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편안한 죽음 - 엄마의 죽음에 대한 선택의 갈림길
시몬느 드 보부아르 지음, 성유보 옮김 / 청년정신 / 2015년 10월
평점 :
품절


`죽음`에 대한 이해나 수긍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여든 가까이 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본 보부아르는 죽음의 구체적 경험이 오히려 그것의 무자비한 폭력성을 더 부각시키는 것을 경험한다. 제목은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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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10-25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을 좀 비관적으로 봤군요. 보부아르는...
자연사가 흔한 건 아니지만 아주 없지는 않더라구요.
자연사가 아니어도 죽음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도 있잖아요.
예를들면 헬렌 니어링 같은.

blanca 2015-10-25 22:06   좋아요 0 | URL
저도 헬린 니어링과 스콧 니어링의 자연친화적인 삶과 죽음이 어떤 면에서 참 이상적인 소멸과 닮아 있다 싶었어요. 스스로 곡기를 끊고 삶을 자연스럽게 마감해 나간 스콧 니어링의 죽음... 죽음도 주체적으로 준비하고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 의지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게 참 부러웠어요. 나이가 들수록 어떻게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아진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노량진에서 재수하던 시절 종종 자그마한 문구점에 가서 펜을 고르곤 했다. 그다지 새로울 것도 즐거운 반전도 없는 생활에서 조금 더 또박또박 환기되는 내용들을 더 눈에 잘 띄게 적어놓는 일은 어쩌면 나의 생활의 본질적인 측면이었다. 당연히 여기에서 사용되는 도구들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한 문구류 이상이었다. 수험생활이 지나가고 이제는 시험 성적으로 나를 증명해야 하는 도전에서 해방된 지금이지만 그래도 난 여전히 문구덕후다. 수많은 색깔,다양한 굵기의 각양각생의 필기류, 노트 들은 언제나 나를 매혹하고 조금 더 산다는 일을 단순하고 균질하고 통제 가능한 것으로 윤색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준다. 사각사각 펜과 조응하는 사철식의 노트, 번지지도 않고 뭉개지지도 않으며 좀 허접하더라도 흘러가는 나의 언어들을 어느 순간 잡아서 보여주는 담담한 만년필 혹은 볼펜, 궁극의 그것들을 찾아 헤매는 여정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같다. 그러한 욕구들,소망들이 멈추면 이윽고 펼쳐질 황량함이 나는 때로 두렵다.

 

 

 

 

 

 

 

 

 

 

 

 

 

 

 

저자 소개는 좀 생뚱맞다. 런던 문구 클럽의 공동 창설자이자 '나는 지루한 것들을 좋아해'블로그 운영자란다. 소개 위에 좀 멍한 표정으로 측면이 찍힌 젊은 남자의 모습에서 과연 진지하고 깊이 있는 문구의 역사들이 연상되기란 쉽지 않지만 그러한 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 책은 대단히 진지하면서도 읽는 이들이 흥미를 잃지 않도록 적절한 무게추를 잘 잡고 있다. 물론 당연히 저자 역시 어린 시절부터 문구에 탐닉해 있었다. 영국의 소도시 서리주 우스터파크에서 자란 저자가 종종 방문하던  파울러스 문구점에서 먼지 덮인 회전식 문구류 정리함을 사서 그것을 채우는 것으로 우리는 클립의 발명, 만년필과 볼펜의 시대, '진정한 몰스킨은 이제 더는 없어요'라는 문구점 주인의 애도의 목소리, 스타인벡이 선호했던 블랙윙 연필, 오타에 시달리던 여비사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리퀴드 페이퍼(우리가 종종 화이트라고 부르는 그것)의 서사의 현장에 들어가게 된다. 학교에 입학한 후로부터 그렇게나 우리 주위를 떠나지 않던 그 물질적인 것들이 그 이상이 되는 지점에는 분명 이러한 그것들의 탄생과 발전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들의 부활이 있다. 대단히 정신적인 것들에 관한 이야기만 하며 삶의 본질적인 측면에 그러한 것들이 있다는 환각 뒤편에는 분명 이러한 물질적인 것들의 실재가 내재되어 있다. 어느 날 꾹꾹 몽당연필을 눌러쓰며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분명 이해해 보려 했던 시도 속에 갑자기 부러져 엄지 손가락 뿌리 왼편에 박혀 버린 연필심에는 16세기 초반 어느 폭풍우 치던 밤 영국의 컴벌랜드에서 갑자기 노출된 흑연의 광맥의 화석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었다. 지금도 그 연필심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아 언제나 나는 나의 손바닥을 펼치고 그 연필심을 볼 수 있다. 아마 할머니가 되어서도 이따금 그러할 것이다. 이미 죽어버린 시간의 층은 무심코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듯 나를 노려본다. 저자가 노란색 스타빌로 형광펜으로 그것을 만들어 낸 슈반호이저 공장의 이야기를 그어가며 느꼈던 희열과 닮아 있다.

