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 들어갈 때는 --;; 어떤 활자라도 읽어 주어야 한다. 그러니 읽을 책이 떨어졌을 때 느끼는 초조감은 말도 못한다.

인지기능과 생리기능의 반사적 연합이라고나 할까 ㅋㅋ 요새 사람들은 하도 스마트폰을 가지고 들어가서 그 오염도가 말도 못한다고 뉴스에서 나오기는 했다. 어느 날 책은 똑 떨어지고 할 수 없이 대형서점에서 매달 발행하는 무가지를 들고 들어갔다 이 책을 만났다.

 

 

나는 프랑스에 가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불어를 배우면서 하도 고생을 해서 솔직히 프랑스에 대한 큰 호감은 없다. 그러나 기회가 된다면 이 서점에는 찾아가 보고 싶다. 미국인인 저자 실비아 비치는 파리에 1919년 11월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라는 서점을 개업한다. 벽에는 시인들의 사진, 그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걸고 그 안은 모두 골동품, 파리의 영어책 전문 헌책방에서 사모은 책들로 채웠다. 실비아는 프랑스 작가를 미국에 소개하고 영어권 작가를 프랑스에 소개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서점은 초창기 비싼 책가격 때문에 주로 도서 대여점의 구실을 하게 되며 유명 작가들의 아지트가 된다. 앙드레 지드, 제임스 조이스도 회원이었다. 특히나 조이스는 반납에 불성실했다고 한다.  1920년 여름 실비아와 제임스 조이스의 첫만남은 그녀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 놓는다. 이 아일랜드 출신의 경제관념 없는 괴짜 작가에 대한 회고는 참으로 흥미롭다

 

 

조이스로 말하자면, 그는 항상 남들을 자기와 동등하게 대우했다. 상대방이 작가건, 어린애건, 웨이터건, 귀부인이건, 파출부건 간에 말이다. 그는 누구를 만나건 상대방이 하는 말에 흥미를 표했다. 자기는 어떤 사람을 만나서 한 번도 지루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가끔은 서점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동안 건물 관리인의 길고 긴 이야기를 경청하며 앉아 있기도 했다. 간혹 택시라도 타고 오는 날에는 택시기사가 하던 이야기를 마저 끝내기 전에는 결코 내리지 않았다. 누구나 조이스에게 매력을 느꼈다. 어느 누구도 그의 매력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p.67

 

세기의 이야기꾼은 무엇보다 세기의 경청자였다. 누구나 그 앞에서는 귀중한 연사 대접을 받았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을 흡수하여 다시 세상에 흩뿌렸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마침내 실비아를 만나 세상에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율리시스>는 음란물 취급을 받아 세상에 정식으로 선을 보이기까지 온갖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이 미혼의 서점 여주인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오늘날 이 작품은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었을 지도 모른다.

 

 

 

율리시스의 방대함과 난해함, 나는 아직 이 책을 읽어 볼 용기를 내지 못한다. 평생 녹내장으로 고통받아 주변의 사물과 활자를 정확하게 제대로 편하게 관조할 수 없었던 이 아일랜드의 사내는 일상 생활과 경제 관념에서는 오히려 평균이하였다고 한다. 서점 주인이자 출판인이었던 실비아는 마침내 제임스 조이스의 가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녀 또한 경제적으로 허덕였고 대책없는 몽상가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다녀야 했지만 위대한 작가의 위대한 책을 세상에 내어 놓는 일에서 말할 수 없는 보람을 느껴 그 고난의 과업을 자처했다.

 

 

 

 

 

 

 

우리가 무척 좋아했던, 그리고 아무런 말썽도 피우지 않았던 손님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의 한쪽 구석에서 잡지나 매리엇 대령의 소설 또는 다른 책을 읽었다. 이 사람이 바로 어니스트 헤밍웨이로, 내 기억이 맞다면 1921년 말에 파리에 처음 왔을 것이다.

-p.120

 

그녀의 헤밍웨이에 대한 호감과는 달리 각주는 냉정하다. 헤밍웨이의 허풍, 거짓말과 그것을 또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실비아에 대한 객관적인 해명. 그녀는 자신이 사랑했던, 숭앙했던 작가들을 지켜주고 싶어했다. 그녀의 회고록은 그래서 대체로 무덤덤하다. 작가와의 친분의 과시 대신 그 작가와의 교감이 태반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작가들과의 만남, 그들의 이야기가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 장교가 진열장에 남아 있던 단 하나의 책,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를 달라고 위압적으로 이야기하자 그녀는 황급히 서점을 정리하고 숨어 지낸다. 수용소에서의 생활도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녀가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를 지켜낸 것이 그녀 자신의 고된 수용소 생활보다 더 그녀 삶에서 의미 있는 일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헤밍웨이와의 재회. 담담한 회고록은 막을 내린다.

