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위대하지 않다 (양장)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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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학2년생의 지성은 종교적 회의와 철학적 성찰 속에 침잠해야 한다

대학 시절 나의 행보 중 가장 다행스러웠던 것은 두 사람을 만난 일이다. 한 명은 유대교로부터 극렬한 저주를 받고 파문당한 철학자 스피노자이며, 나머지 한 명은 평생을 간질과 주색, 노름, 종교적 회의, 무신론적 유혹에 시달렸던 소설가 도스또옙스끼였다.

스피노자는 철학자답게 인격이 있는 신을 이성 체계의 정점으로 대체했다. 신은 육체를 가지면서 마음에 안 드는 녀석들을 혼내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원인'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 근거를 가지며 모든 유한한 물질의 근거를 제공한 무한한 존재이며 이 질서 안에 편입돼 있다. 우리가 만물과 대면하는 것은 곧 신의 흔적을 접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유대 교회로부터 파면당하고 바루크(Baruch)라는 유대식 이름을 버리게 된 이유다.

도스또옙스끼는 스스로 '어둡고 음습한 공포와 범죄의 세계'를 창작의 기반으로 삼았다고 회고했다.

도스또옙스끼의 작품 속에는 독실한 신자에서부터 무수한 무신론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운명이 얽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종교적 회의에 가장 괴로워한 인물이 바로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이반이다. 도스또옙스끼는 무신론이든 유신론이든 고통스러운 회의의 과정을 통해 달성된 신념만이 진정한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모순들을 숨기지 않고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솔직히 말해라. 대답해. 네가 종국에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평화와 안식을 주겠다는 목적을 갖고 인간의 운명이라는 건물을 짓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그 목적을 위해서는 아주 자그마한 생물, 자그마한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는 바로 그 아이를 불가피하게 괴롭힐 수밖에 없다.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할 그 아이의 눈물을 기초로 건물을 세워야 한단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너는 건물을 짓겠느냐? 사실대로 말해라."
- 이반이 알료사에게, <까라마조프가 형제들>, 315쪽에 재인용



나는 특별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 심취했다. "최고의 지성은 완전무결하고 위대한 신에게 귀의하지 않을 수 없다"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주장에 대해서 적극 동조해 복수의 종교 단체(사이비라는 의혹을 받기도 했었던)에 가입해 활동한 적도 있었다. 지금도 나는 종교가 있느냐는 질문에 머뭇거리며, 내면 속에서는 아직도 유신론과 무신론이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의 관계처럼 오랜 전통 속에서 격렬히 토론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말하기 민망하겠지만, 세계의 지성들이 동경해마지 않는다는 '대학2년생' 시절이라는 게 있다. 초년생 때는 철이 없었고, 졸업생 때는 취업의 압박이 만만치 않다.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생활인이 평생 동안에 아무 걱정 없이 지성에 심취할 수 있는 기간이라고는 고작 대학2년생 1~2년 정도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종교를 가지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신을 믿든 그렇지 않든 그 시절에는 반드시 '종교적 회의'라는 터널을 지나쳐야만 종교관이 비옥해질 수 있다. 만약 이 터널이 생략된다면 사회적 중추가 되어서 십일조나 갉아먹고 우파의 논리를 뻐꾸기처럼 읊어대는 보수적 종교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 오늘날 이명박 장로를 추종하고 사학법의 취지에 상관없이 그 자체를 빨갱이로 매도하는 종교 지도자들이나 미국의 기독교 세력들, 탈레반의 근본주의자들처럼 빈껍데기 신앙만이 가득한 세월을 살다가 하느님 없는 무덤을 맞이할 수도 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종교적 회의의 터널이 있는 곳을 아는 듯하다. 하지만 열렬한 히친스주의자가 되어 무신론자가 되는 것은 히친스가 바라는 것도 아니며 또다른 종교를 만드는 것일 수 있다. 
 

 

히친스는 무신론의 종파를 세우지 않는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영국 포트머스에서 해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유대계 어머니에게 활달한 기질을 물려받았다. 옥스퍼드 대학 재학 시절엔 트로츠키주의자였다. 졸업 후 좌파 성향의 뉴스테이츠맨지(誌)에 들어갔고 그리스 특파원 등을 거쳐 1981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네이션·배니티 페어 등 유력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며 '키신저 재판' '미국을 만든 사람 토머스 제퍼슨' '왜 조지 오웰이 중요한가' 등 10여 권의 베스트셀러를 썼다. 우아한 영국 억양, 유려한 문체, 명쾌한 논지, 신랄한 기지로 수많은 팬과 동수의 적을 만들었다.