 

"물리적인 것은 뭔가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한다."p.349

 

정말 진심으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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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5-10-25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날이 지난 뒤 연필을 오래도록 안 쥐다가
아이들하고 살며 새삼스레 연필을 다시 쥐다 보니
연필을 하나하나 모아서 책상맡에 잔뜩 올려놓고
이것저것 골라서 쓰는 재미가 쏠쏠해요.
연필을 다시 쓰니 볼펜을 다시 쓰기 어렵더군요 ..

blanca 2015-10-25 22:04   좋아요 1 | URL
저는 언젠가부터 연필을 안 쓰게 되었어요. 다시 연필로 사각사각 글을 쓰는 재미를 느껴보고 싶어요.
컴퓨터 자판에 익숙해지다보니 글씨가 영 미워졌더라고요. 연습해서 또박또박 잘 써보고 싶어집니다.^^

희선 2015-10-31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펜은 쓰기 편하면 한가지만 써요(볼펜은 볼펜심만 바꾸는 걸로 쓰고... 내 친구) 공책은 예전에는 두꺼웠는데 지금은 왜 그렇게 얇아졌는지... 전에 보이면 사두기도 했는데 요새는 잘 안 가는군요 펜은 종이에 따라 쓰기 좋기도 하고 안 좋기도 해요 어떤 종이에든 잘 써지는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 볼펜은 괜찮군요


희선

blanca 2015-11-01 12:50   좋아요 0 | URL
희선님처럼 저도 한 가지 펜에 정착해야 하는데...자꾸 이것저것 들쑤시게 됩니다. 결국 궁극의 펜과 노트를 만나야 해결될 일이 아닐런지 생각해 봅니다.^^
 

