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과의 첫 만남은 제주도 한라산이었다. 멀리서 사슴이 달아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자유롭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몰래 본 것은 아니고 텔레비전에서 보듯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라 감흥이 없었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몰래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제주대학교의 중앙도서관에 108 계단에서 사슴과 조우했다. 새벽에 갓 동이 틀 때 사슴 한마리가 사뿐사뿐 발을 옮기며 계단을 가로질렀다. 거기에는 사슴과 나뿐 없었다. 나에게 사슴이란 무척 예민한 동물이다. 잎사귀가 미세한 바람에 쓸리는 소리에도 사슴은 예민하게 반응해 잔뜩 경계를 했다. 나는 사슴을 오랫동안 보기 위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사슴은 나를 의식했지만,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알았는지 예의 사뿐한 발걸음을 보여주며 갈길을 계속 갔다. 하지만 일본의 사슴공원(나라 국립공원과 동대사 일대)에서 온통 사슴 세상이 펼쳐진 모습을 보고 사슴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뒤집혔다. 이 노회한 사슴의 무리들은 내가 150엔에 사슴과자를 샀다는 것을 귀신같이 눈치채고 나에게로 몰려들었다. 혹은 볕 좋은 데서 낮잠을 자고 있는 늙은 사슴은 내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가도 눈치채지 못한 듯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삐끼 사슴과 어르신 사슴사슴이 잔뜩 그려진 버스를 타고 사슴공원에 놀러 갔다. 왼쪽에도 사슴오른쪽에도 사슴이다.삐끼 사슴. 150엔짜리 사슴과자 하나 사면 안 잡아먹는다고 말하는 것 같다. 노회한 사슴들은 우리가 사슴과자를 샀다는 것을 알고 어슬렁 어슬렁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한 입 잽싸게 베어물었다. 녀석들은 절대로 과자를 떨어뜨리는 법이 없다. 어른신 사슴 한마리가 길 한켠에 누워 있다. 얼마나 곤하게 잠들었는지 얼굴 앞에 카메라를 갖다 대도 세상 모르게 잔다. 사슴과자를 푸짐히 먹은 모양이다. 아마 인간이었으면 큰대자로 누웠을 것 같았다. 사슴과 셀카 찍기사실 사슴들은 '사슴과자'만 아니면 사람들에게 별 관심이 없다. 가까이 가든 말든 사람들의 욕구만 채우면 되는 거다. 잡아먹힐 걱정도 없으니 그냥 무관심한 표정만 지어주면 된다. 사슴과 여러 차례 셀카 찍기를 시도해 보았는데, 사슴의 비협조로 잘 찍지는 못했다. 사슴공원 짬밥을 오래 먹었어도 사람과 셀카는 많이 안 찍어봤는지 되게 수줍어 했다. 사슴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사슴공원 테두리에 도랑이 놓여 있다. 사슴이 맛있게 물을 잡수시고 있다. 사진 찍는 것을 눈치챘는지 '뭘 째려보슈' 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주시한다. 테러범 사슴사슴의 테러 방법은 다양하다. 뿔로 받거나 뒷다리 공격하기. 하지만 이런 공격은 화가 무지 났을 때만 사용한다. 대개 사람은 다가가서 들이대거나 핥아주거나 하면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에 별 힘 들이지 않고 당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종이 같은 것을 사슴에게 보여주면 안 된다. 사슴과자를 먹으면서 훈련을 해온 사슴은 귀신같은 실력으로 종이를 덮썩 물고는 놓아주질 않는다. 사슴이 작업을 걸고 있다. 혀로 살색 부위를 살짝 핥아주는 것이다. 딴에는 사슴과자를 내놓으라는 모션인 듯하다.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머리를 들이대 부비적거리기도 한다. 부비적거리기 공격을 받으면 나도 부담스럽다. 테러범 사슴의 우두머리가 단체사진 찍는 현장을 덮치고 있다. 종이를 본 것이다. 이 사슴은 사슴과자를 하루종일 못 얻어먹고 화가 단단히 났음이 분명하다. 조카 학교숙제로 제출해야 하는 팜플렛을 한입에 뜯어버렸다. 겨우 반쪼가리만 건질 수 있었다. 조카도 몹시 봉변을 당한 듯하다. 애랬던 조카가~사슴에게 제대로 당한 듯하다. 사슴만 가까이 오면 마구 도망가고 있다. 장난감을 주며 달래도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도대체 어떤 테러를 당했길래. 좀더 비싼 장난감을 사준다고 약속한 후에야 울음을 멎게 할 수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사슴과 조카 간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