히친스의 책 <신은 위대하지 않다>를 다른 말로 하면 <반신론(反神論)> 정도 되겠는데, 이 말 안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이때의 '반(反)'은 anti를 뜻하는 '반대하다'와 '반성하다'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히친스의 이 책을 <신에게 반대하는 책>으로 읽거나 <나의 신 관념을 반성하는 책>으로 읽거나 큰 차이가 없겠지만,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전에 도킨스에게 내가 말했어요. '여기 1000명이 있다고 치자. 설령 그들 모두를 무신론자로 바꿔놓을 수 있다 쳐도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도킨스가 '아니, 왜?' 하더군요. '그래야 논쟁을 계속 할 수 있으니까'라고 대답했어요. 완승에는 뭔가 빠진 게 있어요. 내가 전적으로 옳다 해도 반대파가 살아남길 바래요. 논쟁은 어느 쪽이 이기냐에 관계 없이 그 자체로 우리를 계몽합니다."
- 2008.1.19, 조선일보 인터뷰
 

 

그러니까 히친스의 관점에서는 <신에게 반대하는 책>으로 서술할지라도, 독자는 <나의 신 관념을 반성하는 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 책을 읽는 하나의 포인트다. 인류가 탄생하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오랜 세월 동안 종교가 비종교에게 박해를 받았던 사례보다 종교가 종교에게 박해를 받았던 사례가 더 많으며, 이보다 종교가 군림한 시간이 더 길었다. 요컨대 종교의 적은 타 종파가 아니라 이성이다.
종교와 이성 사이에는 터널이 하나 가로질러 있는데 그것은 앞서 말했던 비참과 회의의 터널이다. 이 터널을 통해 수많은 지성들이 빛을 밝혀 왔다. 하지만 터널을 통하지 않은 사람들은 무고한 자들을 화형에 처하거나 지독한 독단으로 사람들에게 전혀 감흥을 주지 않아 결국 잊혀졌다. 때문에 나는 종교적 감흥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오늘날의 대부분의 종교지도자들은 비참과 회의의 공포를 받아들이지 못한 겁쟁이라고 규정한다. 이성과 '고통의 관계'를 갖지 못한 모든 종교 관념은 인간의 지성을 유아기 수준에 머무르게 한다.

히친스의 주장에 동조하든 반대하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문제는 그가 던지는 의문과 회의,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이 받아들일 만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성은 끊임없이 질문을 만들어내고, 종교는 끊임없이 답을 만들어 낸다. 질문이 먼저인가, 답이 먼저인가. 그것을 명확히 가리는 것은 쉽지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잘못된 질문에는 잘못된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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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08-03-09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에요, 승주님.
잘 지내시죠? ^^
요즘 일교차가 심합니다.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승주나무 2008-03-10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ud-S 님 안녕하세요. 저는 요즘 돼지처럼 마니마니 먹어서 감기는 안 걸리겠지만, 그 대신 살덩어리가 ㅠㅠ
님도 건강하시고, 간만에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당~~

2008-03-10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로시 밴드 Dorothy Band 1
홍작가 글 그림 / 미들하우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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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만화책 나이테는 중학교 때 아이큐점프에 나오는 드래곤볼 시리즈로 끝났다가
대학 때 잠시 살아났다. 몬스터, 천재 유교수의 생활, 바르세르크 등등
미야자키 하야오 사단의 만화에 감동받으면서
우리는 왜 이런 만화를 만들지 못할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재패니메이션의 나라에서도 한국 작가들의 터치 기술은 정평이 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광에 봉사하는 하청업체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민족감정을 이야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멋과 개성을 살린 만화 유전자가 아이들과 어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일 뿐이다. 그러니까 <도로시 밴드> 같은 만화가 몹시도 그리웠다는 말이다.

80년생 젊은 작가 홍작가는 도로시를 사랑했고 그래서 도로시의 아픔과 상처의 기억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대신 도로시의 분신들인 친구들이 저마다의 사연과 굴레를 가지고 왔다. 주인공과 주인공의 친구들이 등장하는 모든 작품은 굴레와 매듭을 풀어가는 과정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도로시 친구들의 특징이 참 재밌다. 허수아비(guitar)는 "애드리브의 달인. 뇌가 없어서 곡을 암기하지 못한"단다. 나와 비슷한 캐릭터다. 나는 잊어버리는 것을 건망증이라 부르지 않고 '잊어버리는 기술'이라고 부른다. 좀더 갖다 붙이면 토마스 쿤의 '축적형 지식을 극복한' 창조적 지식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지식이 머리에서 발효된다는 점에서는 기억보다 나는 망각을 선호한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곡 잊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야. 머리가 아닌 어딘가에 남아 있거든. 작은 단어 하나가 삶을 바꾸곤 하는 법이지. (181)  
   

이런. 흠흠.. 내가 너무 허수아비만 편애했나 보다. 강철나무꾼(base)은 "말을 가슴에 담아두지 않는 녀석. 정확한 리듬을 타지만 감정이 없다"고 한다. 사자(drum)은 "엄청난 무술실력을 자랑하지만 무대 위에선 한없이 작아지는 소심남"이다. 설정이 참 재미있다. 이런 병통들이 있으니 인물들이 사랑스럽다.
도로시가 신내림을 받은 이유는 좀 엉뚱하지만, 도로시는 억눌린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는 것만으로 충분히 '신내림'을 받을 만하다.

