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갑자기 내 이를 보더니 세 살 딸이 "이빨이 못생겼네." 했다. 앞니가 덧니인데 이십대에는 귀엽다고 자위 ㅋㅋ 하며 지냈는데 삼십 대를 넘어 귀여움과 거리가 멀어져 가니 도드라지는 덧니. 할머니도 치아가 가지런해야 이쁘다는데 육십대에도 교정하는 분도 보고 딸아이한테 이런 얘기까지 듣게 되니 고민하게 된다. 돈과 시간, 교정기를 끼고 변할 얼굴 등에 대한 부담으로 망설여지기도 하고.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미란다가 늦게 교정을 시작해 소개팅 나갔다 교정기 사이에 음식 부스러기 다 끼우고 박장대소하다 딱지 맞는 장면도 맴돌고. 그래서 미란다는 신경질내며 교정기를 떼어 버렸지, 아마. 

# 무릎팍 도사를 챙겨 보는 편인데 어제 엄정화 편이 참 좋았다. 가수활동과 나이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활짝 웃던 그녀가 갑자기 "정말 최선을 다했거든요." 하며 울먹이는 장면에서 참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다. 자신의 지난 인생을 최선을 다했다고 회고할 수 있는 그녀가 진정으로 부러웠고, 그 얘기를 울면서 해야하는 그녀의 처지가 안쓰럽기도 했다. 어느 분야든 성공한 사람들의 얘기는 들어둘 만한 것 같다. 윤여정의 돈이 절실할 때 최선의 연기가 나온다던 그 가식없던 고백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었다.  돈과 성에 대한 얘기에 대한 고백은 언제나 치부 같아 어려운데 정정당당하게 양지로 내보낸 그녀의 고백은 그녀가 그것에 대한 콤플렉스나 양가적 감정을 극복했다는 얘기도 되니까. 또 한 편 부럽다. 

# 봄이 오긴 왔나 보다. 오전에 바람맞고 복수하듯 카라멜 마끼아또를 들이키고 있다. 기분 안좋을 때 좋은 날씨는 말리는 시누이처럼 얄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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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0-04-08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주 심하지 않으시면 그냥 있으심이.... 어때요?

엄정화는 받는 거 없이 미워서.. 왜 그런지 저도 몰라요^^ 전 양미경이 좋아요. 언젠가 인터뷰하다가 자기는 말하는 거 너무 싫어해서 가족하고도 별로 말이 없이 지낸데요. 근데 그 말이 왜 그렇게 솔직하게 느껴지던지.. 나이 들면 타인에게 잘 보일려고 하잖아요. 근데 그녀한테 그런 게 없어서 너무 좋았어요. 말 없어도 편한 사이를 만들어야겠어요.

마끼아또 너무 달달 하지 않아요. 전 모카쪽이 좋아요. 하기사 시럽면에서는 오십보 백보죠!

blanca 2010-04-08 22:42   좋아요 0 | URL
딸애 말 듣고 충격받아서요. 못생겼다니, 어흑-..- 제 옆지기도 엄정화를 별로 안좋아해서 안보더라구요. 너무 싫어해서 ㅋㅋㅋ 진짜 솔직하네요. 사실 가족 안에서 가장 처절하고 치사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데 다들 숨기고 싶어하잖아요.마끼아또는 먹고 나면 항상 후회하는데 열받을 때는 단것을 먹어줘야 해서요--;;

순오기 2010-04-08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인생모토가 '생긴대로 산다'여서 그냥 동지하면 안 될까요?^^
기분 안 좋을 때 좋은 날씨~ 못말리는 시누이라니, 어쩜 이리도 심사를 잘 표현했을까 싶어 웃어요.

blanca 2010-04-08 22:43   좋아요 0 | URL
ㅋㅋㅋ 기분 안좋을 때는 날씨 좋은 것도 얄미워요. 교정하면 치아건강이 상한다고 해서 사실 이러다가 말 것 같아요.

마녀고양이 2010-04-08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 어린 딸이 벌써 타박을 줄 나이가 되었네요?
엄정화 어제 너무 이쁘더군요. 열심히 사는 그녀가 좋아졌답니다. 그런데 신랑과 둘이서 저렇게 이뻐진다면 계속 성형할 만 하겠다 했어요... 요즘 연예인들 다들 고친 아름다움이라,, 이젠 별로 부럽지 않더군요. 저도 돈 벌어서 고치면 이뻐질거 같아서. ㅋㅋ

blanca 2010-04-08 22:44   좋아요 0 | URL
어제 보니 또 확 변했더라구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참 사근사근하더라구요. 성형도 시작하면 중독될 것 같아요. 책처럼^^;;

프레이야 2010-04-08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맞고 카라멜 마끼아또요??^^
달콤한 것 먹고싶은 때가 있지요.
엄정화 연기, 꽤 좋은 편 같아요.
주연 신작영화 '베스트셀러' 괜찮을까나요?
근데 덧니가 살짝 애교스러울 것 같은 블랑카님^^

blanca 2010-04-09 14:55   좋아요 0 | URL
아, 베스트셀러^^;; 그랬군요. 제 딸은 못생겼다고 퉁박을 주네요.--;;

꿈꾸는섬 2010-04-09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덧니라 이가 참 못생겼었는데, 전 사고로 치아를 상해서 가짜이를 달고 있어요.ㅠ.ㅠ 가지런하긴 한데 제 이가 아니니 너무 불편하더라구요. 못생겼던 제 이가 그리워요.ㅜ.ㅜ

blanca 2010-04-09 21:10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꿈꾸는섬님 얘기를 듣고 마음을 잡아야 겠어요.
 