 

 

 

 

 

물론 그녀는 이미 고인이 되었고 그녀의 뒤를 이어 조지 휘트먼이라는 사람이 이 서점의 명맥을 잇는다. 지금도 가면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을 만나볼 수 있다. 그 서점을 들락날락하며 낭송회를 열고 책을 찍어내고 객쩍은 농담들을 교환했던 사라진 우리의 작가들은 이제 흔적 정도만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이제 동네에는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같은 서점이 설 곳이 없다. 도서대여점도 보기 힘들다. 아니 종이에 찍힌 활자로 교감하고 소통을 나누는 풍경 자체가 점차 화석화되어 가는 것같다. 그러니 이 책들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향수, 그리움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은 다시 돌아 다시 종이로 된 책, 그 책을 쓴 작가, 그 책을 읽는 이들의 아지트가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곳이 다시 생긴다면 슬며시 들어가 가만히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싶다.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따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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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4-26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이 책들 싸안고 계실 봄날의 블랑카님 생각도 나고, 한동안 잊었던 파리가 막 보물안고 달려오는 것 같아요. 파리보다 황금보물이 필요해요, 요즘. 저도 불어를 그렇게 배워서(억양,발음 다 너무 이상했어요! 부끄럽고, 몸도 베베 꼬이고) 프랑스 정말 관심도 없어요--; (그치만 이건 과거 얘기)

지금은, 아프리카 오지에 보내준다고 해도 가서 안올 것 같아요. 그치만 화장실에 들어갈 때 무가지를 들고가시는 블랑카님이라니.. @.@

blanca 2013-04-28 10:38   좋아요 0 | URL
ㅋㅋ 예전에 에리히 케스트너인가가 엄마가 시장에서 채소 사오면 그것을 싸온 포장 신문도 읽었다는 이야기 듣고 웃었던 기억이 나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저도 심한 활자 중독이라서요.ㅋㅋ

불어 묘한 매력이 있는 언어는 분명한데 참 어렵더라고요. 응용보다는 암기가 골격인 언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는 암기에 재능이 없어서 고등학교 때 별로 안 좋아했던 과목이랍니다.

세실 2013-04-27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우리도서관에서 인문학 강좌 하는데 주제가 고대 그리스 철학이고 율리시스가 필독도서네요. 두꺼움에 놀라고, 난해함에 놀라고....저도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요^^
세계 고서점 탐방. 생각만해도 낭만이어라~~~~~

blanca 2013-04-28 10:39   좋아요 0 | URL
세실님 도서관 강좌 너무 알차네요. 그죠! 엄청 엄청 두껍죠. 아웅, 저도 언젠가 고서점 탐방 같은 것 해보고 싶긴 한데 언제가 될런지요.

프레이야 2013-04-27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이런이런 사랑스런 페이퍼라뇨.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에 대한 이야기는 읽어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문학적인 블랑카님이 들려주시니 더 좋아요.
정말이지 꼭 가보고픈 곳 중의 하나랍니다. 파리의 고서점도 담아가요. 제가 요즘 부쩍 프랑스에 꽂혀서요.불어공부는 이제 두달했고 왕초보에 게으름뱅이지만 즐기면서 천천히 하려구요. 언젠간 갈 날이 있겠죠. 발원하면 이루어지리니^^ 행복한 봄날 누리시길~~♥

blanca 2013-04-28 10:40   좋아요 0 | URL
아, 맞다! 프레이야님 불어공부중이셨죠! 그럼 꼭 인연이 닿아 가실 일이 생길 거예요. 어제 날씨 너무 좋더라고요. 해바라기 하며 참 행복했답니다. 아, 아쉬운 봄이에요!

Jeanne_Hebuterne 2013-04-30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전산으로 이루어지는 첨단 작업이 활개를 쳐도 사람은 어느정도의 아날로그를 추억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보니 저보다 한참 어린 십대 소년이 언젠가 '음반을 왜 사요?'라고 묻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겪은 것을 내칠 수 없고 어찌되었든 소통하고 싶은 바람이 이끼처럼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자리잡은 공간이 블로그, 서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나저나 블랑카님이 저런 고서점에 가시면 정말 재미있는 순례기를 들려주실 것 같아요!

blanca 2013-04-30 10:42   좋아요 0 | URL
그래서 또 <건축학개론> 같은 영화가 사람들의 호응을 끌어낸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의 스마트폰이 또 미래에는 추억의 물품이 될 수도 있을까요? 음반도 음반점 풍경도 참 흐릿해졌지요. 이 서재들 만큼은 과거의 것이 안 되었으면 좋겠어요.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쟌느님과 소통할 수 있도록요^^;;

다크아이즈 2013-05-01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율리시스는 훌륭한 리액션을 지닌 작가였네요. 잘 들어주고 잘 공감해야 잘 쓰는 작가...
율리시스 저 두꺼운 것, 무려 1300페이지 넘어요 ㅠ.
저것을 언젠가 반값할 때 사놓고 장식용으로 잘 활용하고 있다는 ㅠ

프레님이 열공해서 프랑스어 접수하고 프랑스 여행도 가면
우리 같이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 후일담 들어보아요.
그러고 보니 여기 블랑카님 덧글에 제가 존경하는 분들 다 모였네요. ^^*

blanca 2013-05-03 11:37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저 책 사셨군요. 맞아요. 그때 세일하던 것 기억이 나는데. 저는 아예 시도조차 안 했답니다.^^;; 진짜 프레이야님 페이퍼 기다려야겠네요.
 

나무를 가지고 조각하는 나를 보고 자네는 말했지.

"내게도 뭘 좀 만들어 주게나."

나는 "뭘 만들어 줄까?" 하고 물었네.

자네는 "상자."라고 대답했지.

"뭐 하게?"

"물건 넣으려고."

"무슨 물건?"

"자네가 갖고 있는 건 뭐든지 다."