   
  "버스 손잡이에 껌 붙여논 자식 언놈이야!!
넌 내 정신을 치유불가 상태로 만들어 버렸어!
아침까지만 해도 나쁘지 않았던 나의 하루에 사형선고를 내린 거야!!
그치만 주식이 올랐지! 내릴 곳을 지나쳤어!♩♪" (214~215)
 
   

일상 속에서 온갖 떠오르는 단어를 아무렇게나 조합하듯 도로시는 가사를 거의 '시뿌리'지만, 듣고 보면 속 시원한 구석이 있다.

작품의 기본 구성은 뻔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오즈의 마법사를 섞어 놓은 듯한 스토리 원형에다가 우리나라 현대사의 이야기를 섞어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놓지 않게 만드는 힘은 작가의 세심한 관찰력과 기발한 전개방식이다. 이 이야기가 만약 소설이었다면 이 정도 재미는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구? 이것은 '만화'니까. 만화의 형식으로 소설을 써넣은 '그래픽 노블'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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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움직이게 만드는 힘 프리 윌
박원순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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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진보세력, 박원순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 박원순 강연과 그의 책 <프리윌>을 통해 알아본 진보의 가능성




제17대 대통령 선거가 이명박 후보의 과반수 당선으로 막을 내렸다. 국민들은 이제까지 '진보'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해온 정치세력들에게 '가짜진보'라는 엄정한 평가를 내렸다. 한나라당 부설 여의도연구소가 지난 1월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KSDC)와 함께 실시한 ‘2007년 유권자 성향조사’ 결과를 보면 유권자들의 이념구성은 진보와 중도를 합해 63.9%에 이르렀다. 중도 실용주의가 두터워지기는 했지만 보수 이념이 50% 가까운 당선자를 만들어낼 만큼 강성하지는 않았다. 이는 유권자들이 '현재의 진보'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라는 시각을 반영한다. 민노당의 몰락도 유의미한 현상이다. 노무현 지지자들의 결집에도 불구하고 2002년 대선 95만7148표(3.9%)라는 선전을 했던 민노당 권영길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유권자 확대와 결집도 완화라는 자유로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71만1715표(3%)라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성적표를 받아 '진보세력의 죽음'을 알렸다.
이제 우리는 진보라는 이름을 처음부터 다시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자면 역할모델이 필요한데 마침 '아름다운가게'의 5년 성과를 정리하는 박원순 씨의 저서 '프리윌'이 출판됐다. 때에 맞춰 열린 박원순 씨의 북세미나 강연(2007년 12월 17일, 교보문고)의 녹취록과 <프리윌>의 서평을 통해 '미래의 진보'를 위한 과제를 정리해 보았다.


 



1. 영업자 마인드 - 자세를 낮추고 서민의 언어를 쓰라

아름다운 가게는 2002년 안국1호점이 개장된 이래 현재까지 102배의 성장을 거뒀다. 전국적으로 84개의 지점을 개설하고 판매익은 100억원대에 달하며, 180여명의 상근 간사와 5,000여명의 자원봉사자가 멈추지 않고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 기업이라는 다소 생소한 모델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성과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경력과 무관하게 박원순 상임이사는 시종 자세를 낮췄다. 그의 모습을 보고 필자는 영업 직원의 절실함과 히딩크 전 축구대표팀 감독의 '배고픔'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심지어 그는 채용하고 있는 간사들에게까지 영업을 한다. 이사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자신을 '원순 씨'라고 부르는 게 얼마나 친근해 보이느냐며 간사들을 압박하는 모습이 그의 책 곳곳에 스며 있다.