일요일 밤 여덟시 반. 즉흥적으로 영풍문고 종로점에 가게 되었다. 
대형서점은 가고 또 가도 질리지 않고 언제나 그리운 장소다. 학창시절 시험이 끝나면 나는 언제나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 
한 이만 원 정도이면 네 권 정도의 책을 살 수 있었다. 요즘에야 두 권도 벅찬 금액이지만 말이다. 고르고 또 고르다 다리가 아플 때쯤 네 권의 책을 품고 아빠를 기다렸다. 이제는 그 곳에 나의 아이를 데리고 간다. 

아기는 통로에만 관심이 있고 뽀로로 책 정도에 눈독을 들인다. 책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이 나 잡아봐라, 이 곳 저 곳으로 날쌔게도 몸을 숨겨주신다. 이 정도면 서점은 더이상 나에게 아름다운 장소가 아니라 곤욕스러운 곳이 되고 만다. 그래도 그 와중에 민음사 전집 코너를 둘러본다. 항상 인터넷으로만 봐 오던 책 표지가 실물로 치환되니 되레 적응이 안된다. 인터넷으로만 책을 구입하다 보니 실물을 보고 고른다는 행동 자체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고 컴퓨터 모니터로 보던 책 표지를 실물로 느끼게 되니 얼떨떨하기까지 하다. 알라딘 서재에서 자주 봤던 <애도하는 사람>의 두께에 놀라고 김별아라는 작가가 <미실>의 작가였는데 에세이를 냈다는 사실에도 놀란다. 이미지의 재현에 인이 박히다 보니 오히려 현실 세계가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젊은 남녀들이 많았다. 서점은 나에게는 언제나 왠지 에로틱하다. 사랑이 시작되고 사랑이 발전될 것만 같다. <연애시대>의 여운 때문인가. 평소 좋아하는 감우성이 대형서점 직원으로 나왔던 드라마. 동창회에선가. 첫사랑과 재회하고 다시 만나기로 한 날 아침부터 하늘로 솟아오를 듯 통통거리며 비밀스러운 웃음을 칠칠맞게 흘리고 다니던 그 서점. 그 설렘의 미숙한 노출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이해되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이 시작되려는 지점. 누구나 칠칠맞게 그 비밀을 흘리고 다니게 마련이다. 좋아 죽겠는데 어쩌겠는가. 나는 낯선 사람한테도 막 자랑하고 싶었었는데 말이다.



 

순오기님 서재에서 본 혼마 야스코의 <덕혜옹주>의 꽃분홍 표지가 연연했다. 잠시 망설이다 집어들게 되었다. 소설은 취향이나 상황의 망에 걸린 망설임을 동반하지만 그 소설에 영감과 골격을 제공한 역사적 사실의 보고는 소장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고 합리화하며. 일본 사람이 쓴 일본에 끌려가다시피 한 우리나라 마지막 황녀의 얘기는 어떨까? 날것 그대로일까? 나름의 시선으로 윤색되고 말아버렸을까. 베스트셀러 코너에 있었다.

 

옆지기는 비싼 책을 조른다. 인터넷으로 할인받고 적립금 받아 주문해주겠다고 꼬셔 봤지만 사고 싶을 때 사야 한다고 해서. 그리고 관심있었던 책이기도 해서 둘이 읽는다고 합리화 하며 또 구입. 

평소 존경하던 함세웅 신부님이 보수단체에 의하여 반국가 인사로 지명된 상황과 그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고문으로 처음 박종철 변호사를 맞았다는 사실이 묘하게 맞물린다. 차례가 돌아오면 찬찬히 읽어봐야겠다. 

아이는 예외없이 뽀로로 책을 골랐다. 자장가 몇 곡 녹음되어 있는 책인데 참 비싸더라. 언제쯤 뽀로로 얼음나라에서 빠져나올지 궁금하다. 뽀로로가 팔할은 아이를 키웠다.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일요일 밤에 서점에 가곤 한다,고 쓰고 싶어진다. 힘들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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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0-04-05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삼성을 생각한다>는 오프에서 사기 왠지 아깝다. 그죠? ㅎㅎ 예전에 광화문 근처에서 회사 다닐때는 막 한 번 가면 쇼핑백 두개 바리바리 들고 오곤 했어요. 요즘은 바로드림도 한 두권씩 사는 정도지만요.