자, 여기 그 상자가 있네,

상자에 내가 갖고 있는 것을 거의 다 넣었는데도 가득 차질 않는군.

이 속에는 고통과 흥분, 호감과 악감, 악의와 선의, 기쁨과 절망,

그리고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창조와 환희가 들어 있다네.

게다가 그 맨 위에는 자네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놓여 있지.

그런데도 상자는 도무지 가득 차질 않는군.

-존 스타인벡

 

 

존 스타인벡이 친구인 편집자 파스칼 코비치에게 만들어 준 온갖 것을 다 넣었으나, 차지 않았던 상자는

 

 

 

 

 

 

 

 

 

 

 

 

 

 

 

 

 

 

이것이었다. 천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 존 스타인벡이 친구에게 헌정하는 이 애정어린 제사는 그가 <에덴의 동쪽>에 쏟아부은 것들에 대한 자기 고백이기도 하다. 요절한 제임스 딘의 강렬한 이미지. 동명의 스케일 큰 드라마. 정작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고 캘리포니아 북부 살리나스 계속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부터 펼쳐지는 이 장대한 이야기에 코를 박았다.

 

이 이야기의 화자는 객관적 관찰자이기도 하고 작가 존 스타인벡의 대리 자아이기도 하다. 실제 그의 외가에 대한 자전적인 고백이 상당 부분 들어가 있다고 한다. 북부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인 외할아버지 새뮤얼 해밀턴이 살리나스 계곡에 도착하여 킹시티 동쪽의 척박한 언덕에 정착하는 과정은 존 스타인백 외가의 일대기에 끼워 넣을 만하다. 새뮤얼이라는 캐릭터는 더없이 복합적이고 매력적이다. 그는 손재주가 많고 따스한 성격으로 각종 마을 대소사에 빠지지 않았지만 돈을 버는 재주는 없는 몽상가였다. 반면 아내 라이자는 유머 감각이라고는 없고 메마르고 건조한 독실한 장로교도였다. 이 둘은 너무나 달랐지만 그래서 더 조화로웠다. 남편이 꿈을 꾸는 동안 아내는 묵묵히 아이를 아홉이나 낳고 길러냈다. 보수주의자,혁신주의자, 몽상가,현실주의자가 적절하게 섞인 더없이 균형감 있는 가족이었다. 9남매 중 딸 올리브가 존 스타인백의 어머니이다. 한편 동부에서는 제임스 딘이 연기했던 칼의 아버지가 될 애덤 트래스트가 배다른 동생 찰스의 반대를 묵과한 채 악마적인 데가 있는 여자 캐시를 데리고 살리나스 계속으로 이주해 온다. 캐시는 쌍둥이 형제를 낳고 남편을 총으로 쏜 채 도주해 유곽에 흘러들어간다. 실의에 빠져 쌍둥이 아들도 중국인 요리사 리에게 맡겨 버리고 삶의 의욕을 상실한 애덤은 부지런한 몽상가 새뮤얼에게서 아들들의 이름을 얻는다.

 

당신의 첫 아들을은 카인과 아벨인 셈이지.

-p.491

 

이름을 짓기 위하여 모인 새뮤얼, 애덤, 중국인 하인 리는 창세기 4장, 아담과 이브의 아들 카인과 아벨에 대하여 진지한 토론을 벌인다. 이 토론은 사변적이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다. "위대하고 영원한 이야기는 만인에 관한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지속되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라는 하인 리의 이야기처럼 야훼에게 바친 제물이 거부당하자 야훼를 흡족하게 한 아우를 죽이고 만 카인의 후예인 우리는 꼭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악행을 저지르고 방황하는 카인의 이야기에 매혹당한다. 왜 야훼는 동생을 죽인 카인에게 표적을 찍어 죽지 않도록 보호해 주었는 지에 대한 그들의 의문은 말씀히 해소되지 못한 채 성경에서 '약속된 땅'으로 돌아온 칼렙과 여호수아라는 이름를 쌍둥이 형제에게 붙여주려는 것으로 끝난다. 여호수아는 '약속된 땅'으로 돌아오지 못한 아론으로 변경되기는 하지만. 이렇게 해서 칼과 아론이라는 형제는 성경에서 이름을 얻는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아름다운 외모의 형 아론, 타인을 두렵게 하는 동물적인 공격성이 있지만 형을 사랑하고 지켜주고 싶어하는 동생 칼. 이 형제는 마치 아버지와 삼촌, 카인과 아벨의 또다른 은유 같다.

 

절대 늙어 소멸할 것 같지 않던 새뮤얼은 딸 유나의 죽음으로 점차 노쇠해가고 마지막으로 자식들의 간청을 못 이기는 척 그 척박한 땅을 떠나기 전 애덤과 하인 리를 다시 찾아와 아름답고 철학적인 대화를 나눈다. 인종, 민족, 계층을 뛰어넘어 한 곳에 모여 인간의 원죄의식, 삶 전체에 대하여 아름다운 운율의 시를 읊듯 대화를 펼치는 그들 모습의 묘사가 눈부시다. 그 대화는 사변적이지도 고리타분하지도 않은 영롱하고 생생한 음악 같다. 마지막으로 새뮤얼 덕택에 기운을 차리고 악마적인 여자 캐시에게서 해방되었다고 느낀 애덤이 새뮤얼에게 정원, 풍차 우물을 만들어 주고 서풍을 타고 장미향이 퍼지게 도와달라는 요청에 보인 새뮤얼의 반응은 너무나 아름답다.