나는 이제 만으로 몇 년의 유예기간이 있긴 하지만(그 동안은 조금 그 안에서 머물고 싶지만), 엄연히 마흔이라는 숫자 앞에 다다르게 되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는 그렇지 않으니까 도리어 돋을새김처럼 보인다. 한 해 한 해 나는 조금씩 달라진다. 뒤로 가기도 하고 "절대!"라고 외쳤던 성역 따위는 오만이었다는 것도 배워간다. 어떤 이념이나 이상을 자신감 있게 외치고 그 안의 모든 항목들을 한 치도 틀리지 않게 사수할 수 없음에 때로 좌절한다. 말하여지는 것보다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진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려 하지만 그 막간에 때로 시선이 간다. 그리고 솔직히 나 자신한테는 더 많이 실망한다. 할 수 있는 것보다 해야만 하는 일들,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한 층 한 층 더 쌓이며 견고해짊을 때로 느낀다. 이러한 점에서 조로했다.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쳤지만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없다. 듣기를 좋아하지만 나는 브람스의 무엇을, 바흐의 어떤 음악을, 누가 연주할 때 가장 뭉클한 지 자신감 있게 얘기하지 못할 정도로 돌아서면 그 세세한 사항들을 다 잊어버린다. 오자와 세이지도 하루키가 이야기했기에 그렇구나, 했던 정도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빈국립오페라하우스 음악감독을 역임한 그는 영어가 서툰 일본인이었다는 한계를 성실성과 재능으로 극복한 노장 지휘자다. 노년에 이르러 암투병의 좌초에 걸리기는 했지만 쉬엄쉬엄 그 난관을 잘 이겨나가며 후계자 양성에도 힘을 쏟고 나날이 조금씩 더 발전하고 있다고 한다. 하루키는 <언더그라운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진지하고 겸허한 인터뷰어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한다.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진지함과 예리함의 폭이 넓고 깊어 오자와 세이지와의 이야기가 더없이 부드럽게 흘러간다. 스스로를 지칭한 '문외한'이라는 말은 이러한 지점에서 쓰일 단어는 아닌 듯하다. 주로 하루키의 집에서 실제 화제에 오른 음악을 틀어 놓고 들으며 음악가와 작가가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는 사실 대단한 것들이 아닌데도 하루키 자신의 이야기처럼 "듣는 사람을 흠칫하게 하는 절실함이, 반짝이는 빛처럼 아무렇지 않게 흩뿌려져 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3번, 오자와 세이지의 부지휘자 시절의 레너드 번스타인과의 일화들, 구스타프 말러 등 시간대, 음악, 사람이 구심점이 되어 이야기가 오고가지만 한결 같은 오자와 세이지의 담담하고 차분한 이야기와  하루키의 상대적으로 더 젊고 호기심이 많아 예리하게 과거의 추억을 환기하는 역할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특히나  롤이라는 스위스의 소도시에서 오자와 세이지가 신진 음악가들을 대상으로 주관한 세미나의 풍경을 그린 대목은 하루키의 짦은 이야기처럼 그의 언어와 관찰력이 조응하며 간결하고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는다. 젊고 다듬어지지 않은 현악기 연주자들의 오케스트라 연습 참관 대목은 기회만 된다면 나도 그러한 기회를 얻고 싶을 만큼 찬란하다. '좋은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동행한 작가는 아직도 많은 것들을 배우고, 그 과정을 이끌고 가는 노장은 나날이 그 되어가는 과정에 동행하며 '거친 어제'들이 쌓여 빛나는 내일을 기대할 수 있음을 체현한다. 어느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늙어가는 모습과그것을 언어화할 수 있는 자리에 동행하게 되는 작가의 시간들도 참으로 부러웠다. 그 둘에게는 '나이듦'이 쇠락이 아니라 어떤 되어가는 과정의 시간의 누적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몇 년 전 초등학교 4학년 때 무책임하게 징징대며 그만 둔 피아노를 다시 시작했었다.(지금은 아쉽게도 잠시 그만둔 상태) 그만둔 지점에서 한참이라 다시 뒤로 물러나 시작했지만 다시 그 지점 근처나마 비교적 짧은 시간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나 치기 싫었던 피아노가 이제는 길어진 손가락과 공명하여 나오는 음들을 하나 하나 들을 때마다 왠지 뭉클했다. 작은 몸짓, 페달에 닿지도 않았던 발들, 암보라는 게 대체 뭔지도 모르는 채 그냥 기계적으로 눌러댔던 음계들이 레가토로 들려주는 음악은 시간의 낙차를 가로질러 과거의 어린 마음을 생생하게 불러왔다. 왠지 눈물이 자꾸 났다. 그때 다 완성시키지 못한 음악들을 이제 다시 한번 시도해 보고 싶다. 한정없이 내 앞에 그득 쌓였을 것만 같은 시간들이 한정되어 있다는 깨달음은 지금 여기에서 흩어져 사라져 가는 그 선율들을 더욱 농밀하게 한다. 어떤 분야에서도 일가를 이루지 못했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이러한 나이 든 사람들의 이야기는 때로 아직도 시작할 수 있음을 상기한다.