"소품이 필요하다면 의뢰해 주세요. 전국의 지점망을 탈탈 털어서라도 찾아낼 수 있어요. 그러니 걱정 말고 기부해 주세요."
"만약 인생의 목표를 아직 잡지 못하는 젊은이가 있다면, 또는 시간적 여유가 많아서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누구나 환영합니다. 하지만 월급은 좀 적을 겁니다.(웃음)"(강연 요지)





<박원순 변호사는 2시간 가까운 강연시간 동안 낮은 자세와 유행가 같은 비근한 언어 사용으로 보통사람인 청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강연의 내용에서도 지식인의 냄새가 나지 않는 비근한 언어사용은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강연에서는 사투리 제목의 책을 예로 들며 친근하게 다가가기도 하고("혼자 살면 아무런 재미가 없습니다. '혼자 잘 살면 무슨 재민겨'라는 책도 있지 않아요") 누구나 아는 관용구를 이용해 뜻이 잘 이해되도록 배려했다.("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지요") 그의 책 <프리 윌>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사람은 '정'에 약하다. "그놈의 정 때문에"라거나 "정은 죽지도 않아" 같은 유행어도 한국에만 있는 말일 것이다."(책 117쪽)

그것은 전문적 지식인, 특히 아직도 어려운 용어를 밥먹듯이 쓰는 '법조계' 생활을 했던 사람에게 보기 쉽지 않은 모습이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현장의 땀냄새가 그대로 보이는 듯했다. 그렇다고 아주 대중적으로 쏠린 것도 아니다. 비근한 용어를 사용하되 던지는 메시지는 심오했다.

"공공장소에서도 유리문을 열고 들어갈 적에 뒤도 쳐다보지 않고 손을 놓아버리기 때문에 뒤에 오던 사람들이 문에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뒤에 오는 사람이 없는지 조금만 기다려주고 뒤에 있는 분은 '고맙습니다' 하고 감사를 표시하는 문화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강연 요지)

동양 유학의 기본 교재인 '대학(大學)'이라는 책에는 학문하는 사람이 본질적으로 취해야 할 자세를 설명해 놓았다. 즉, 지도자가 몸소 행동하고 마음으로 터득하고 남은 것들을 자신의 근본으로 삼고, 결코 백성들의 일상이나 상식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皆本之人君躬行心得之餘요 不待求之民生日用彛倫之外라<대학 서문>) 박원순 이사는 경전의 기본정신을 성실히 실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허황한 구호나 어려운 관념만을 되풀이하며 대중의 외면을 받은 진보 세력들에게는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는 대목이다.



2. 역지사지 - 서민의 처지를 깊이 고민하라

박원순 상임이사에 의하면 '아름다운가게'는 고물상이다. 고물상으로 100억을 벌 수 있을까 의아해할 수 있지만 왜 헌 물건을 소재로 삼았는가를 따져본다면 아름다운가게를 세울 적의 고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아름다운가게가 지향하는 나눔과 순환의 가치는 그런 근본적인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나눔과 순환의 실천을 위에서가 아니라 밑바닥에서부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쉬운 것부터 하자는 운동이 바로 아름다운가게의 탄생설화이다. (책 83~84쪽)

경향신문이 10월 8일부터 11월 29일까지 특집기획 <'사회적 기업'이 희망이다>에서 소개한 사회적 기업의 면면을 살펴보면 아름다운가게가 왜 고물상을 사업아이템으로 삼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경향신문의 기획에 따르면 영국에서 시작해 일본에까지 건너간 '빅이슈'는 노숙자들에게 잡지판매 대행권을 주고 자립할 수 있게 한 사회적 기업이다. 역시 영국의 ‘브롬리 바이 보 센터(BBBC, Bromley By Bow Center)'는 정원 관리와 목공 수업 등 5개 프로젝트를 통해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됐다. 프랑스의  ‘레소 플뤼(Reseau-plus)’는 노인들의 집을 직접 방문해 이동과 목욕, 식사를 돕고 말동무도 되어주는 돌보미 서비스이다. 스코틀랜드의 포스섹터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자는 목적에서 1990년 설립됐는데 주로 자수 서비스, 세탁소, 음식 배달, 비누가게 등을 사업체로 운영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이란 본질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업'이어야 한다. 세계의 유명한 사회적 기업들이 세탁이나 자수 등을 주요 업종으로 선택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프리윌>에서 글쓴이는 사회적 기업이 가져야 하는 자세를 친구들의 입을 빌려 분명히 설명했다.