<애도하는 사람>의 두께는 ... 편집이 널널해서 두껍지만, 많은 분량은 아니에요. 요즘 문동의 책이 한페이지 21줄이 많더라구요. 예전엔 23줄도 적게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 21줄이면, 정말 페이지가 후딱후딱 넘어가요.

blanca 2010-04-05 22:34   좋아요 0 | URL
이만 원 넘는 책은 부담스러워요^^;; 그런데 요즘 책값들이 기본적으로 만오천원선으로 가고 있더라구요. 바로드림 서비스는 하이드님 통해 알게 되었지요.

문동이 비교적 여백이 많고 열린책이 하이드님 말씀처럼 빽뺵한 편집으로 가더라구요.

마녀고양이 2010-04-06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서점가기 너무 좋아합니다. 솔직히 서점에 누군가와 가서 즐거웠던 적이 별로 없었던 듯해여. 저만 즐거워서 이거저거 만지작대고, 푹 빠져서 어슬렁거리고, 다른 사람들은 지루해하는 듯 하고. 딸아이는 먼저 책을 사줘서, 교보문고 아동코너 안쪽 좌석에 앉아있도록 하고 돌아다니곤 했습니다.

아가야가 뽀로로 볼 나이가 되었나봐요? 귀엽겠어요. 울 딸두 뽀로로에 한때 미쳐있었더랬죠. 그담에는 캐릭캐릭 체인지에.. 지금은.. 리젠드 작가의 만화에 홀랑 빠져있더라구요... ^^ 조금 더크면 따님과 잠실 삼성 어린이 박물관(? 제목이 정확하지 않네요)에 가보셔요... 재미납니다~

blanca 2010-04-06 18:58   좋아요 0 | URL
하루종일 뽀로로의 세계에 빠져 산답니다. 아, 그 정도로 키우면 서점 나들이가 우아할 수 있겠어요. 안그래도 삼성 박물관 가보고 싶었는데 욕심납니다. 글구 서점나들이 저도 누구랑 가서 즐겁게 한 기억은 없는 것 같아요.--;;

기억의집 2010-04-08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서점 아이들하고 많이 다녔어요. 그림책코너에 가서 책도 읽어주고...인터넷 서점에서 사면 휠 쌀텐데 기어이 오프에서 산다고 해서 눈물을 머믐고 제 값 다 내고 애들 그림책을 사 오곤 했지요. 아이하고 많이 다니세요, 블랑카님. 저는 애들하고 있는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서점이나 야외에 많이 나갔었거든요. 지금도 징그럽게 많이도 붙어있긴 하지요~~~ 어제는 이마트 가는 길에 딸애가 엄마, 우리 저런 곳에서 낙엽 주워서 엄마한테 내가 뿌렸지? 그러더라구요. 너, 그거 기억나? 물었더니 기억난다고 배시시 웃는데, 정말 이뻤어요^^

애도하는 사람, 혹 집에 암으로 투병하신 분 있으세요? 있으시다면 절대 읽지 마세요. 후유증이 대단해요. 저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가 너무 힘들었던 책이에요. 많이 울었구요. 작가 자신이 많은 환자들과 가족들을 만난 것이 아닐까 싶더라구요. 진짜 리얼하게 묘사했어요. 지금도 후유증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중!

삼성을 생각하다, 저도 읽어보려고 맘은 먹고 있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아 주문할 때마다 제동이 걸리는 거 있죠. 부군 말씀이 옳아요. 사려고 맘 먹을 때 사는 게, 정답이더라구요^^ 그래도 우린 아까워 하죠?

blanca 2010-04-08 14:11   좋아요 0 | URL
아....구구절절이 맞는 얘기입니다. 애도하는 사람은 기억의집님 얘기를 들으니 무서워지네요. 요즘은 슬픈게 무서워요. 삼성을 생각하다,는 책값을 뽑아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읽어볼 참입니다.^^;; 요즘 책값들이 너무 올라서 두 권 사면 삼만원이 넘더라구요. 요즘 책을 사는 욕구와 싸우는 중입니다. 한 달 오만원 꼭 지킬랍니다, 불끈!
 

이 책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책 속의 문장들이 바깥으로 튀어나와 그 속의 장면들을 쏟아내어 도저히 책장을 덮을 수 없었던 경험은 단 한 번 뿐이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 같다. 

열 다섯 살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상상과 꿈과 기대와 소망이 현실 전체를 장악할 수도 있는 그 거대한 가능성과 몽환으로 엮인 시간들을 복기할 수는 있지만 완전하게 복원할 수는 없다.  

그 때는 열 다섯 살이었고 겨울 밤이었고 모든 시험이 끝난 그런 때였다. 다사로운 훈김 속 나는 요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이광수의 <단종애사> 첫 장을 아마 저녁 아홉 시쯤 펴들었을 게다. 새벽 네 시 춘원의 건조한 문장들이 아무린 마무리는 가혹했다. 그저 단종의 죽음에 관한 정경 묘사. 그리고 날짜. 그 어떤 감정의 덧붙임이나 애도의 감침질 없이 춘원은 그 처절한 역사적 사실 가운데 나를 내려놓고 쓰윽 가버렸다. 나는 잠들 수 없었다. 열일곱 살 삼촌의 손에 죽임당한 세종의 손자이자 문종의 아들. 그리고 그를 위해 죽어간 그 수많은 사람들. 