 

 

 

 

 

 

 

 

 

 

 

 

 

 

노인이 될 준비를 하는 사람은 솔직히 낯설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잘 늙어가는 이들은 그러했다. 60대가 되어 가까스로 첼로다운 음을 내게 된 그녀는 50대에 제대로 그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마흔세 살에 발레를 시작한 사람은 쉰 살이 넘어서 복근을 가지게 됐다. 다들 느지막하게 시작한 것들도 꾸준히 계속하니 취미와 관심사를 넘어서는 지점을 통과하고 삶이 풍요로워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스스럼없이 나이듦을, 노화를 이야기하고 심지어 더 나이들었을 때의 삶을 준비하는 그녀들의 모습이 노화, 노인, 죽음이라는 화제 앞에서 머뭇대는 모습에 익숙해져 있던 지금 여기에서의 풍조를 돌아보게 했다. 힘이 빠져 더이상 지금 여기 같은 삶을 누릴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가감없이 한다. 젊음과 보여지는 아름다움과 에너지만을 찬양하는 풍조에서 사실 필멸의 존재의 실재는 설 곳이 없다. 외면하고 구태여 주목하고 싶어하지 않는 모습들에 사실은 '진짜'가 있을 수도 있는데... 분명 쉽지 않겠지만 또 확실히 통과해야 하는 지점이다. 피할 수가 없다. 아직은 많은 의무와 책임감이 난무하는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나로서는 시간의 흐름이 홀가분함을 통과할 때 어떤 느낌일 지가 궁금하고 기대된다. 조금 정갈해 질런지, 정돈된 모습일지 등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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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0-16 16: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는 시점부터 피아노에 대한 관심이 점점 멀어졌어요. 피아노를 다시 한 번 연주하고 싶은 마음이 여러 번 든 적이 있는데, 나이가 들수록 예전의 여유를 가질 형편이 되지 않네요. 그래도 피아노 연주의 꿈은 잊지 않았어요. 초등학생 시절에 썼던 피아노 교본을 버리지 않고 집에 보관하고 있는데, 피아노에 다시 흥미를 가질 날이 찾아 올 거라고 믿습니다. ^^

blanca 2015-10-17 10:03   좋아요 0 | URL
오, 사이러스님 비교적 오래 배우신 편이네요. 게다가 교본까지 보관하고 있다니 언제든 다시 시작하시면 두 달 정도면 손가락이 풀리면서 그만 둔 지점 근처로 접근하더라고요. 그럼요, 꼭 그러한 시간, 기회가 다시금 오더라고요.

기억의집 2015-10-16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아들도 초등 5학년까지 치다가 갑자기 작년 (중3)에 피아노 치기 시작했어요. 피아노 학원도 다시 다니고... 아들애가 이루마의 인디고나 라스트 카니발 칠 때 멋있더라구요. 전 피아노가 여자 악기라고 생각했는데 울 아들이 치는 거 보니 피아노를 남자가 치면 힘이 들어가 멋지더라구요.... 저의 아들은 일주일에 한번 가는데, 블랑카님도 일주일에 한번 어떠세요. 그러면 중단 되진 않더라구요.

나이 드니 저는 손으로 뭔가 하고 싶어 목공 배워요!!!! 목공 작업실 갖고 싶기는 한데, 소음이 만만치 않아 집에선 하기 힘드네요~

blanca 2015-10-17 10:05   좋아요 0 | URL
기억의집님, 근래들어 유튜브에서 피아노 동영상 찾아보면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에 남자 비율이 높던걸요. 참, 근사해요. 아무래도 타건에 힘이 요구되는 대목에 좀 유리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우아, 벌써 고등학생이군요! 이렇게 취미로 다시 피아노를 칠 정도면 사춘기도 잘 이겨나갔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흑, 저희 기저귀 찬 아들은 언제쯤 그런 날이 올까요?^^

파란놀 2015-10-17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저녁으로
하루 십 분이나 이십 분쯤
피아노를 쳐 보시면...
살아가는 기쁨을 새롭게 누리시리라 생각해요 ^^

저는 우리 집 아이들이 피아노 치는 소리를 들으며
온몸이 새롭게 깨어나는 느낌이 들어 늘 즐겁습니다

blanca 2015-10-17 10:06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숲노래님 아이들이 피아노 치는 소리, 상상만으로도 참 흐뭇해지네요. 저는 아직 피아노를 칠 여유는 안 나는데 내년쯤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중이랍니다.^^