"미국의 사회적기업인 루비콘 관계자는 '우리는 빵을 팔기 위해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하기 위해 빵을 팝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187쪽>

"사람들이 거리에서 굶어 죽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현실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경제 이론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강의실 안에서 보호받은 채 모든 해답을 다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게 오만한 일임을 깨달았죠. 나는 가난한 이들을 스승으로 삼겠다고 결심했습니다."<유누스 그라민 은행장의 말, 220쪽에 재인용>





<박원순 이사는 대중들과의 스킨십과 세심한 배려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강연이 끝나고 펜 사인회를 할 때는 직업을 물어보고 그에 맞는 문구를 고민해서 정성스레 기록하고 밝은 표정으로 책을 돌려주었다> 

 

3. 아름다운 정체성 - 모순을 피하지 말고 그대로 뚫고 가라

"아름다운 가게는 참 모호한 존재다. 매출과 효율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효율적인 순환구조를 만들기 위해 매출을 자꾸 이야기하게 되는데, 어떨 때는 ‘장사하러 여기 왔나?’ 하는 생각을 가질 때도 있다. NPO(비영리단체)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반대로 합리성과 효율성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강연회)

<프리윌>에는 박원순 이사가 '아름다운가게'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이 눈물겹게 묘사돼 있다. 그는 강연회에도 동일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그것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아름다운가게는 박원순 이사가 1991년 영국에 거주할 때 옥스팜이라는 헌 물건을 취급하는 가게의 시스템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아서 추후에 구체화한 사업이다. 역할 모델을 확고히 하기 위해 17박18일의 해외 벤치마킹을 다니며 구세군과 굿윌의 전국적이고 체계적인 조직망과 운영 시스템, 실무 노하우들을 서캐훑이하듯 메모해 왔다. 구세군 매뉴얼을 얻기 위해 벌였다던 일명 '007작전'은 책에도 강연에서도 모두 소개되었는데 구세군에서 매뉴얼을 협조하는 데 매우 조심스러웠기 때문에 각자 조금씩 본 것을 기억했다가 숙소에서 짜맞추는 식으로 신규가게를 열 때 필요한 한 달 전의 체크포인트, 일주일 전의 체크포인트, 3일 전의 체크포인트 이런 식으로 꼼꼼하게 점검사항을 챙기고 나서 아름다운가게를 시작했다.

박원순 이사에 의하면 사회적 기업의 성공 조건은 공익적 가치만을 가지고는 모자라며 기업적 가치만 가지고도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짜 공익적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일반 기업 못지 않는 치밀하고 철저한 영업 전략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기업의 논리만 받아들인다면 일반기업이 되기 때문에 '사회적 기업'으로서 정체성을 소중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프리윌>에서 그 사례를 세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특징적인 것을 몇 가지 소개하면, 일반 회사에서 재고품을 최소 가격으로 넘겨주겠다는 속칭 '땡처리' 제안이 왔을 때 이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한 적이 있었다. 결론은 '거부'였다. 이유는 물건을 싸게 사와 판매한다면 그것은 일반 장사꾼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어느 지점에 도난 사건이 빈번히 발생했다. 하지만 아름다운가게에서는 절대로 감시카메라를 설치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취지와 목적은 그에 걸맞는 아름다운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박원순 이사에게 직접 물었다. 아름다운가게라는 몸으로 따지면 우리나라의 허파와도 같은 소중한 존재이며, 사회적 기업의 자랑스러운 모델이지만 '나쁜 공기'가 너무 많아 허탈하다고. 삼성비자금 사건으로 불거진 재벌독재 문제나 노동자 탄압, 무리한 FTA 문제 처리 등 나쁜 공기가 너무 많다고. 박원순 이사는 마치 'BBK 특검 논란'에 대해서 사자후를 던지듯 대답했다. 그의 대답을 결론으로 삼아도 좋겠다.


"다양한 것이 아름답다. 우주를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려지는지는, 우주를 어떻게 그리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시민단체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재벌기업, 대기업의 문제가 있지만 그것을 지적하는 곳도 있다. 하지만 부정적인 부분만 고치려 하기보다 있었으면 하는 것을 만드는 것, 이른바 포지티브의 역할이 그래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미개척 영역을 자꾸 개척해야 한다. 우리나라 직업의 가짓수가 일본의 절반이라고 한다. 이 말은 뒤집으면 아직도 만들 직업이 대기업의 문제는 문제대로 고치고 포지티브한 부분을 자꾸 만들어가야 한다."(강연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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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과 열린사회
김용환 지음 / 철학과현실사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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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 관용열린사회 
저자 : 김용환 지음
출판 : 철학과현실사 | 1997.08 


나는 '관용하는' 사람(관용인)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관용에 대해서 심각한 질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사실상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질환이기 때문에, 질환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사람에 따라서 수년에서 수십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내가 서두부터 이렇게 비관적으로 운을 떼는 이유는 수천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몇몇 사람만이 '관용의 자격'을 스스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상적으로 자유로운 사람, 이를테면 장자나 이탁오 같은 사람들만 그 가치를 향유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단에 갇혀 살았다. 일례로 '사생활'이라는 말도 동양에서는 생소한 개념이다.
이것이 얼마나 생소한지를 설명하는 예화가 있다. 조선 시대의 '왕'은 사생활이 철저히 봉쇄당하는 불쌍한 존재였다. 심지어 간밤에 몇 번째 궁녀와 잤는지까지 기록될 정도였다. 우리에게 사(私)라는 것은 항상 공(公)과 상대되는 의미이며,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지식인들이 정신에 비해서 '육체'를 하찮은 것으로 평가절하한 현상과 일맥 상통한다.
이 글은 책에 대한 내용을 앵무새처럼 종알대기보다 내가 잘못 생각한 부분이 무엇이었는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1. 관용의 사전적 의미는 버려라