 

선왕의 유지를 받들고 성리학의 명분을 수호하고자 했던 신하들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용인해 낼 수 없었다. 당시 명분과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위해 목숨까지 의연히 내던질 수 있었던 그들의 용기에 경도되었다. 십 대는 그런 나이였다. 현실의 이해 관계와 실리에 무게중심이 옮아가면서 수양대군을 이해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은 일종의 순응이자 세상에 대한 비애어린 묵인이었다. 나의 이십 대, 사육신의 명분은 투실투실한 속살을 못보고 바스라져 가는 껍질만을 주워담으려는 어리석은 자기기만으로 변질되어 인식되었다.  

그러나 삼십 대, 사육신과 단종에 대한 이해는 다시 열 다섯 살 그 시점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가치와 명분의 수호가 현실 이해에 영합하여 도리를 저버리는 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결단과 노력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데에 대한 깨달음 뿐만 아니라,정치라는 것이 자신의 권력욕이나 현실의 이해관계와 부합하는 지점에 과도한 방점을 내리찍게 될 때 어떤 폐해를 가져오는 지에 대한 체감때문이었다. 

 

역사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현실적 이해가 아니라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한 삶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덕일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중

김종서는 <단종애사>에서 수양대군의 심복이 휘두르는 철퇴에 맞아 비명횡사하는 것으로 짤막하게 언급된다. 이 때 그의 나이 70세로 태종, 세종, 문종, 단종 네 임금을 섬기여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며 북방을 개척한 대호이자, 아내의 장사도 미처 다 치르지 못하고 몽골군의 침략에 맞서 평안도로 떠났던 그가 선왕의 유지를 받들고자 했던 것, 헌정질서에 반하는 일련의 일들을 용인해 낼 수 없었다는 것만으로 수양대군의 가동이 내리친 철퇴로 머리를 맞아야 했던 것이다. 피투성이가 되어 아비를 지키려 했던 아들 김승규도 죽임을 당한다.  남은 가족들중 남자들은 대부분 죽고 여자들은 관로로 전락하거나 심지어 수양대군의 쿠데타의 공신들의 처첩으로 전락하기까지 하며 무려 293년이 지난 뒤에서야 공식적으로 신원된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무신의 호연한 기개가 절로 일성을 내지를 것만 같은 이 시 한 수는 김종서의 현신 같다. 하지만 그는 원래 문신 출신이다. 또한 의외로 단신으로 체수도 왜소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그가 세종대왕의 진취적 기상과 절대적 신뢰를 등에 업고 노구를 이끌고 북방에 부임하여 4군 6진을 개쳑하는 과정은 하나의 드라마 같다. 당시로서도 함길도 같은 북방 지역은 관리들이 부임하기를 꺼리는 오지였다. 백성들마저 이주를 꺼리는 지역을 개척하여 두만강 이북 공험진까지 국경을 확장하여 국경선을 확정하고 백성들의 삶의 근거지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을 듣는 것은 더없이 가슴벅찬 일이었다. 추상적인 역사적 사실들이 구체화되어 스며드는 일은 나의 존재의 핵에 다가가는 일이라 감미롭고도 가슴뭉클하다.  

그러나 이런 김종서의 욱일승천하던 기세도 결국은 그를 알아주고 백성과 국가를 귀히 알았던 명군주 세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세종의 죽음과 문종의 단명에 뒤따른 어린 단종의 등극, 수양대군의 왕위찬탈로 이어지는 일련의 비극은 그와 더불어 그의 후손들까지 처절하고 곤구한 삶으로 내몰게 된다.  

세조가 피의 숙청을 단행하며 등극하며 불거진 문제는 그가 백성을 위한 치세를 펴는 것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하여 실리 그 자체의 기반도 빈약하게 만든다. 즉 그의 비정상적인 왕위 찬탈에 직간접으로 도움을 준 수많은 공신들을 책봉하고 그들에게 권력과 물질적 포상을 해야 했던 것은 끝끝내 그의 발목을 붙잡고 왕위를 계승한 후손들도 제대로 된 정책을 펼치는 데 두고두고 장애물로 작용했던 것이다. 세조가 국가 권력을 공신집단의 사적 이익실현의 도구로 전락시켰다는 저자의 지적은 국가 권력이 제대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뼈아픈 계도의 지침이 될 것이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둘째이며, 군왕은 그보다 가벼운 것"이라 했던 김종서의 웅변을 머금고 도덕적 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삶 자체를 바친 잊혀져간  그들을 마음으로 다시 신원하며 나의 삶에도 지킬 만한 마땅한 가치 하나를 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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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4-06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제목이 맘에 듭니다. 잃어버린 가치를 위하여.
처절할만큼 살아남으려 노력하는 주인공, 신념을 위하여 초개같이 목숨을 버리는 주인공.. 이도 저도 아니고 방황하며 납작 엎드려서 사는 나.. 진화학적으로 본다면, 제가 후손을 남길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요? ㅎㅎ

blanca 2010-04-06 18:56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저도 엎드려 삽니다.
 

