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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 511 (작은글씨) - 라로슈푸코의 잠언과 성찰 ㅣ 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 511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 지음, 강주헌 옮김 / 나무생각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주요한 모랄리스트> 못마땅한 인생사, 풍자, 불만, 그리고 시 - 라로슈푸코
흔히 모랄리스트를 이야기할 때는 '파스칼'과 '라로슈푸코'를 지목한다. 라로슈푸코는 국내에서는 잘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세계의 수많은 저술가들이 '라로슈푸코'가 남긴 구절을 애용한다.
파스칼과 라로슈푸코는 똑같이 인간성을 탐구했으나, 두드러진 차이점이 있다. 파스칼은 사상의 근원을 영성에서 찾고 있는 반면 라로슈푸코는 허무하지만 생동감 있는 현장의 삶에서 찾고 있다. 자연히 파스칼의 어조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세계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고귀하고 벅찬 '원천'이 그에게는 있는 것이다. 라로슈푸코는 정치하다가 숙청된 인물로 세상에 대한 강한 반감을 숨기지 않는다. 너무 노골적으로 염세적 풍자를 드러내기 때문에 당대에도 많은 비판과 비난을 피할 수 없었으나, 그가 인생의 리얼리티를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그려냈다는 점은 찬사를 받는 점이다. 다만 파스칼은 '실존'을, 라로슈푸코는 '염세'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이들이 생각하는 인생이란 '녹록치' 않거나 '탐탁치' 않은 둘 중의 하나이다. 이것이 두 사람이 만나는 '최소한의 지점'이다.
자연은 모든 진리를 각각 그 자신 속에 두었다. 우리는 그들 중에 일자를 타자에게 포함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각자는 그 자신의 위치를 가지고 있다. - 파스칼, '팡세'
라로슈푸코에게서 위와 같은 언어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자기가 자기를 깎아내는 것은 다만 남에게 칭찬을 받기 위함이다. - 라로슈푸코, '잠언과 성찰'
위의 언어는 부분에 불과하지만, 진정 '라로슈푸코적'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인간성의 허위를 이토록 적나라하며 불만에 가득찬 표정으로 그려내는 것은 '라'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 그러나 라로슈푸코의 사상은 삶과 현실, 생활과 허위 등 인간의 '드러나 있는 면모'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글의 '문학성' 측면으로 본다면 '라로슈푸코'가 파스칼보다 더욱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특히 라로슈푸코의 언어는 '시'에 가깝거나, 그 자체로 '시'인 경우가 많았다.
운명과 운명 사이에 얼마만한 차별이 보이게 될지라도, 거기에는 여전히 길흉화복의 어떤 상쇄가 있어서 운명과 운명을 평등하게 한다.
운명은 이성도 교정할 수 없는 많은 결점을 교정하여 준다.
위선이란 악덕이 미덕에게 바치는 찬사인 것이다.
늙음의 고개를 오를 무렵이 되면, 육신이 쇠퇴하는 소식을 알려주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젊지만 아름답지 않고, 또 아름답지만 젊지 않은 것은 아무 쓸모도 없다. - 이상, '잠언과 성찰' 본문
위의 문구를 접하며 우리는 달관한 인생관이 묻어나는 시 구절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라로슈푸코를 '염세와 불만'의 사상가로만 보기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글귀 안에는 '정의'와 '섭리', 세상사에 대한 애정이 녹아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작가는 자신의 글 속에 풍자와 애정을 골고루 섞어 놓았다. 가끔 번뜩이는 심리학자의 면모 또한 곳곳에서 포착된다.
아무리 화려한 행위일지라도 그것이 위대한 계획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닌 한 위대하다고 간과할 것은 못된다.
군자의 무리에게 끊임없이 주목을 끌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이야말로 참다운 군자의 몸가짐이다.
너무 성급하게 은혜를 갚고자 하는 것은 일종의 배은망덕이다.
얻어진 명예는 얻어야 할 명예의 담보물이다.
우리들은 왕왕 우리들을 괴롭히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쪽에서 짓궂게 구는 상대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
인간 전반을 안다는 것은 개개의 인간을 아는 것보다 쉽다.(히틀러 : 군중을 속이는 것이 개인을 속이는 것보다 쉽다.) - 이상, '잠언과 성찰' 본문
보이는 것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것은 문학자의 첫째 덕목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스칼은 철학자에 가깝고, 라로슈푸코는 문학자에 가깝다. 인생을 함께 할 든든한 벗 하나 없고, 허위와 기만에 가득 찬 사람들을 쳐다보아야 하는 고통을 우리는 라로슈푸코에게서 더 많이 보게 되기 때문이다. 모랄리스트들은 도덕과 가치를 위해서 '인간성'을 탐구하는 사명을 가지지만, '도덕과 가치'보다는 '인간성 반성'에 더욱 무게를 실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각자가 '모랄리스트'를 판단하는 척도가 되며, 나와 당신의 생각 차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