   
  관용03 (寬容)
「명」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 또는 그런 용서. ≒아용(阿容). ¶관용을 베풀다/이번 한 번만 관용을 베풀어 주시면 개과천선하여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국립국어원>
 
   


'관용'이라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매우 재미 없는 녀석이다. 대부분 '목적어'로 사용되며, 그 수법도 '관용을 베풀다'는 식의 뻔한 관용구만 즐겨 활용된다. 때문에 우리는 '관용을 베풀다'는 뻔한 표현보다도 '아량을 베풀다'는 보다 근사한 표현을 사용한다. '관용'은 '베풀다'에 갇힌 단어이다.
관용이 목적어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관용하다'라는 동사 역시 표제어에 등록돼 있다.

   
  관용-하다02
「동」【…을】 =>관용03. ¶상사는 때에 따라 부하의 잘못을 관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국립국어원>
 
   



하지만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뜻은 나오지도 않았고 위의 관용03을 찾아보라고 안내만 써 있다. 그리고 예시 역시 '관용을 베풀다'형으로 썼다. 글쓴이는 '관용'의 출발을 '우리 모두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하자고 하였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는 '국어사전'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 같다.
사전적 의미에서 확인한 것과 같이 우리나라에서 '관용'이라는 말은 권위주의의 가치를 담은 별 의미 없는 수사라고 할 수 있으며, 일종의 편견이다.
나의 사전에서 관용이라는 말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는 관용을 권위자의 행위로만 인식했다. 사실 관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권위자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다.

 

 

2. 조작된 공포감이 관용과 불관용 사이에 휴전선을 놓다.

 

관용은 사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것이다.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타협의 자세를 가지고 상대를 대등하게 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등한 관계라면 분명히 자신이 양보를 해야 할 지점이 생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기득권 중에서 공자의 아래와 같은 비판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공자가 말했다. 비루한 무리들과 어떻게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그들은 무엇을 얻거나 이루지 못하면 그것에 매달려 전전긍긍하며, 이미 얻었다고 해도 그것을 잃게 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구나. 만약 그들이 그것을 잃을까 노심초사한다면 세상에 못할 짓이 없을 것이다. <논어, 양화편>
子曰:  「鄙夫可與事君也與哉? 與, 其未得之也, 患得之; 旣得之, 患失之.苟患失之, 無所不至矣. 」
 
   

전쟁 이후로 우리는 불관용에 갇힌 상태가 되었다. 상실과 좌절, 패배, 틀림은 관용으로 가지 못할 정도로 공포감을 일으킨다. 이는 당연히 안정되지 못한 상태, 만족하지 못한 상태, 갈등이 증폭된 상태이다. 사실 이것은 기득권의 논리인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다 보니 왠만한 사람들은 앵무새처럼 읊고 다니며 진짜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이에 비해 관용은 자유의 상태, 대등한 상태, 안정된 상태, 합의된 상태, 갈등이 해소된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이 불관용과 관용의 거리이다.
이것은 비단 '집단'의 문제만이 아니라 '개인'의 차원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오직 인자만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다. <논어, 이인편>
子曰:  「唯仁者能好人, 能惡人. 」
 
   

관용은 개인에게 엄청난 용기를 요구하는 개념이다. 사람은 스스로에게 매우 관용적이기 마련인데, 스스로에게 철저히 불관용하는 것이 관용을 실천하는 첫 번째 계단이다. 특히 관용은 '관계'를 전제한 용어이기 때문에 개인이 관용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느냐에 따라서 사회의 성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사실 말하기는 쉽지만 스스로에게 불관용하기란 쉽지 않다. 나의 오류를 인정해야 하며, 나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1/2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궁극적인 반성을 이끌어내야 한다. 글쓴이는 이것이 어느 한쪽의 자세여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제1원리 : 내가 틀릴 수도 있고 당신이 옳을 수도 있다." 이 원리는 관용이 가능하기 위한 필요 조건이다. 나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한 타자의 의견이나 행위에 대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간섭이나 방해 같은 부정적 행위를 자발적으로 중지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원리는 상호 호혜적인 진술일 때만 의미가 있는 원리이다. 즉 이 진술 안에는 자기 부정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같이 틀릴 수 있다는 동시 반성의 고백이 함축되어 있어야만 한다. 나의 오류만을 인정하는 일방적인 진술일 경우 우리는 타자의 의견과 행위에 대해 관용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할 수 없으며 오히려 타자의 의견에 동의해야 할 의무만이 발생한다." <관용과 열린사회, 62~63쪽>  
   