 

그러나 막상 계집아이 입에다 미음을 넣어 주자 그만 구멍 난 볼때기로 주루룩 흘러 버려, 아이의 어미를 다시 한번 대성 통곡하게 하였다. 넣는 대로 흐르는 미음을 어미는 손바닥으로 쓸어 담아 잇바디 드러난 뺨 구멍으로 밀어 넣어 주다가, 아예 틀어막고 앉아 "먹어라아.......먹고 가아......이놈의 새끼야......내 새끼야, 먹고 가아, 아이고, 아이고오, 내 새끼." 산발을 하여 부르짖는다.                                                                                                                      - 최명희 <혼불> 중 

어떻게든 먹고 살아보려고 혹한을 뚫고 배를 곯으며 북만주까지 걷고 또 걸어 온 가족. 마침내 또다른 곤궁한 삶이 예비된 그 곳에 이르렀지만 어린 딸내미는 동상과 천연두로 얼굴이 썩어 들어간다. 가난하고 무지한 아비는 그런 딸내미의 그 볼을 가위로 싹둑 잘라내고 열에 들떠 죽어가는 어린 딸에게 마지막으로 미음이라도 먹여 떠나 보내려고 어미는 산발을 하고 절규한다. 어미의 마음은 그런 것이다. 

시인 윤동주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죽어 돌아왔을 때 의외로 그의 모친은 슬픔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빨랫감 속에서 그의 셔츠가 나오자 그녀는 산비탈에서 몇 번이고 몸을 굴러내리며 절규한다. 가슴을 치며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어도 내 몸과 피를 나누어 만든 또 다른 작은 나의 죽음은 감내할 수가 없다. 내가 내 몸을 풀어 헤치고 내 안의 내장을 다 끄집어 내어도 그 슬픔과 그럼에도 내가 살아 있음에 대한 그 끔찍스러움은 가실 길이 없다. 자식의 죽음은 견디면서 사는 것이지 망각하거나 화해할 수 없다. 

엄마가 몹시 아팠을 때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해두라고 했을 때 외할머니는 어린 손녀들 앞에서 몸부림쳤다.
"생떼 같은 내자슥! 생떼 같은 내 자슥! 내 자슥아! 자슥아!" 당신의 절규하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한 삽화로 남아 있다.
내리사랑이라고 나는 그 때 그렇게 이성을 잃고 펄펄 뛰는 할머니의 모습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지병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종이조각처럼 쪼그라들어버린 지금의 할머니 앞에서 과거의 그 포효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마치 열에 들뜬 듯 이 방 저 방을 다니며 울부짖었던 그 모습은 열 달을 품고 몸 전체를 분해시킬 것 같은 진통 속에
그렇게 세상에 내어놓고 가정을 이루어 솔가시켜 놓고도 새끼와 묶은 그 끈질긴 공생의 끈을 놓지 못함이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 것이다. 아니 죽고 나서도 이 세상에 내가 뼈와 살을 발라 주어 내보낸 자식의 안녕을
어찌 걸려하지 않을 수 있을까. 

차가운 물에서 삽십대, 사십대를 누려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지나 않을까 마음이 저린다.
그들의 어미들은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운 기다림을 견디고 있을까.
그 기다림의 끝에 제발 안도와 기쁨의 웃음이 걸리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원한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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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3-29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지 요즘 천안호 침몰 뉴스 접하면서 열불이 납니다.
어찌 저 따위로 구조작업을 하는지... 지들 자식이 그 속에 갇혔으면 저 따위로 할까 싶어 화가 나요.ㅜㅜ

blanca 2010-03-29 16:41   좋아요 0 | URL
아...정말 슬픈 소식이 너무 많이 들려요. 최진영씨도 그렇고 생존자 소식도 없고...가슴이 너무 아파요...

프레이야 2010-03-29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사 위치를 잡았다고 하죠.
제발제발 구조작업이 잘 이뤄지길 기도합니다.
얼마나 애가 탈까, 감히 입 밖에 내지도 못하겠어요.

blanca 2010-03-29 16:4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산다는게 참 날 위에서 하루하루 연명하는 것이나 아닌지 그런 느낌까지 듭니다.

꿈꾸는섬 2010-03-29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떼깥은 내 자슥......정말 그렇죠. 내 속으로 난 자식이니 그 아픔을 이루 말할 수 없을거에요.ㅠ.ㅠ
구조작업이 잘 이뤄져야할텐데 말이죠.

blanca 2010-03-29 21:13   좋아요 0 | URL
지금 보니 가망이 없는 쪽으로 기울고 있네요...너무 우울한 소식들로 가득한 하루입니다.