 

"애덤, 고맙네. 자네의 향기로운 제안이 서풍을 타고 향기롭게 번지는군. "

p.54

 

하지만 자신의 마지막이 멀지 않았다고 느낀 새뮤얼은 할 수만 있다면 온 세상에 장미를 심으려 들 자신의 아들 톰을 대신 찾아보라고 완곡하게 거절한다. 새뮤얼은 죽고 그의 영혼은 하인 리의 표현처럼 애덤과 리 사이를 떠돌다 미처 마무리 되지 못했던 그들의 카인과 아벨에 대한 의문의 답을 가지고 온다. 야훼가 카인에게 이야기한 "팀셸"이라는 히브리어. 이것은 <에덴의 동쪽> 전부를 아우르는 핵심이기도 하다."너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죄악도 인간의 자유 의지와 선택으로 다스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제시. 스타인벡 앞에서 인간은 신만큼 존귀하고 위대해질 수 있다. 칼이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 소외감으로 섬약한 형 아론에게 유곽에서 마담으로 일하는 생모의 모습을 노출하여 그를 전장으로 떠나게 만들고 끝내 전사하는 결과까지 낳게 했을 때에도 그들의 실질적인 양육자였던 하인 리가 아버지 앞에 아들을 세우고 그 입에서 끝내 용서를 의미하는 "팀셸"을 뱉게 하는 마지막 장면은 인간 전체를 긍정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을 위대하게 고양시키고 삶의 존귀함을 응축시킨 존 스타인벡의 저력을 그 자체로 형상화한다. 존 스타인벡이 그려낸 인간의 숱한 악한 기질들은 우리 외면에 존재하는 머나먼 것이 아니다. 질투하고 시기하고 때로 어리석은 충동에 지고 피를 나눈 혈족들에게  상처와 위해를 가하는 모습은 우리 내부 안에  떠돌아다니는 부스러기들이다. 이러한 악덕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넘어설 수 있는 인간의 잠재력은 미덕에 닿아 있다. 그러고 보면 존 스타인벡은 자신의 결론이자 바람을 새뮤얼에게도 애덤에게도 하인 리에게도 골고루 흩뿌려 놓은 것 같다. 아니, 찰스에게도 칼에게도 심지어 사악한 여자 캐시에게도 그의 모습은 투영되어 있다. 그가 이야기하였던 것처럼 "모든 소설과 시는 우리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선악의 끊임없는 대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다만 <에덴의 동쪽>이 조금 더 밀고 나간 지점은 섣불리 미덕의 승리를 확정지은 것이 그 가능성의 도정에 인간의 선택과 의지를 조심스레 놓아 둔 것에 있다.

 

존 스타인벡의 모든 것이, 그리고 나머지는 읽는 자의 몫으로 남겨진 이 위대한 상자를 천천히 열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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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4-22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의 저 잘생긴 남자는 아마 제임스 딘이겠지요. 제임스 딘 정말 좋아해요.
동명의 한국 드라마를 무척 좋아했던 기억이 나요. <죄와 벌>을 언젠가 다 읽은 후에 읽어볼게요.
천천히, 천천히 열어볼게요.

blanca 2013-04-23 10:40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저는 아직 제임스딘의 <에덴의 동쪽>을 보지 못해 이번 기회에 보려고요. 아, 저 이 책 읽으며 토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이 생각났어요. <죄와 벌>을 읽고 비교해 보셔도 좋겠어요.

Jeanne_Hebuterne 2013-04-23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단에 자기 자식은 커녕 염소 한 마리 올리지도 못하여도, 씻겨줄 발이 없더라도, 마침내는 성 베드로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하여도 끝내 '나의 뜻대로 하지 마시옵고 아버지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말할 용기가 인간에게 과연 있는 걸까요?

요즘은 점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지는 '그리하여'는 구약과 신약에만 존재하는 어구가 아닐까 생각하곤 한답니다. 어떤 것이 옳은지 무섭게 궁금했어요.

blanca 2013-04-23 10:42   좋아요 0 | URL
이 책에는 여러 번 성경 문구에 대한 토론이 나와요. 그런데 그 대목이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여러 시각에서 토론을 벌이면서 결국 인간의 위대함, 선택의 자유 의지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 보면 신을 이야기하면서 결국 인간으로 돌아가는 스타인벡의 의도가 보입니다. 반대의 것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으로 돌아가는 재능이 부러웠어요.

성경은 언젠가는 학문적으로 정독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리시스 2013-04-26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한번씩 보는데, 책은 못봤어요. 재밌겠다!

blanca 2013-05-16 08:46   좋아요 0 | URL
댓글 달린 줄도 몰랐어요. 아이리시스님. 아, 책 정말 좋아요. 진짜요! 강력추천합니다. 영화에서는 너무 생략된 대목이 많은데 그 생략된 대목 중에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답니다. 좋아하실 거에요!
 

처음에는 그냥 그렇고 그런 책인줄 알았다. 너무 드라마틱하고 너무 뻔할 거라고. 기대 없이 나간 소개팅.

오히려 그런 소개팅은 결혼까지 가곤 한다. 이 책도 그랬다.