3. 관용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관용이라는 미덕을 붙인다고 했을 때, 끼워지지 않고 자꾸 튀어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 이유는 관용을 학습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지만, 서구의 관용 문화나 발전된 합리적 사고 등을 예시하며 비판하거나 아쉬움을 나타내는 것은 어쩌면 불필요하거나 문제를 더욱 풀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놈팽이와 사랑에 빠진 아는 여자' 또는 그 반대 경우인 아는 남자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설명을 해주더라도, 이 모든 설명은 그가 '한번 대어 보는 것'만 못하다.

글쓴이는 서양에서 관용이 자리잡게 된 역사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했는데,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서구의 관용 문화는 피의 반성"이라는 것이다. 엄청난 피를 흘린 후에 그 반성으로 관용의 문화가 정착되기는 했지만 서양의 종교는 아직도 '이기적인 하느님'을 신봉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양이든 동양이든 '종교'가 불관용의 본산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하지만 '관용의 종교'라는 이례적인 사례도 있다.  특이하게도 인도의 철학에서는 '다른 신'을 인정하고 있다. 바가바드기타라는 책에는 "어떠한 신자가 신앙을 가지고 어떤 형태의 신을 예배하기를 원하더라도 나는 그의 신앙을 튼튼하게 해준다"(vii. 21)는 선언이 담겨 있다. 물론 이를 통해서 자신의 신앙이 완성도 있고 깊이가 있다는 것을 보이려 한 것이지만, 이런 관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동양의 문화를 기억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구호적으로 '관용' '관용' 하는 것이 관용에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될까? 차라리 관용이 없음으로 인해서 무자비한 인권유린을 당하고 피해를 보는 사례들을 수집해서 이 상황에 대한 개별 해법을 고민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글쓴이(김용환)가 주장하는 관용이란 한국 사회에서 선언적 의미에 머무른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고백했듯 철학자가 '관용'에 대해서 접근하기는 매우 취약한 구조다. 관용은 윤리적 문제라기보다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문제, 즉 일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해괴한 일들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불관용과 관용 사이에 간극을 좁히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다.

동시 반성의 고백이라는 말도 이상론에 머무를 가능성이 있다. 쌍방이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면 그 구조를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국방장관 회담, 장성급 회담, 총리급 회담 등이 자꾸 열리지만 협의가 쉽지 않은 까닭, 6자 회담이 매우 느린 속도로 진행되는 현재의 모습은 이를 충분히 증명한다. 만약 이 문제를 풀기를 원한다면 보다 실증적인 사례연구를 통해 성공의 사례와 실폐의 사례를 보여주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4. 관용을 '한다'는 것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관용'을 한다는 것은 수많은 도전에 직면한다는 것을 말한다. 수천년 동안 쌓여 있던 고정관념을 드러내야 하고 스스로는 궁극적인 반성을 통해 관용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나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 역시 '관용 주파수'가 호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어려운 까닭은 선교행위처럼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스스로 '반성'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떠나서, '관용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유롭다는 뜻이 아닐까? 세상의 온갖 너저분한 관습과 타성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켜, 몸과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관념의 먼지들을 털어내어 한껏 가벼운 상태가 아닐까? 나는 나 스스로의 자유를 위해서라도 '관용인'이 되고 싶다.

 

질문 :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관용을 실천하고 상대방의 관용을 이끌어낼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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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 속담에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가난이라는 문제는 해결되기 어려운 과제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제3세계의 기근 문제는 역사적으로 골이 깊은 문제이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식민지 정책의 상처와 세계 금융 자본의 폭력이 이를 매우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제3세계 기근의 문제를 매우 단순하게 생각해 왔다. 게으른 자들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고통이라거나, 적자생존의 사회에서 고통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는 남아도는 지역의 작물을 기근에 시달리는 곳에 융통하면 기근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얕은 희망을 품어 왔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예컨대 기근에 고통받는 아이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단순히 음식만을 제공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단식보다 복식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숙련된 전문의가 약해져 있는 소화기관에 영양주사를 통해 원기를 회복하고, 기본적인 신체기능이 서서히 다시 작동할 수 있도록 정확한 진단과 신중한 처방이 있어야 한다. (58쪽) 뿐만 아니라 내전에 의해 처참한 식량난을 겪는 주민들에게 공수기를 이용해서 식량을 살포하는 것은 오히려 불쌍한 난민들을 죽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식량 팩들이 들판 여기저기 무차별적으로 떨어지면 굶주린 여자들과 아이들이 그쪽으로 달려가다가 지뢰를 밟아 몸이 찢기곤 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지뢰가 가장 많이 묻혀 있는 내전 지역의 주민들에게 식량을 안전하게 제공하기 위해서는 군사적인 보안 등 커다란 비용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조치 없이 단순히 식량만 살포할 경우, 그 식량은 대체로 독재자와 테러리스트들의 배를 불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178~179쪽)