기억의집 2010-04-01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식의 죽음은 망각할 수도 화해할 수도 없죠. 제가 새끼를 기르다보니 예전에 몰랐는데 어린 자식이 아니 청춘의 자식이 죽었을 때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의 동네에 한 할머니중에서 거의 매일 술 드시는 분이 계신데 그분이 아들을 군대에서 잃었어요. 제대 가까울 때 트럭에 치였다고 하더라구요. 그 이 후로 술로 의지하면 세월을 보내시다가 손주 태어나니깐 좀 나아지시더라구요.
지금 정부가 하는 짓보면 참 용서 못하겠지요. 오늘은 속보로 북한이 했다고 하던데요. 아, 정말 눈물겨워요. 시나리오 만드느냐고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죽은 장병들의 부모한테 또 한번의 못을 박네요.

blanca 2010-04-01 22:32   좋아요 0 | URL
방금 아이를 재우면서도 참 슬프고 화가 나더라구요. 다 큰 청년들에게도 이렇게 자장가를 불러주며 안고 어루만지고 재우고 했던 아기시절의 기억이 담겨 있고 누군가에게는 또 그런 아빠이기도 한 그 사람들이 이런 죽음을 당하고 그냥 하나의 재난으로 잊혀져 갈 거라는 생각에. 진짜 안좋은 머리로 나름대로 고도의 시나리오 짠다고 욕본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디에......어디에 있소......
효원은 등을 구부리고 기도하듯 강실이를 부른다.
그 온 몸에 눈물이 차오른다. 
-<혼불> 10권 마지막 대목

여기. 바로 여기에서 작가의 못다한 얘기들과 아직도 들어야 할, 듣고 싶은 얘기들은 미완의 마침표를 찍는다.
미처 끝나지 않은 해원의 굿마당, 그 적요의 휘장을 걷고 나오는 길. 정령을 머금고 있는 말의 마력을 직시하고
그것을 조심스레 휘두른 작가가 숨결을 불어넣은 그 수많은 인물들이 지금이라도 누런 책의 표지를 뚫고
두레두레 앉아 두세두세 맛깔스런 저마다의 사연을 풀어낼 것 같은 환각에 사로잡힌 나는 그 책들을 함부로 할 수 없다.
물건의 무서움. 혼을 건네서 묻히고 심는 것이라 했던 작가의 말은 그녀가 자신의 온 몸을 조금씩 덜어내어 쓴 이 책으로 
체화되었다. 나는 그래서 <혼불>이라는 이 책을 무감하게 둘러볼 수 없고 어쩌면 조금은 두려운 경외의 심정에 사로잡혀
살아 생전 작가의 삶을 먹고 자란 이 책의 날숨에 아득하게 취할 수밖에 없다. 책이 살아 있는 그 느낌 속에 오련한 황색 표지 위에 임리하게 떠오른 <혼불>이라는 거친 표제가 애써 누르고 있는 그 수많은 이들의 혼과 삶은 어떻게든 비어져 나오려고 버둥거린다.  

  

 편하게 앉아 그저 책장을 넘겨 보는 것이 미안하다.

작가 김영하가 장편소설을 쓰는 일은 그 시대의 명예시민이 되는 경험이라고 했던 얘기는 <혼불>을 읽는 독자가 되는
일이 그에 못지 않은 경험이었다고 미안스럽게 고백하는 데에 차용할 수 있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전북 매안 이씨  3대 종부를 중심으로 그 문중의 쇠락과 얽혀 거멍굴 상민들의 질곡어린 삶을 엮어낸 이야기들은 당시의 관혼상제, 세시풍속들을 생생하게 복원하고 수많은 민담, 설화를 덧대어 잊혀진 과거의 완벽한 복기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단지 이 작품이 소설로서 끝나지 않고 하나의 전통문화의 보고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완벽에 가까운 고증들과 자료조사가 그 먼지의 더께를 떨어내고 삶의 결 속에 스며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죽어있는 기록의 나열이하였다면 그토록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이 작품의 문화사적 성취에 열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들을 작가가 일으켜 세워 숨결을 덜어넣는 작업은 가만히 앉아 완상하기에 미안할만치 처절한 노력과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혼불 하나면 족하다,고 했다던 작가의 얘기는 그녀가 미혼으로 죽음과 사투를 벌이면서까지 이 작품에 매달렸던 그 결곡한 투신의 가치를 대변한다.   

  

 혼불, 그리고 죽음 

생의 유한성이 삶의 가치를 절하할 것인지 아니면 떠받쳐줄 것인지를 우리같은 범절한 이들은 알 수 없다. 다만 끊임없이 회의하고 그럼에도 다짐하고 앞으로 밀고 나갈 뿐이다. 목숨만큼 화려한 것이 없다는 청암부인의 얘기와 살아 있어 미안하다는 손자 강모의 얘기에서 생 그자체의 응축된 지고의 가치를 걷어낼 수 있지만 최명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죽음의 체를 뚫고 면면히 나아가는 혼에 가 닿는다. 운명하기 전에 저와 더불어 살던 집, 육신을 내버리고 홀연히 떠오른다는 혼불은 지금 여기의 삶에 대한 애정과 집착을 무위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농밀하게 응축시키고 아집과 망집의 상흔을 치유하고 인연의 실오라기에 매달린 사람들에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도 견디어 나갈 수 있는 소롯길을 보여준다.