 

물론 이 책의 저자 마이클 게이츠 길은 스타벅스의 종업원인 만큼 스타벅스에 대단히 호의적이다. 그러나 그런 그의 스타벅스 예찬이 커피농사의 3세계 아이들의 노동력착취, 1회용 제품의 남용 등 다른 측면에서의 비판의식과 대척점에 놓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대기업 중역에서 종이나부랭이처럼 갑자기 추락하여 스타벅스에서 라떼 한 잔을 사먹는 비용에도 버거워하며 괴로워하다 우연히 브로드웨이의 그 매장의 종업원이 되어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의 삶에서 현재의 비참한 경제적 상황, 결혼실패, 건강악화를 어떻게 건강하게 극복해가는 지에 대한 솔직담백한 고백은 굉장한 진정성을 지닌다. 이 책은 스타벅스에 대한 홍보가 아니라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둘러싼 외부의 파고를 어떻게 넘어나가고 균형감을 가지게 되는 지에 대한 감동적인 예시다.

 

 

 

 

 

 

 

 

이런 고백을 공적으로 하기란 쉽지 않다. 사실 말할 수 있을 때 이미 우리는 극복의 지점을 넘어가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는 돈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또 성적 본능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이 지경까지 왔다는 잔인한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중략>일자리를 구하기에 너무 늙어버린 지금, 내가 맞닥뜨린 현실은 자기 몸 하나 부양할 능력도 없고, 그 어떤 회사에서도 반겨주지 않는 미국 노인들이 처한 잔인한 현실 바로 그것이었다. 불안하고 암담하고 창피했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스타벅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p.60

 

그는 뉴욕 맨해튼 어퍼이스트 지역의 최고급 주택에서 성장한다. 소위 상류층 자제로 예일대에 진학하여  굴지의 광고회사 JWT의 고위직까지 승진가도를 달린다. 단란하고 다복한 가정. 백인 중산층. 그곳에서의 추락은 예기치 않게 왔고 그런 만큼 더 뼈아픈 것이었다. 정리해고 후 그는 십년 동안 방황하다 혼외정사로 낳게 된 늦둥이 아들의 부양과 이혼, 사업 실패, 뇌종양 등 온갖 악재는 다 경험하게 된다. 행복하고 화려했던 유년의 회상, 언론인 아버지 덕에 숱한 명사들과의 교유 등을 경험했던 그를 이제는 전염병 환자나 되는 마냥 피하는 무리들이 생긴다.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 그는 검은 복장에 초록색 스타벅스 앞치마를 두른다. 화장실을 대걸레로 밀고 손님들에게 거스름돈을 내어 주며 그는 다시 태어난다. 불행했을까, 비참했을까.  우연히 마주치는 예일대의 동창들은 그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는 부끄럽지 않다. 특히나 화장실에서 마약을 하다 폐장시간까지 나가기를 거부하며 그에게 칼까지 들이밀던 젊은이를 경험하며 그가 정작 자신의 분노를 찬찬히 들여다 보는 장면. 그는 그 젊은이에게 분노하는 대신, 늙고 오만하고 통제광이었던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모든 상황을 통제하기를 원했던 지난 시절의 잔재로 그는 그 젊은이와 상황을 통제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육십이 넘어서도 이렇게 스타벅스 매장에서 끊임없이 성장한다. 뭉클했다. 늙고 오만하고 독선적인 노인. 우리는 일부의 습성을 흡사 그 연령대의 본질적인 특질인 것처럼 오도하고 있지나 않은지. 지하철 경로석에서 젊은 사람들과 노인들이 벌이는 그 수많은 유쾌하지 않은 상황들을 이 마이크처럼 자신에게서 극단적으로 치솟는 부정적인 감정을 통하여 돌아보는 기회로 삼는다면 우리는 다 점점 더 성장할 것이다.

 

스타벅스 매장에서 청소, 계산, 음료 만들기 등 한 단계 한 단계 일을 배워나가며 빛나는 마이클이 드디어 매장에 찾아온 전처 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과 행복하게 화해하고 서로를 토닥이는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 같다. 군데 군데 그의 유년, 청년기의 아름다운 추억들은 커피에 얹은 토핑 크림처럼 달콤하고 아련하다. 지하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며 한 시간이 넘게 걸려 매장에 도착하여 손님들 하나하나에게 덕담과 인사를 건네는 이 인상좋은 할아버지의 모습이 한국에서도 낯선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재기'라는 그 진부한 용어에 의외로 너그럽지 않다. 추락은 쉽고 재기는 어렵고 낯선 것이다.

 

힘들 때에는 우울할 때에는 라떼를 마신다. 술과 담배를 하시지 않는 아버지도 테이크 아웃 커피를 마신다. 고단했던 삶에서 아버지에게 이런 테이크 아웃 커피는 하나의 축복이다. 너무 많은 진지한 생각, 어려운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이 책에서는 넘어져도 정말 아프게 쓰러져도 다시 행복해질 수 있고 웃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구체적이고 와닿게 아름답게 그려냈다는 것, 그래서 마지막 장을 덮으면 그냥 갑자기 삶이 너무나 눈이 부시게 느껴진다는 것으로 즐겁고 유익한 독서였다고 할 수 있다. 스타벅스에는 된장남, 된장녀만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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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4-17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작년이었나, 서점에 가서 이 책을 보고 읽어볼까 말까,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왔었어요. 그리고 잊고 있었는데, 여기, 블랑카님 서재에서 보게 되네요. 저도 읽어볼래요.

blanca 2013-04-18 11:2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이 책 저는 정말 좋았어요. 가볍고 흥미로운 책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대이상이었답니다.