희선 2015-10-20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째 책은 어제 잠깐 들은 라디오 방송에서 소개한 책이군요 홀가분하게 살기, 말은 쉬워도 실천하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키는 재즈뿐 아니라 클래식도 잘 아는군요 음악을 다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네요좋아하는 것만 듣는 사람이 더 많기도 한데... 하루키는 여러가지에 관심을 갖고 들은 거군요 그래서 많이 알게 되었겠네요 나이를 먹고도 무언가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게 더 좋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희선

blanca 2015-10-20 17:12   좋아요 0 | URL
아, 라디오에서 들으셨군요. 맞아요,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기보나는 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는 게 더 삶의 의욕과 관련된 것일 테니까요...
 

김훈처럼 대파의 흰 속대 부분을 세로로 길게 갈라 하여튼 무진장 넣었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계란을 잘 풀어서 넣고 불을 내리고 뚜껑을 덮어버렸다. 이윽고 탱글탱글한 면발을 들이키며 그가 이야기한 라면 레시피 대목을 다시 한번 읽어봤다. 아아, 이건 너무 맛있잖아. 역시 그 어떤 분야보다 나날이 먹을 것을 만드는 일에는 다양한 의견 참조가 필요하다. 여기가 다일 것 같아도 막상 또 나아갈 곳이 있다는 발견은 참 즐거운 일이다. 단순하고 또 단순한 나를 먹이는 일 앞에서 모든 사는 일은 하나로 만져지는 것도 같고 그리 멀리 있는 것 같지 않다. 김훈이 되뇌었던 삶의 구체성은 바로 이러한 대목에 집중되는 것같다.

 

 

 

 

 

 

 

 

 

 

 

 

 

 

 

삼십 대 후반 언저리의 엄마와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작은 이모가 나란히 찍은 사진 속에는 삶의 신산함이 서려 있다. 한때는 고왔을 두 여인은 너무 조로했다. 통통하던 볼살은 내렸고 기미는 흩어져 있다. 그래도 둘은 나란히 무언가를 내려다 보고 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제 영원히 엄마와 이모가 사수해야 할 것 같은 나이의 지대를 넘어가고 있다. 그 만큼 크지도 늙지도 않았을 것 같은 느낌, 미성숙함과도 닿아 있다. 나날이 쌓여 나는 정말 아줌마가 되어 가고 영원히 울어댈 것 같았던 아기에게는 어엿한 소녀티가 나기 시작했고 없었던 존재가 우뚝 내 옆에서 걸어다니고 있다. 시간이란 도저히 말로 담아낼 수 없을 것 같은 그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몰고 나타나기도 하고 영원할 것 같았던 것들을 모조리 쓸어담아 독불장군처럼 저만치 달아나기도 한다. 참, 냉정하고 기대 이상이고 기대 이하이다.

 

이 무사한 하루하루가 흘러 결국은 저 차가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더라도, 그 시간 속에서 핏덩이는 자라서 여자로 변한다. 그 아이는 내가 기른 아이가 아니라, 저절로 자란 아이였다. 무사한 날들의 이 한없는 시간들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 아이를 여자로 길러줄 것인가.-p.140 

 

시월이 가면 항상 나는 늙는다. 김훈이 언어화했던 이 이야기는 차마 내가 집약해서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바로 이러한 사소해 보이지만 정곡을 찌르는 그 시간의 일상적인 흐름이 이루어 놓는 것들에 때로 화들짝 놀라고 때로 감동하고 때로 서글퍼진다. 어렸을 때는 시간이 흘러 당도하는 곳에는 편안함과 안도가 있었는데 이제는 결국 그것이 죽음으로 간다는 것을 실감하기에 마음이 무겁다. 이 모든 일상의 사소한 일들도 결국은 언감생심이 된다는 것,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도 결국은 그러한 수순을 밟고 세상과 작별한다는 것을 의식하다 보면 모든 게 너무나 무의미하고 허무하게 느껴진다. 단단하게 버티는 사물들이 때로는 부럽기도 하고 그 앞에 선 살아 있는 것들이 애잔하기도 하다.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중

