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다. 모든 인간에게는 타인에게 차마 드러내기 힘든 심연이 있다.
모든 인간은 복합적이다. 대외적으로 인권을 존중하자며 정의를 부르짖으며 자기 부하 직원에게는 갑질을 일삼는 사람이 있고 세상 없는 독실한 종교인이 아이들을 성적으로 유린하는 경우도 있다. 어릴 때는 사람을 단면적으로 파악하고 받아들였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는 이분법이었다. 내가 지지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무결한 사람이어야 했고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미덕이 결여되어 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살면 살수록 인체의 신비 만큼 인간의 미스터리함을 느낀다. 어제 미덕을 행했던 사람이 그 날 밤에 약자를 폭행하는 스토리가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누군가를 칭송하거나 맹목적으로 비판하는 것에 동조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 나는 욕망 앞에 선 인간을 믿지 않는다.
나이가 많아지면 이렇게 믿지 않는 것이 많아진다. 두려운 것도 많아진다. 사회적 연계가 강화되며 자기가 아닌 주변인의 이권과 안전에 좋든 싫든 개입하게 되며 때로 비겁해진다. 그래서 N번방 사건이 나왔을 때, 그것을 수면으로 노출시긴 최초 제보자이자 취재 기자가 20대 중반의 대학생 둘이라는 데에 놀라운 한편 수긍이 갔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성별을 몰랐을 때 바로 남학생으로 가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런 용감한, 이런 대단한 일을 한 주체로 자동반사적으로 나는 왜곡된 성편견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사회적 학습은 놀라운 것이다. 무언가를 용감하게 고발하는 주체로 자동적으로 우리는 남성을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는 여대생 두 명인 익명의 '추적단 불꽃'이었다. 2019년 7월 기자를 꿈꾸는 대학생이었던 불과 단은 '탐사 심층 르포 취재물' 공모전을 준비하며 구글링을 하다 우연히 '와치맨'이 운영하는 구글 블로그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텔레그램 '번호방' 링크를 타고 아동, 청소년 성착취물 공유 단체 채팅방인 'N번방' 잠입취재로 이어지게 된다. 텔레그램은 독일에 서버가 있는 모바일 메신저이다. 자기 신원을 노출하지 않으며 각종 불법촬영물을 공유하고 범죄를 공모하는 터전으로 악용될 소지가 다분한 곳이다.
N번방은 언론으로 크게 보도되었지만 이것이 막연히 사이버 성범죄라고만 추측할 뿐 정작 여기에서 이루어진 범죄가 실생활과 어떻게 연결된 것인지 이 범죄의 핵심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도는 높지 않다. 이곳의 핵심은 성범죄 대상이 자기 결정권이나 자기 보호가 제대로 되지 않는 어린이, 청소년이라는 점이다. 그들을 성적으로 유린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파괴한 각종 불법촬영물을 미끼로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협박하고 조롱하였으며 심지어 주변의 지인들을 능욕하는 각종 불법촬영 영상물을 올리고 그들을 대상으로 범죄를 모의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이 촬영물을 각종 가상화폐로 거래하며 그 채팅방에 들어와 있는 유료회원들을 상대로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
이것을 제작하고 유통시킨 범죄자들 뿐 아니라 문제는 이 대화방에 들어와 있던 팔천 명이 넘던 회원들이다. 그들은 이 촬영물을 감상하고 지인을 능욕하고 각종 사회 일탈적인 발언을 주고받는 방에 들어와 있었다. 그들에 대한 색출과 처벌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불과 단의 평범하게 생각했던 선량해 보이는 지인도 들어와 있었다고 한다. 이십 대 중반에 믿었던 주변인들의 괴물 같은 심연을 들여다본 불과 단이 심리적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다. 우리는 N번방에 집중하느라 그것을 세상에 터뜨린 이 두 여학생이 겪었을 트라우마와 신변에 대한 걱정은 정작 돌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는 그 둘이 그것을 취재하는 과정뿐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맞닥뜨린 각종 성추행과 성편견에 따른 차별적 발언 등으로 갖게 된 상처와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나보다도 훨씬 어린 여대생들의 성장 과정 및 대학교, 취업시장에서 겪게 된 일들이 어쩌면 그렇게 한 치의 진보도 없이 똑 닮았나 의구심이 들 정도로 세상에서 어린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어렵고 부당한 일들을 끊임없이 감내해야 하는 일이구나 싶었다. 그것에 반기를 들면 나는 예민하고 성마른 여자가 되고 넘어가면 무던하고 적응력 좋은 사회인이 되는 것이라는 구도가 염증스럽다.
N번방을 발본색원한다고 해서 음지에서 자라나는 거대 욕망의 뒤틀린 재현이 사라질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은 선악 구도를 뛰어넘어 한계를 모르고 타락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행태가 사소한 것이라 여기는 순간 이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다. 누구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축소 환원되어 유린될 수 있고 그것은 자본주의 화폐로 거래되며 이권 사업으로 커갈 것이다. 자기 몸을 지키는 거부 의사를 표명하기 어려운 취약 입지에 있는 아이들, 약자들이 가장 먼저 범죄의 타겟이 될 것이고 이것은 끊임없이 은폐될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처럼 여전히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려 할 때 우리는 그 카르텔의 침묵의 주변인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상시 감시체계가 작동하고 언론과 우리 모두가 주시해야 하는 지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비단 성범죄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반응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욕망의 어긋남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짓밟는 폭력의 지대에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지 않는가? 인간이 인간을 욕망의 대상으로 물화할 때 벌어지는 참혹한 일들은 마땅히 엄벌로 다스려야 하는 범죄다.
불과 단은 아직 세상을 믿는다. 그들의 믿음에 배신하지 않는 응답이 오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