를 적셔 주었다. 나는 참는 것은 잘 하지만, 그것은 무조건적인 '참음'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어머니의 예민한 성격을 받아서, 조금이라도 괴로운 문제가 있으면 크게 반응하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막상 이해하려고 하자 여러 괴로움들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화를 내지 않고도 얼마든지 어떠한 말을 할 수 있으며 모든 생활이 가능하다는 가설을 추진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것에 관한 예증을 몇 가지 발견했다.*

우당도서관을 나와서 산책로를 걷고 있을 때였다. 밑에는 물웅덩이가 있었고 말 두 마리가 버려진 시체처럼 자고 있었다. 정말 어떻게 저렇게 잘 수 있을까 하고 나는 놀랐다. 지난번 술먹고 집에서 '꼬라박아' 같이 잔 것과 거의 같았다. 까치들은 그 옆에 벌떼처럼 몰려들었는데, 앉아서 쉬고 있는 말 위에까지 다니면서 말을 희롱하고 있었다. 그 때 숲에서 우렁찬 말의 울음 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마치 사자가 '으르렁' 하는 소리를 말의 그것으로만 바꿔놓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많은 까치들 중에서 한 마리도 놀라서 날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걸 보고 이제는 참새들이 허수아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상기했으며, 인간과 세균과의 진화하는 전쟁에 대해서도 상기했다. 물론 그것들은 오래된 타성과 습관에 기인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저 무서운 울음소리가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화를 내면서 말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과장이거나 '오해' 또는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무지는 누구나 가지고 있겠지만, 펼쳐 놓으면 정말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우리를 대한다. 예컨대 소크라테스의 무지가 그렇다. 그러나 무지를 애써 달고 사는 사람들은 밉다.

화를 내거나 감정을 일으키는 것중에 정당한 것이 있다. 그것은 그 오버액션이 필요한 상황에서 했을 때이다. 인자한 선생님은 누구나 좋아하지만, 사람이란 편하게 되면 기어오르기 마련이다. 그것이 또한 극을 넘어가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는데, 학생 시절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 때 선생님은 크게 화를 내서 학생들의 잘못된 생각을 돌려 놓는데, 그러한 액션은 정당하다.


그렇다면 이해에 관해서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겠는데, 무엇을 이해라고 하며, 어디까지 이해라고 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나는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는 것, 특히 이해를 하려고 참는 것 자체가 이해의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직관'이 '그것은 완전히 아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그 문제를 일단 보류해둔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돈을 내놓지 않는다고 어머니를 죽이는 등의 파렴치한 모습을 보고 '어떻게 저럴 수 있느냐?' 하면서 화를 내고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지만, 그 행동이 이해가 가기 때문에 화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것을 이해한 것은 그 살인사건이 그 사람의 죄만이 아니라, 나도 당연히 그 중의 한 부분을 물려받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사회적인 문제로 보기도 하는데, 그것도 역시 이해의 한 부분이다. 지하철 사고 역시 그렇다. 그것은 괴로운 문제이지 화가 나는 문제들은 아니다. 화를 내는 사람들은 무책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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