 

정말 그럴까. 아직 마음으로 수긍하기엔 조금 이르다. 조금 더 살아보면 그래, 사라짊은 숙명이고 그것은 아름다운 섭리라고 고개 끄덕일 날이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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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5-10-10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을 채비를 하고 있어요.
흰 속대 부분을 잔뜩 넣은 대파 칼칼하겠죠?
김훈은 참 예리하고 혀를 찌르는, 그럼에도 따뜻한 사람일듯 해요. 글처럼요^^

blanca 2015-10-10 20:17   좋아요 0 | URL
글에서 의외로 참 솔직하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정리된, 정제된 어휘가 참 정갈하니 좋아요. 이제 시작하셨는 지 궁금합니다. ^^

yureka01 2015-10-11 0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습니다. 뭐랄까요..참 담담하구나 싶었어요.
김훈의 산문이 특별히 시처럼 세련된 것이 아닌 거 같음에도
뭔가 상당한 끌림의 진솔감이랄까요. 역시 대가는 왜 대가 인가 싶더군요.....


blanca 2015-10-12 15:36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yureka01님. 김훈 문장은 정말 색깔이 뚜렷해서 되뇌어 읽게 되곤 합니다. 아무래도 기자 시절 단련된 사실에 입각한 간결함이 쉬이 물러나지 않는 것 같아요.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잘 포착하는 작가 중 하나가 아닌가 싶어요.

프레이야 2015-11-22 0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페이퍼 당선, 축하 드려요.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늘 좋은 글이지만요.^^
김훈의 라면과 대파 이야기는 그의 소설 `공무도하`에도 잘 묘사되어 있어요.
여자와 남자가 주고 받는 대사 속에서요. 읽어보셨을 것 같네요.
그 남자도 기자에요. 대파의 푸른색 부부은 넣지 말라고 해요, 여자가.
흰 부분에 대해.. 갑자기 생각이 나요.
그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슬퍼할 것도 없는 날이 올 거라 믿어요.
그저 소멸이 존재증명이고 아름다움일 날이... 그렇게 느껴질 날이.
좋은 뜻으로요^^

blanca 2015-11-22 15:22   좋아요 0 | URL
아, 공무도하에 그런 구절이 있었어요?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저도 유달리 대파의 흰대가 참 좋더라고요. 달고 써는 질감도 좋고... 방금도 숭덩숭덩 썰어 국에 한껏 넣었어요^^ 늙고 죽는 과정은...음, 저는 아직도 많이 두렵지만 때로 그냥저냥 앞선 사람들처럼 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혼란스럽고 너무 어려운 삶의 마지막 과제인 듯해요. 사실 어렵고 두렵다 해도 피할 수 없으니까요...
 
암 : 만병의 황제의 역사
싯다르타 무케르지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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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의 정중앙에는 자그마한 붉은 게가 상대적으로 커다란 '암'이라는 불길한 제목 아래 있다. 고대 그리스의 게를 뜻하는'카르키노스'는 암의 어원이 되었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하여 다시 그것을 둘러싼 역사를 풀어내려 한다. 이것은 '암'의 전기를 표방하고 있는 책이다. 마치 암은 살아 숨쉬는 존재가 되어 연대기를 엮어 나갈 힘을 얻은 듯하다. 그래야 이 엄혹하고 처절한 '암'과 인간의 쫓고 쫓기는 싸움의 이야기는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질병은 삶의 어두운 쪽, 더 성가신 시민권"이라는 수전 손택의 이야기는 그녀 자신이 몇 번이나 실제 획득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 어두운 자의 왕국에서 두 번이나 건강한 자의 왕국으로 넘어왔다 끝내 그곳에 다시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그것은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이야기이다. 싯다르타 무케르지의 이 책은 거기에서 바로 시작한다. 우리들 중 누구도 죽을 때까지 건강한 자들의 왕국에서 살 수는 없다. 죽어야 한다면 우리 자신의 성장과 노화에서 비롯된 그 필연적인 결과인 '암'과 조우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

 