이 책은 저자인 아버지와 카림이라는 자식의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카림이 궁금한 문제에 대해서 질문하면 아버지가 상세하게 답변해주고,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 추가 질문을 하는 식으로 대화가 이루어진다. 때문에 ‘기근’이라는 매우 복잡한 문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기아의 문제를 ‘경제적 기아’와 ‘구조적 기아’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경제적 기아란 환경재난이나 내전 등 돌발적이고 급격한 정세변화로 인해 순식간에 엄청난 난민이 발생하며 생기는 문제인 반면, 구조적 기아는 그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구조로 인해 빚어지는 필연적 결과라고 한다. (48~49쪽) 대체로 가난한 나라는 부패를 먹고 자란다. 관료들은 자신의 배를 불리기에만 급급하고 때때로 세계 각국에서 들어오는 원조 역시 절실한 국민에게는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결국 구조적인 문제로 허약해진 제3세계의 체력이 경제적인 기아를 만났을 때 처참한 결과를 빚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이다. 저자는 기아문제가 발생하는 기원에서부터 그것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복잡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다국적 기업과 강대국들의 탐욕을 고발한다.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이나 부르키나파소의 상카라 대통령처럼 개혁에 나선 젊은 지도자들의 의지를 처참히 짓밟은 것은 강대국과 대자본이었다. 자급자족의 개혁은 자본의 침투를 방해하기 때문에 방해하는 세력을 없애는 것은 인간임을 포기한 자본노예의 모습일 뿐이다.

기근과 생명파괴의 문제를 이겨내는 방법은 결국 인도적인 구호조처를 더욱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과 내부적인 개혁을 이뤄내는 것이다. 세계 각국도 제3세계의 나라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지원하는 것이 기아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세계의 여론이 동원되어 강대국의 지도자들을 각성시켜야 하며, 인간이라는 근본적인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단체나 국가 간의 연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대안을 천명하고 있다. (167~169쪽)

가난은 그 나라의 숙명이 아니라 자본에 무자비하게 훼손된 인간 가치의 자화상이다. 제3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폭력과 기근의 참상이 엄존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애써 외면하거나 설익은 정당성으로 이 문제를 사소하게 바라본다면 우리는 암묵적으로 자본의 부당한 폭력행위에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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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2007-06-26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하는 게 아니라, '나라님'이어서 못하는(어쩌면 안하는) 것이란 사실을 이 책은 알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들은 그들의 부를 위해 세계의 가난을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들에게 가난은 극복의 대상이 아닌 부의 유지의 수단일 뿐이니까요. 분명 이 세계의 가난은 우리 '가난한' 자들의 연대로부터 해결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ㅎㅎ

승주나무 2007-06-27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세덱 님//가난을 먹고 사는 불쌍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으니까요~~그들이 가난을 한번 먹어보지 못한다면 죽을 때까지 그 생활을 계속 해야겠지요. 감사합니다.

Koni 2007-07-03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실을 아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불편한가를 깨닫게 만드는 책이에요. 그리하여 알량한 양심이 오히려 진실을 외면하게 만든다는 것을.

비로그인 2007-07-06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주나무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

아영엄마 2007-07-07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주나무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승주나무님이 이렇게 알찬 리뷰를 올려주셨으니 저는 책만 열심히 읽으면 될 것 같아요~. (앗.. 차력도장 필독서인 거 까먹을 뻔 했다..-.-)

마노아 2007-07-09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당선 축하해요~ 요새 승주나무님 서재에서 시사저널 관련된 글을 인상깊게 보고 있어요. (>_<)

승주나무 2007-07-10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냐오 님//이 세사에는 불편한 진실이 참 많은 거 같아요..
체셔고양이 님//리뷰 당선 소식을 이제야 봤네요.. 댓글도 보이지 않아서 이제야글을 남기네요. 감사합니다.
아영엄마 님//감사함니다. 리뷰보다 알찬 책이었어요.
마노아 님//시사저널 사태에 관심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홍보해 주세요^^;

승주나무 2007-09-09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알리샤님//좋게 보셨다니 저도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