Jeanne_Hebuterne 2013-04-17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마침 어느 알라디너분으로부터 선물받은 스타벅스 텀블러를 사진으로 찍어 올린 후 서재 브리핑을 보니 블랑카님의 이 책 리뷰가 업데이트되었군요! 이 책은 저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하워드 슐츠의 자서전보다 이 책이 스타벅스의 입장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구태의연하고 밋밋하고 예상한 대로 펼쳐지는 이야기이지만, 가끔 꾸미지 않은 따뜻함과 밝음이 부러울 때면 이런 책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함께.

쓸데없는 덧-스타벅스가 시중 모든 커피 전문점 커피 중 카페인 함량이 가장 높대요.

blanca 2013-04-18 11:29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군요! 슐츠 자서전은 저도 읽다 말다 그랬어요. 그러고 보면 스타벅스에 관련된 이야기 중 경제적 상황이 어려운 백인 남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군요.

스타벅스 카페인 함량이 제일 높단 말이에요? 저는 라떼는 카페인 함량이 무조건 낮을 거라고 맹신했는데 기사를 보니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점점 카페인의 노예가 되어 가는 느낌입니다.--;;

Jeanne_Hebuterne 2013-04-21 18:01   좋아요 0 | URL
더욱더 쓸데없는 덧-카페인 함량은 에스프레소와 더치 커피에 가장 낮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어요. 미뢰가 나를 배신한 듯한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전 이미 카페인 세계의 자발적 노예로 와있으니, 웰컴, 블랑카님!

세실 2013-04-18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현재의 삶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겠네요. 삶이 너무나 눈이 부시게 느껴진다는 것.....저도 느끼고 싶어요^^
울 도서관에 있나 찾아봐야지~~

blanca 2013-04-18 11:29   좋아요 0 | URL
세실님, 이럴 때에는 도서관에 계신 게 너무 부럽습니다.^^;; 드뎌 봄기운이 완연해졌습니다. 벚꽃비도 내리고. 그곳은 더더욱 그렇겠죠?

saint236 2013-04-19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타벅스에 관련된 책들이 꽤 많이 있네요. "스타벅스 감성 마케팅"이라는 책과 "교회 스타벅스에 가다"라는 책도 있지요. 블랑카님 오랫만에 뵙습니다. 건강하시죠?

blanca 2013-04-20 09:29   좋아요 0 | URL
saint236님도 안녕하시죠? 저도 잘 지냅니다. 나이들면서요--;; 아, 그런 책들도 있었군요! "교회 스타벅스에 가다"는 또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네요. 주말이라 잔뜩 기대했더니 비가 추적추적. 날씨 변덕이 정말 너무 심하네요. 그래도 모처럼의 여유, 가족들과 즐거운 주말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1995년 나는 고3이었다. 그 날, 기억이 맞다면 나는 친구들과 보충수업 중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스무 살이 된다. 이제 정말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어두컴컴한 교실로  고3 교실에 참을 인자를 적어 놓던 자그마한 국어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얘들아, 백화점이 무너졌단다."

어안이 벙벙했다. 도저히 무너질 수 없는 것이 거짓말처럼 해체됐다.

그 백화점 안에 있었던 숱한 생명들이 나에게 구체적이지는 않았지만 뭉뚱그려 하나의 예기치 않은 희생으로 다가왔다.

연일 티비에서는 재난 속보 방송을 했고 그 방송을 들으며 영웅처럼 귀환하는 생존자들의 모습에 뭉클했다.

그들도 나도 견디고 있었다. 그 무게는 비교할 수가 없었지만.

 

김영하의 팟캐스트로 정이현의 <삼풍백화점> 낭독을 들었다.

여고 동창생과의 조우. 그 친구는 삼풍백화점 의류 매장에서 일하는 친구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문득 종료 버튼을 눌렀다.

이제는 읽을 차례다, 싶었다. 결말까지 육성으로 들을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95년 나는 새파랗게 젊었고 어렸고 무모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일들은 스쳐 지나가지 못했고

하나하나 가슴으로 포박해 들어왔다. 트라우마는 그 일을 겪은 당사자에게만 남는 것이 아닌가 보다.

 

 

그해 봄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비교적 온화한 중도 우파의 부모, 슈퍼 싱글사이즈의 깨끗한 침대, 반투명한 초록색 모토롤라 호출기와 네 개의 핸드백.

- 정이현 <삼풍백화점>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에어콘은 고장이었다. 교실 안도 후끈했다. 선풍기를 돌리고 부채질을 하며 과연 수능날까지 전과목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을까 싶어 아연했다. 많은 것들이 예비되어 있을 거라고 착각한 열아홉. 주인공은 서태지와 동갑이었다. 그녀는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반겨주는 곳이 없었다. 내가 대학교 4학년 때 당면할 현실이기도 했지만. 스무 살 문턱은 너무나 눈부셔서 그 이후를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존재감 없던 여고 동창 R을 삼풍백화점 여성복 매장에서 만나게 된다. R과 나는 여고 동창생인데 여고를 졸업하고 이제 대학까지 졸업하려는 찰나에서야 소통하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찍 사회인이 된 R은 나에게 고속터미널 근처 칼국수를 사준다. 그리고 남산 근처의 그녀의 작은 방으로 '나'를 초대한다. 스물네 살. 삼풍백화점에서 '나'는 하드커버의 일기장과 소중한 친구를 함께 얻는다. 그 친구가 일하는 매장에서 임시 아르바이트를 하다 도리어 그 친구에게 피해만 끼치고 어색하게 헤어지고 그것으로 그 둘의 인연은 끝이 난다. 한때 절절하게 가까웠던 누구와 어이없이 헤어지는 일은 우리 청춘의 부산물이다. 그 인연히 훑고 지나간 자리에서 우리는 성장한다.