이 혼과 넋의 이동의 관문의 예인 전통장례절차에 대한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설명을 듣는 일은 죽어있는 고루한 폐해로 폄하되던 각종 의식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내어 그 전아한 속살을 가만히 느껴볼 수 있게 하는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종부 청암부인이 혼인날 입은 장삼 족두리를 수의로 입고 그 때 가지고 온 혼서지를 신발로 신고 저승의 명부로 떠나는 의식에서는 황홀한 슬픔이 배어 나왔다. 고인을 우주의 순환 속으로 아무 걸릴 것 없이 돌려 보내려는 정신의 체화가 초상의 예인 것이다. 

  

 잊혀진, 잃어버린 역사의 복기

또한 마한, 후백제, 조선 왕조 발상지로서의 전주의 재조명은 승자의 칼 끝에 인각 왜곡된 패자의 잊혀진 역사를 낱낱이 복원하고 복기하여 살려내는 일이었다. 투항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여 마침내 산화하여 버린 그네들의 잊혀진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자존감을 일깨우게 된다. 꽃의심, 꽃의 힘, 꽃의 마음을 이고 역사 하나를 등에 지고 오늘도 우리의 숨결을 온전하게 담아내는 땅 위에서 스러져간 그 사연들에 우리는 애잔한 기시감을 느끼며 돌아보게 된다. 잊혀지고 폄하된 어제를 듣는 일은 지워버리고 묻어버리고 마는 우리의 과거 이야기들을 마찬가지로 살려내고 보듬어 주는 일이라 아프면서도 온전히 상처를 들어내어 치료하고 면역을 얻어내는 일로 승화된다.   

  

 눈물어린 신분제도의 질곡 그것이 남긴 숙제

시간으로는 비록 새해가 되어 축시라 하지만 다른 때라면 짐승도 잠이 드는 오밤중에, 기둥에 걸린 등롱의 붉은 불빛을 희미하게 받으며 검은 마당에 웅긋중긋 줄줄이 늘어서서, 사랑채 누마루 제머리 꼭대기보다 더 높은 곳에 덩실하니 나와 앉은 상전 이기채에게, 일제히 엎드리어 절을 하는 종들의 등허리는, 시꺼먼 그림자를 길고 어둡게 드리우고 있었다. -5권 p.32 

새벽 세 시도 안된 그 어둠 속에서 집안의 웃어른을 제쳐 두고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어쩌면 자신보다 어릴 수도 있는 상전을 높은 마루 위에 세워두고 문중의 종들이 일제히 흙바닥에 엎드려 새배를 올리는 그 장면이 눈 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똑같이 세상을 향해 일성을 내지르며 태어났으나 그 배가 어디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숙명적 신분의 틀 안에서 누구는 누구를 동등하고 존중하여 줄 생명체가 아닌 하나의 부속품마냥 수족마냥 부릴 수 있다. 이 공고한 차별의 악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경중의 차이만이 있을 뿐 면면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무엇 때문에 나는 여기에 서서 그들을 부리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그들은 모두 악착을 부리며 내 앞에서 자기의 열심을 보이려 애쓰고 있는 것일까?...' <안나 카레니나> 중 

매안 이씨 문중과 그들에 기생하여 먹고 사는 팔천 동네 거멍굴의 병치는 인간이 만들어 내었지만 결국 그 안에 결박당해 버린 역설이 가지는 중층적 의미에 대한 탐구와 그것이 극복 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모색으로 이어진다. 청암부인의 손자 강모와 사촌 강실 간의의 금기된 사랑이 결국 파국으로 치닫고 강실이 거멍굴 춘복이의 씨를 받게 되는 것과 그의 가시버시를 자처하는 옹구네가 피를 섞어 버리라며 절규하던 그 극단의 증오어린 저항은 하나의 비애로 치부된다. 이 비애가 단순히 감정의 배출과 복수로 마감되지 않고 중화될 수 있었던 지점에는  거멍굴의 상처받은 상민들을 보듬어 안으려 하고 그 옹이와 아집을 풀어버리려 시도했던 대안적인 인물 강모의 사촌형 강호가 있다. 작가는 어둠을 뚫고 나가는 그 지하의 만월 그믐밤의 그 가치를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강호에게 정성스럽게 깎은 화병을 선물하고 돌아서는 백정 택주와 그를 돌아보며 그것을 찬찬히 들여다 보고 그것의 중추적 의미를 가슴에 인각하는 강호의 모습은 상생과 공생의 방증 같다. 

결코 순탄치 않은 시대와 역사, 진부한 인습, 억울한 관념의 편벽이 그대들을 상하게 할지라도, 오히려 저마다 제 몸으로 깎은  화병 하나, 삶의 중심에서 빚어 낸다면, 그 몸에 어리는 무늬들은 이윽고 이 세상에 새로운 풍경을 이루어 드리울 것이니.
-8권 p.252

  

 그리고 혼불이 나에게 남긴 것들

눈빛에 꽃빛은 도장의 인주처럼 선명하게 지문을 찍는다. 그 꽃빛은 사람한테 한 번 묻으면 파고들어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람의 넋을 홀리어 흔들며 사로잡는다.-10권 p.276 

