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취향 채석장 시리즈
아를레트 파르주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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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문학 책이나 사회과학 서적과는 친하지 않은 편인데 이백 페이지가 채 안 되는 이 핑크빛 책자에 반해 버렸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연구하는 프랑스 역사학자 아를레트 파르주의 형사사건 관련 자료에 대한 일종의 단상들의 모음집이다. 적절하게 진지하고 적당하게 가벼운 지점을 아주 잘 포착한 책이라 쉽게 읽히면서 역사가가 아카이브와 역사, 사회적 현상, 심지어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여 소통한다는 것에 대한 균형 있는 시각에 대하여 많은 알찬 앎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아스날 도서관의 사료를 찾으러 가는 저자의 풍경이 마치 단편처럼 묘사되어 있는 부분도 흥미롭다. 현학적이지 않으면서도 현명할 수 있는 역사가의 강의를 듣는 것 같아 모처럼 풍요로운 읽기를 경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시시하고 엉뚱한 일 속에서 또 하루가 지나가고 저녁이 오면, 역사가라는 이 피곤하고 강박적인 직업에 대해 자문해보게 된다. 이렇게 흘러간 시간은 그저 잃어버린 시간일까? 아니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겠다는 이상에 바쳐진 시간일까?-p.25


참으로 솔직한 발언이다. 그가 역사가라는 직업만 아니라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18세기의 어마어마한 아카이브의 바다에 질식할 듯이 익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방대한 자료의 양에 질리고 그 자료를 해독하며 의미를 끌어올리는 과정은 21세기의 첨단 기술과 멀어 보인다. 아무 의미없고 성과 없는 무용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도 비켜 가지 못했나 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가의 좌절은 눈부신 통찰로 이어진다.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착각, 총체적이고 결정적인 진실을 보편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착각을 깨뜨리는 것은 좋다. 하지만 진실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진실을 경멸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실을 왜곡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보편적 진실에 매달리면 안 된다는 명령과 그럼에도 진실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명령 사이에 난 길은 좁은 길일 때가 많다.

p.118


사람에게는 그가 구태여 학자나 저명 인사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생각, 느낌, 이론을 합리화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그리고 그것에는 분명 진실이 핵심이어야 한다는 기본 명제가 때로 흔들리는 순간이 있다. 보편적 진실에 매달리지 않으면서 진실을 버리지 않는 길은 말처럼 쉽지 않지만 인간이라면 사수해야 하는 절대 명제임이 분명하다. 그것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는 미끄러진다. 저자는 그 지점을 기민하게 포착하여 언어로 낚는다. 모호하고 애매했던 지점들이 이 이야기 안에서는 맑고 투명하게 떠오른다. 역사가의 개인적인 아카이브가 보편적인 대중의 공간으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이 책은 특수하거나 고답적이거나 현학적이지 않다. 누구나 이 역사가의 아카이브에 들어가면 개인적인 저마다의 깨달음의 순간을 얻을 수 있다. 내가 함부로 단언하고 합리화했던 순간들에 대한 성찰의 도정에 들어가게 된다. 나의 인식, 나의 해석, 나의 판단의 오류를 점검할 수 있다. 


바스티유 감옥 안의 남자는 아내에게 헝겊에 편지를 써서 빨랫감 사이에 숨긴다. 그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그가 그 편지의 수신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동원한 절차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뭉클하다. 남자는 감옥의 빨래하는 여자에게 만약 편지가 아내에게 잘 전달되면 부디 양말을 빤 뒤 파란 실로 아주 작은 십자가를 남겨달라고 부탁한다. 그 십자가는 끝내 남지 않았으므로 그 편지는 아내에게 가 닿지 않았다는 추정을 하는 아를레트 파르주의 해석은 지극히 개별적이지만 이 무명의 남자가 아내에게 전하려고 했던 간곡한 메시지의 무게를 헤아리는 연민이다. 그의 아카이브 안의 사연들은 시대와 장소의 경계를 훌쩍 넘어 지금 여기 우리에게 와 닿는다. 우리 모두 어려운 순간에도 반드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간절하게 상대에게 가 닿기를 소망한다. 그 소망이 좌절되더라고 그 마음만은 무용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후세대에 이러한 것을 헤아려 줄 누군가가 우리의 그 잃어버린 소망을 짐작해 줄 것이다. 역사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이라는 방증 같은 책의 울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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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moon 2020-04-02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저한테 올 책들 중 한 권인데, 리뷰를 읽고 이 책부터 읽어야지 생각했어요. 추천 꾹. :)

blanca 2020-04-02 18:31   좋아요 0 | URL
와, 찌찌뿡이네요 ^^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오랜만이에요, 302moon님.

2020-04-13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13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13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