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는 유튜버 중 '편집자K'가 있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은 이의 충만한 느낌이 좋다. 특히나 그녀가 직접 출간에 참여한 책을 소개할 때는 여지없이 영업당한다. 이 책이 그러했다.
시인 박연준(남자인줄)의 산문집. 향긋한 티백과 함께 받아 그 티와 함께 읽었다. 시인이니 만큼 단정하고 정제된 문장들이 촘촘하다. 어떤 문장은 너무 좋아 다시 돌아가 읽었다.
생애의 모든 날을 그러모아 '평생'이라 부른다면 빛나는 날은 기껏해야 며칠, 길어야 몇 주밖에 안 될지도 모른다. 이전에 나는 가능한 한 찬란한 날만 골라 서 있고 싶었다. 특별한 날은 특별해서 , 평범한 날은 평범해서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보 같은 생각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날은 작고 가볍고 공평하다. 해와 달이 하나씩 있고, 내가 나로 오롯이 서 있는 하루.
-박연준 <모월모일>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이러한 문장에 담아 표현하는 건 시인이라 가능한 얘기일 것 같다. 막연하고 모호한 감정, 느낌이 시인의 문장으로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온 듯한 그 경쾌하고 시원한 느낌이 좋다. <조그맣고 딱딱한, 붉은 간처럼 생긴 슬픔>은 시인의 일곱 살의 슬픔을 애도한 글이지만 동시에 내가 잊어버렸던 그 유년의 상처를 떠올리게 했던 지점이기도 해서 먹먹했다. 같은 시인이기도 한 남편과의 소소한 일상, 서로에 대한 애정, 자잘한 다툼 등에 대한 이야기도 잔잔하게 공명한다. 공통의 관심사와 같은 곳을 바라보는 반려자와 함께 하는 생활에 대한 문장들이 사계를 통과하며 절로 저자와 그들의 삶을 그려보게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누구나가 읽어도 공명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나날들에 대한 사려깊은 이야기다. 표지의 핑크빛 투명한 비누의 사진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슬며시 핸드폰 배경화면을 비슷한 것으로 바꿨다.
잔잔해도 생에 대한 에너지와 여전한 열정, 애정의 흔적이 분분하는 이 책과 달리 노년에 대한 이야기는 좀 쓸쓸하다. 이질적이기도 하고 중년이 공감가는 대목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그러한 날들을 예비해야 한다는 자각은 스산하다.
역시 시인의 에세이다. 도널드 홀이라는는 미국의 계관시인 칭호를 받은 팔십 대의 시인이 이야기하는 노년에 대한 삽화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떠났고 기동력을 줬던 운전대는 잦은 사고로 인해 놓은 상태이다. 한 마디로 원하는 곳에 가려면 반드시 동행해서 도와줄 타인을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게 된 상황이다.
나는 내 몫의 원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느낀다. 사실 노년이란 연속적인 상실의 통과의례다. 마흔일곱 살이나 쉰두 살에 죽는 것보다 전체적으로 그게 더 바람직하다. 탄식하고 우울해해 봤자 좋아지는 건 없다. 종일 창가에 앉아 새와 헛간과 꽃들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편이 더 낫다. 나의 일상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기쁨이다.
-도널드 홀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
내 몫의 원이 점점 작아지는 것은 아마 중년 이후부터 이미 시작되는 흐름일 것이다. 청춘이 확장의 절정이라면 중년은 이미 그곳에서 서서히 하강 곡선을 타기 시작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연령대다. 잘 늙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자기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너그럽기는 쉽지만 이제 가진 것조차 서서히 놓아버려야 한다는 것을 수시로 느껴야 하는 시점에서 온화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려면 인위적인 노력과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자기 뒤에 오는 사람이 살 곳이 자기가 떠난 뒤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수긍하고 배려한다는 행위도 그러하다. 환경을 생각하고 지구 생태계를 고려하는 판단을 하기 시작하는 것도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은 이 지구를 결국 떠날 것임을 머리로라도 받아들여야 가능한 얘기다. 노시인은 심지어 시를 쓰는 동력과 활력도 하강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시는 그를 떠나버렸다. "시가 나를 버렸다"는 겸허한 고백이 저릿하다. 이제 그는 서서히 소멸을 향해 망각을 향해 저항하지 않고 걸어간다. 그 도정에 관한 이야기가 쓸쓸하다.
두 시인의 에세이가 채운 이틀, 약국 앞에 선 긴 줄에서 이름 모를 아저씨가 마스크를 가득 담은 상자를 실어오는 소리에 반가운 손님 맞듯 다 같이 웅성거렸던 날들과도 겹친다. 여전히 모르고 알아야 할 것 투성이인 '모월모일'들이 봄과 함께 떠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