 

그.리.고. 백화점이 무너진다."R과 나의 삐삐번호는 이미 지상에서 사라졌다."는 문장에 가슴이 아려왔다. 물론 나의 삐삐번호도 그 번호를 둘러싸고 만들어졌던 우리들의 관계도 이 지상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싸이홈페이지에서 R을 찾아 헤맨다. 그러다 R을 닮은 여자아이의 사진을 발견하고 그것이 R의 딸이기를, R은 삼풍백화점에서 무너지지 않았기를 바란다.  

 

정이현의 <삼풍백화점>은 이런 내용이다. 나의 삶을 스쳐 지나간 인연이 거대한 재해 속에 고난 속에 함몰되지 않았기를 기도하는 모습이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슬픈 복기이기도 하다. 잊을 만하면 다시 떠오르는 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떻게 지내는지 잘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나의 사랑하는 청춘의 친구들. 가만 가만 나도 그녀들의 안위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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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04-12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신 글은 언제봐도 참 좋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blanca 2013-04-16 11: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후애님. 어제까지 춥더니 오늘 드뎌 봄기운도 느껴지고 벚꽃도 자주 보이네요^^

후애(厚愛) 2013-04-21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오늘은 좀 쌀쌀합니다.
날씨가 이래서 감기도 안 낳고...ㅠㅠ
건강 꼭 챙기시고 즐겁고 알찬 주말 되셔요.*^^*

blanca 2013-04-22 16:50   좋아요 0 | URL
감기 걸리셨군요--;; 아무쪼록 빨리 나으세요! 수분 섭취 많이 하시고 목에 스카프나 손수건을 두르면 목감기 예방도 되고 치료도 조금 빨라지는 느낌이더라고요.
 

책을 읽긴 읽었는데 미처 그 책에 대한 감상이나 느낌을 추스르지도 않고 바로 다음 책으로 고고,한 것같다. 먼저 뒤늦게 읽은  로맹 가리의 단편집.

 

 

음, 사실 쉽게 완독하지는 못했다. 로맹 가리 특유의 그 가볍지 않은 진중함이 빛을 발할 때도  있고 지루했던 적도 있어 읽다, 말다 했다. 처절한 경험으로 자의적으로 눈이 멀어버린 소녀와 떠돌이 도붓장소의 기묘한 동행. 크리스마스 특수와 인간의 친절을 믿는 그들이 끝내 또 처절한 배신을 당하고도 그것을 애써 외면하려는 모습을 그린 <지상의 주민들>에서는 로맹가리 특유의 냉소적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노출하는 삶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절묘하게 배합된 시선이 드러났다.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같은 작품은 다소 그로테스크하고 SF적인 분위기가 도발적이었다.

 

로맹가리는 짧은 이야기도 함부로 쓰지 않는 작가인 것같다. 물론 다른 작가들도 그렇겠지만 그는 어디에 발자국을 찍어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고 뚜렷하게 남기고 사라지는 그런 캐릭터의 작가다.

 

 

 

 

 

사실 이탈리아를 가 본 적도 갔던 사람의 이야기를 길게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찰스 디킨스가 그려내는 이탈리아의 풍경이 상상만으로 부족해 참으로 아쉬웠다. 군데 군데 그의 어쩔 수 없는 위트, 풍자가 드러나 재미있었다. 1844년 일요일 아침,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로 떠나는 풍경을 소설처럼 묘사하며 시작하는 이 여행기는 카톨릭에 대한 가감없는 냉소, 관광지의 뒤안길의 그 적나라한 결핍과 생계를 위한 사투에 대한 묘사로 때로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그만큼 찰스 디킨스는 솔직하고 그다운 산문을 써내어 그의 언어에 대한 펜심을 충족시켜 준다고나 할까. 화려한 사육제 풍경에 대한 생생한 묘사도 아름답다. 170년 전 이탈리아 풍경에 대한 대작가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그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를 다시 발견하는 재미를 누릴 수 있다.

 

 

 

 

 

 

 

 

벼르고 벼르다 드디어 구입해서 영어 공부 한답시고 영어 자막 띄우고 봐서 그런지 영화를 본 게 아니라 한바탕 수업을 들은 기분으로 좋아하는 작가 제인의 북클럽을 오염시킨 것 같아 다소 아쉽다. 다시 한글 자막으로 보니 그 한글자막마저 너무 빨라서 한번에 이해가 되지 않더라. 그러니 하물며 영어라니. 매달 오스틴의 작품을 한 권씩 선정해서 다 같이 읽고 저마나 자신의 시선과 목소리로 재해석하는 그 토론 장면이 너무 아름답고 부러웠다. <맨스필드 파크>, <노생거 사원> 같은 경우는 읽어보지 못해서 토론 내용에 흠뻑 젖을 수 없어 안타까웠다. 오스틴 작품을 다 읽고 다시 본다면 더 재미있게 몰입해서 볼 수 있을 것같다. 이런 북클럽 하나가 있어 테마별로 같이 책 읽고 이야기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혼자 읽는 것과 함께 읽는 것의 그 찬란함의 밝기 차이는 실로 대단하다. 어떤 책이 공통된 정서와 감동을 끌어내지 못할지라도 함께 그 책을 읽었다는 시간 공유의 경험만으로도 소통의 지점은 빛난다.

