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밤 여덟시 반. 즉흥적으로 영풍문고 종로점에 가게 되었다.
대형서점은 가고 또 가도 질리지 않고 언제나 그리운 장소다. 학창시절 시험이 끝나면 나는 언제나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
한 이만 원 정도이면 네 권 정도의 책을 살 수 있었다. 요즘에야 두 권도 벅찬 금액이지만 말이다. 고르고 또 고르다 다리가 아플 때쯤 네 권의 책을 품고 아빠를 기다렸다. 이제는 그 곳에 나의 아이를 데리고 간다.
아기는 통로에만 관심이 있고 뽀로로 책 정도에 눈독을 들인다. 책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이 나 잡아봐라, 이 곳 저 곳으로 날쌔게도 몸을 숨겨주신다. 이 정도면 서점은 더이상 나에게 아름다운 장소가 아니라 곤욕스러운 곳이 되고 만다. 그래도 그 와중에 민음사 전집 코너를 둘러본다. 항상 인터넷으로만 봐 오던 책 표지가 실물로 치환되니 되레 적응이 안된다. 인터넷으로만 책을 구입하다 보니 실물을 보고 고른다는 행동 자체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고 컴퓨터 모니터로 보던 책 표지를 실물로 느끼게 되니 얼떨떨하기까지 하다. 알라딘 서재에서 자주 봤던 <애도하는 사람>의 두께에 놀라고 김별아라는 작가가 <미실>의 작가였는데 에세이를 냈다는 사실에도 놀란다. 이미지의 재현에 인이 박히다 보니 오히려 현실 세계가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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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남녀들이 많았다. 서점은 나에게는 언제나 왠지 에로틱하다. 사랑이 시작되고 사랑이 발전될 것만 같다. <연애시대>의 여운 때문인가. 평소 좋아하는 감우성이 대형서점 직원으로 나왔던 드라마. 동창회에선가. 첫사랑과 재회하고 다시 만나기로 한 날 아침부터 하늘로 솟아오를 듯 통통거리며 비밀스러운 웃음을 칠칠맞게 흘리고 다니던 그 서점. 그 설렘의 미숙한 노출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이해되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이 시작되려는 지점. 누구나 칠칠맞게 그 비밀을 흘리고 다니게 마련이다. 좋아 죽겠는데 어쩌겠는가. 나는 낯선 사람한테도 막 자랑하고 싶었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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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님 서재에서 본 혼마 야스코의 <덕혜옹주>의 꽃분홍 표지가 연연했다. 잠시 망설이다 집어들게 되었다. 소설은 취향이나 상황의 망에 걸린 망설임을 동반하지만 그 소설에 영감과 골격을 제공한 역사적 사실의 보고는 소장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고 합리화하며. 일본 사람이 쓴 일본에 끌려가다시피 한 우리나라 마지막 황녀의 얘기는 어떨까? 날것 그대로일까? 나름의 시선으로 윤색되고 말아버렸을까. 베스트셀러 코너에 있었다.
옆지기는 비싼 책을 조른다. 인터넷으로 할인받고 적립금 받아 주문해주겠다고 꼬셔 봤지만 사고 싶을 때 사야 한다고 해서. 그리고 관심있었던 책이기도 해서 둘이 읽는다고 합리화 하며 또 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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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존경하던 함세웅 신부님이 보수단체에 의하여 반국가 인사로 지명된 상황과 그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고문으로 처음 박종철 변호사를 맞았다는 사실이 묘하게 맞물린다. 차례가 돌아오면 찬찬히 읽어봐야겠다.
아이는 예외없이 뽀로로 책을 골랐다. 자장가 몇 곡 녹음되어 있는 책인데 참 비싸더라. 언제쯤 뽀로로 얼음나라에서 빠져나올지 궁금하다. 뽀로로가 팔할은 아이를 키웠다.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일요일 밤에 서점에 가곤 한다,고 쓰고 싶어진다. 힘들 것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