<혼불>은 나에게 꽃빛 같다. 나의 눈빛에 나의 마음빛에 작가는 선명한 지문을 찍고 지하의 만월로 떠오른다. 그 흔적은 영영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나는 온전하게 이것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나는 아직도 거멍굴에서 강실이가 부른 배를 움켜잡고 손톱 밑에 앓는 이름 강모를 부르며 울먹이고 있고 그 옆에는 있지만 그를 온전히 소유할 수 없는 오유끼가 문 앞의 노루발 밑에 웅크리고 앉아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몸으로 맞아내고 있고, 더더군다나 그의 아내지만 그를 증오하며 강실이를 찾아 헤맬 수밖에 없을 아내 효원이 온 몸에 차오르는 눈물을 속수무책으로 닦아내지도 못하고 흘려 보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하고 싶은 얘기. 나도 <혼불>을 닫고 나오며 어둠을 믿게 되었다고. 지상의 만월보다 지하의 만월인 그믐밤 더 몸을 뒤척이며 땅 속에 버리듯이 내 소원의 씨앗들을 뿌리겠다고 다짐하여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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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3-28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님 이렇게나 멋진 페이퍼를요. 추천 20개 누르고 싶어요.
다 읽으셨군요. 손톱밑에 앓는 이름과 그 온몸에 차오르는 눈물,
님의 문장들에 하염없이 빠져들었다 가요.
행복한 일요일 보내세요.^^

blanca 2010-03-28 21:38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덕분에 읽은걸요.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잊고 지내다 프레이야님 페이퍼 보고 다시 마음이 동해서 읽게 된거니까요. 미완의 대하 소설이 가져오는 그 아쉬움과 또 그래서 더 빛나는 마무리가 참 오래 여진을 남기게 될 것 같습니다. 한동안은 오히려 책을 더 읽지 못하게 될 것 같아요.

순오기 2010-03-28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혼불을 읽지 않았기에 감동에 동참할 수 없어 안타깝네요.
그래도 예전에 KBS의 최명희 스페셜을 봤기에 '혼불 하나로 족합니다'의 감동은 알지요.

blanca 2010-03-28 22:06   좋아요 0 | URL
최명희 스페셜 너무 보고 싶은데 다시보기가 정말 콩알만하더라구요.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라 보지 못했어요. 순오기님께 꼭 추천해드리고 싶어요. '아리랑'이랑 시대가 겹쳐서 또 다른 측면에서 읽어 보실 수 있을 것 같아요. 너무 아름다운 소설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03-29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다 읽으셨어요? 와.. 속도 엄청 나시당. 감탄.
'꽃빛은 사람한테 한 번 묻으면 파고들어 지워지지 않는다' 이거 너무 좋은데요.
저한테 묻어있는 꽃빛은 어떤 색일지. 고운 꽃분홍이길 바라지만, 칙칙한 누런색만 아니더라도 만족하렵니다.
저도 읽어야할텐데... 이쁜 리뷰입니다.

blanca 2010-03-29 21:16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진짜 이 책 강추입니다. 다른 책은 읽지도 않고 먼저 덤볐는데 글자도 크고 한 권당 분량이 많지 않아서 열 권이라지만 다른 대하소설보다 되레 더 빨리 읽혀요. 2권까지만 조금 인내심 발휘하면 그 다음부터는 열 권밖에 안된다는 게 게다가 끝도 아니라는게 아주 속이 터진답니다. 그러니가 결말을 모르는 채 가야 된다는게 너무 답답해요. 그리고 마녀고양이님한테는 예쁜 핑크 꽃빛을 묻혀 드리지요. 무척 어울릴 것 같은데요^^

꿈꾸는섬 2010-03-29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과 님의 혼불 페이퍼는 정말 너무 읽게 만드시네요. 저도 부지런히 찾아 읽어야할텐데 요새는 또 책도 잘 읽히네요.ㅜ.ㅜ

blanca 2010-03-29 21:17   좋아요 0 | URL
꿈꾸는 섬님 읽으셔도 후회 없으실 거예요. 중간 중간 좀 지루하고 장황한 대목이 있긴 한데 또 그 부분은 공부도 되더라구요. 책이 안 읽힐 때는 오히려 대하 소설이 나을 때도 있어요. 다만 살림이 좀 뒤로 미뤄져서^^;; 어떤 분이 토지 읽다 살림 작파하셨다는 얘기를 읽은 기억이 나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03-29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불>이나 <토지>를 완독한 사람들...정말 대단해요.이런 책을 읽고 나서는 세상이 달리 보이겠죠.

blanca 2010-03-29 21:19   좋아요 0 | URL
저는 근현대사에 대한 빠삭함을 자랑하는 노자님이 아주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은 사실이랍니다. 조금 더 연민을 가지고 공감을 가지고 사람을 대할 수 있다는 착각을 주지요^^;;

gimssim 2010-04-03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소설에 좋은 리뷰...잘 읽었습니다.
저는 혼불 한권으로 된것...처음에는 한권으로 출간됐지요...읽었는데,
다시 도전해 보고자 마음먹고 있습니다.
삶의 결에 도 많은 충성함을 주겠지요.

blanca 2010-04-03 11:37   좋아요 0 | URL
중전님. 저도 다시 한 번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소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소설을 통해 인생 전체를 관조할 수도 있다는 데에 놀라움을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