저자 자신이 바로 종양학자이자 실제 환자를 보는 의사다. 어느 날 세 아이의 엄마 칼라가 그 앞에 백혈병과의 사투를 예고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싯다르타는 암과의 싸움이 실제 이 혈액암에서 커다란 조언을 구하였음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 2004년의 칼라의 병은 1940년대 정력적인 병리학자이자 임상의인 시드니 파버가 백혈병 아이들을 구할 중요한 전환점의 중심에 있었던 정경을 떠올리게 했다. 그것이 글리벡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머나먼 여정을 돌아와야 했지만 여하튼 우리에게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과거의 통로에서 이 에너지 넘치는 학자의 부활은 숱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분명 긍정적인 미래(이미 우리가 소유한 현재)를 예고하는 지점에서 빛난다. 이것은 정말 이야기다. 무기력하게 죽어가던 아이들을 부활시키는 그 힘으로 향해 절둑이며 걸어가다 심지어 그 자신도 암과 대치해야 했던 사람의 이야기로부터 그리고 그 사람과 아이들과의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잊혀지고 기억되고 기념된 이야기들이 흘러가는 경로에 바로 '암'에 대한 불가사의한 이야기가 그 불가해한 성격이 드러난다.

 

암의 연대기는 비교적 우리가 숱하게 넘어지기는 했어도 적어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긍정적인 믿음을 가능케 했던 백혈병을 중심으로 서술되지만 그것이 그 전부를 포괄할 수 없다는 절망이기도 했다. 기원전 2625년경의 파피루스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그것은 이윽고 수술로 전부를 도려내는 급진적인 수술법 앞에서도 엑스레이, 보조화학요법, 표적치료 앞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 내고 부활하고 전이했다. 시드니 파버가 메리 래스커라는 정치적으로 기민하고 탁월한 로비 능력을 가진 매력적인 여성과 연합하여 미국 정부를 암과의 투쟁의 전면에 나서게 한 시간들이 블랙홀로 모두 빨려 들어갔다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너무 냉정하고 아직 우리가 암을 모른다는 것을 중언부언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암은 투자한 노력, 시간, 열정, 좌절된 숱한 시도들의 총합 만큼 파악되고 정복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암'의 생존 방식은 우리의 그것과 너무 닮아 있고 철저히 우리에서 출발하여 우리에게 기대어 있기 때문이다.

 

암은 우리의 성장에 내재한 결함이다. 이 결함은 우리 자신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생리작용에서 성장-노화, 재생, 치유, 번식-에 의존하는 과정들을 제거할 수 있어야만, 자기 자신에게서 암을 제거할 수 있다.

-p.510

 

그래도 적어도 암의 본질에 대한 천착은 그 깊이와 넓이가 분명 확장되고 있다. 암 유전자가 사람의 유전체에 있고 그것이 촉발되는 것도 제어되지 않는 것도 이미 저마다의 유전적 특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발견은 모든 암 유전체의 지도를 작성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 유전체 지도가 암의 정복과 동의어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이 과정에서 제어장치가 제거되고 미친듯이 폭주하는 암세포의 성장과 전이의 경로를 효과적으로 방해할 방법에 대한 긴요한 힌트가 주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암세포로의 회귀는 결국 의학이 과학과 다시 친밀하게 소통하고 융합함으로써 반목하고 대치할 때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그것을 다룰 수 있음을 시사한다.

 