 

 

 

 

알라딘 서재분들이 종종 언급했던 김영하의 팟캐스트를 드디어 다운받아 듣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작가지만 시간 분량이나 어조가 때로 눈을 감기게 했다. 그의 작품이나 산문집을 보면 대단히 기발하고 재미있는 감각적인 사람일 것 같은데 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대학교에서 강의를 듣는 느낌이 나서 좋기도 했고 아쉽기도 했다. 정이현의 <삼풍백화점>을 듣다 당장 구입해서 읽어야 겠다는 생각에 팟캐스트 듣기를 중단하고 바로 주문했다.

 

 

정이현이 서울 출신 72년생 작가라는 것이 시사하는 바에 대하여 김영하는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하숙생과 월남인들로 꾸려졌던 우리의 문학에서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란 작가의 등장은 흔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정이현의 소설에는 종종 강남의 중산층의 모습이 가감없이 그려진다. 어쩌면 제인 오스틴도 프루스트도 자주 묘사했던 솔직한 속물적 욕망에 대한 묘사.  바라지만 드러내기는 어쩐지 두려운 것들에 대하여 이 작가는 매우 예리하고 흥미롭게 천착한다.

 

삼풍백화점 의류 매장에서 일하는 여고 동창생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 '나'. '나'는 고등학교 때 그녀와 친하지 않았지만 우연한 조우는 그녀와의 인연의 틀을 다시 짜기 시작한다. 그녀들이 결국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호기심과 걱정으로 이 책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제 식당에서 거의 고봉밥으로 김치볶음밥을 주신 아주머니에게 먹다 먹다 좀 남긴 접시를 갖다드렸더니 너무 어두운 얼굴로 "맛이 없었어요?"라고 해서 괜시리 미안했다. 아주머니가 내가 남긴 김치볶음밥으로 자신의 요리 실력을 폄하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감기는 끝물이고 이제 정말 봄이 오는 것같다. 4월에는 잠시 살았던 이천의 산수유 축제에 꼭 가보고 싶다. 그때 너무 슬픈 일이 있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바람에 날리는 산수유를 보며 눈물을 삼켰었는데 이제 웃으면서 산수유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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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4-04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인오스틴 북클럽]을 보면 등장인물들이 책 읽는 모습들이 종종 나오잖아요. 밤을 새며 책을 읽는 모습도, 침대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도요. 그런 모습들이 무척이나 좋았어요.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렇게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책을 읽기에는 제인 오스틴이 적절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로맹 가리라면, 코맥 매카시라면 그렇게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을 것 같아요. 등장 인물중 '그렉'이 르귄의 책을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선물하고 끊임없이 읽었냐고 묻잖아요. 나는 네가 좋다는 책을 읽었다, 너를 좋아하니까. 그런데 너는 내가 주는 책을 읽지 않는구나, 하는 것도 너무 공감이 됐고요. 결국은 그녀가 그 책을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어서 제가 다 행복했어요. 책 읽는 사람들이라면 정말 공감하고 좋아할 예쁜 영화에요. 저는 제인 오스틴을 좋아하진 않지만요.

blanca 2013-04-05 09:56   좋아요 0 | URL
우아, 다락방님 정말 영화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저도 그 책 읽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어요. 원서 페이퍼백이 예뻐 보이기도 했고 가장 연장자(이름이 가물가물)의 그 책갈피도 넘 탐나고. 맞아요, 그렉이 자꾸 자기가 권한 책을 읽지 않았다고 서운해하는 모습 정말 현실적이었죠! 마지막에 북파티도 너무 부럽고요. 부러운 것 투성이였어요!

2013-04-04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5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3-04-05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인오스틴 북클럽>이라니. 정말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이네요. 영화를 언젠가 꼭 보리라 다짐했어요. 물론 그 전에 제인오스틴의 책을 한 권이라도 읽고 말이죠. 제 주변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 작품을 읽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떤 로망처럼 인식되어 있어요. 참 재미있고 괜찮을 거 같은데.
정이현의 저 책은 한국 현대 단편 소설집을 한 열 권 정도 한꺼번에 주문할 때 끼어 있었어요. '삼풍백화점' 기억하고 갈게요.

blanca 2013-04-05 10:00   좋아요 0 | URL
아, 특히 남자와 제인 오스틴은 쉬운 접근은 아니에요^^;; 이 영화에서도 나오거든요. 아무래도 다분히 소녀적 취향이라는 선입견이 있어서요. 하지만 절대 아니예요. 소이진님도 한번 시도해 보세요. <설득> 같은 책도 참 좋거든요. 아, <삼풍백화점>이요! 제 고등학교 때 삼풍백화점도 성수대교도 무너졌었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요. 소이진님한테는 이 작품이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듯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