암의 성질과 역사,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좁은 골방 같은 연구실에서 때로는 동료들에게 철저히 배제되고 소외되어  외롭게 그것과 싸우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좌절을 밥먹듯이 했던 의사,과학자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삶들의 총집합이다. 자신에게 닥친 이 암초 앞에서 저마다의 방법으로 자신의 병을 인정하고 알아가고 때로 의사들에게 치료에 시사점을 주었던 환자들의 이야기 또한 그러하다. 싯다르타는 그 자신의 이름처럼 해탈한 지점을 넘어선 관조 대신 "그러나 삼켜지지 않기란 불가능했다."고 고백한다. 아이 셋, 백혈병 앞에서 창백했던 엄마는 부활한다. 그러나 긍정적이고 대차게 희귀한 암에 대처하며 자신의 여명을 오년 가까이 확장했던 저메인은 두번 째 암의 공격 앞에서 패배하고 만다. 싯다르타는 그녀의 끝까지 무기력하게 암 앞에서 지지 않기 위하여 분투했던 모습에서 암과의 투쟁의 본질적인 면을 깨닫는다. 그것은 "이 질병을 따라잡으려면 , 계속 전략을 창안하고 재창안하고 , 배우고 다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암의 전기는 우리 인간의 그 끈질긴 재생력의 은유에서 출발하여 다시 그 지점으로 돌아온다. 싯다르타 자신도 이것은 그 '무엇'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누구'에 대한 이야기 같았다고 이야기했다. 모두 절망했던 세기를 뚫고 나왔던 의사의 이야기로부터 끝내 패배해야 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패배를 당당하게 거부했던 환자의 이야기로 끝맺는 '암'의 이야기는 아직 그 전기가 완성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그 결말은 열려 있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질병을 은유로 변질시키는 것을 경계했던 수전 손택의 질병의 왕국 이야기의 인용으로부터 시작했던 이야기는 그럼에도 우리 몸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면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는 이 이야기를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삶과 결코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만다.

 

어느 날 평온한 일상을, 그 크지 않았던 기대들을, 약속들을 모조리 무참히 짓밟고 마는 암선고를 받은 가족, 친척, 친구. 희망과 절망을 오고가다 미처 체념을 다 끌어안지도 못한 채 이제는 번복할 수 없는 곳으로 급작스러운 배신처럼 떠나 버리고 마는 그 아팠던 결말. 인간의 생로병사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그 오류들이 존재의 결말이라고 해도 적어도 이러한 무력한 이야기들의 무한반복의 궤도에서는 걸어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영생을 꿈꾸어서도 무한 존재를 긍정해서도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바랐던 그 숱한 내일들이 예상하지 못한 틈새로 무참히 짓밟히는 그 통절한 절망 앞에서 삶과 존재 자체의 의미를 포기하게 되는 제왕의 권력을 그것에 주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희망의 이야기도 과학의 승리에 대한 면류관도 아니기에 그 마침표는 더욱 씁쓸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든 어제보다는 더 알아가고 있다는 그래서 포기하지 말자,는 다짐이기도 하기에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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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6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06 1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06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5-10-06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있었네요.
누구든 언젠가 이런 책 한번쯤 읽어 둬야할 것 같아요.
예전엔 암이 특별한 사람한테만 걸리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너무나 흔한 병이 되어버렸어요.
지금은 예전보다 보장도 잘되있고, 예후도 좋고 생존률도 높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암에 걸리지 않은 것이
언젠가 나도 걸리겠지 하는 생각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 같아요.
생존률만 높아졌다 뿐이지 낫기까지의 과정은 여전히 환자들에겐
힘든 과정인 것 같아요.ㅠ

blanca 2015-10-06 13:30   좋아요 0 | URL
아, 스텔라님, 저도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암은 특히나 특별한 병이 아니라 누구나 부딪힐 수 있는 병이더라고요. 그 전 단계에서 계속 관찰해야 되는 경우도 많고요. 이 책을 읽고 나니 더 인간의 몸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이 더 불가사의하게 느껴져요. 제발 힘든 과정이 어떻게든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되었으면 좋겠어요.

희선 2015-10-14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암 잘 낫는다고 해도 여전히 그걸로 죽는 사람이 많군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니... 그랬겠죠 지금은 사람이 오래 살아서 암에 걸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누구나 걸릴 수 있는 거군요 그 생각을 하면 어쩐지 무섭기도 하네요 무서워하기보다 알아야 할지도 모를 텐데...


희선

blanca 2015-10-14 14:03   좋아요 0 | URL
아직 알아가는 단계인 듯해요. 정작 알았다고 해도 이제 또 그것과 어떻게 싸워야 할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는 숙제가 또 있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영혼뿐 아니라 인간의 육체도 알면 알수록 신비롭고 어려운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