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27일 화요일, 지금, 여기에 나는 또 있다. 하지만 2055년 1월 27일에도 여전히 여기에 또 이렇게 있을 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때 런던은 풀이 웃자란 오솔길일 것이고, 이 수요일 아침 인도를 따라 질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결혼반지를 낀 뼈다귀와 금이빨밖에 남지 않은 채, 먼지에 덮여 있으리라.

-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중

 

 

 

 

 

 

 

 

 

 

 

 

 

 

 

 

 

일단 지금 내가 해야 할 자질구레한 일들이 산적해 있고, 내가 듣고 말해야 할 관계들, 아직 욕심내고 때로는 질투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는 마당에 정작 '내'가 사라지고도 남을 것들의 그 굳건함에 시선을 돌리기란 쉽지 않다.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내고 때로 절망하고 그럼에도 영원하지 않음이 때로 위안이 되기도 하면서 그렇게 오늘은 또 어제가 되고 내일은 끊임없이 오늘이 되며  시간 앞에 무력하게 침몰된다.

 

과거, 현재, 미래를 온전하게 좀 내려다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그나마 이야기를 읽을 때이다. 주인공들은 시간에 지고 때로는 시간을 이기면서 삶을 사는 정경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나도 안 그럴 리가 없다. 오십 대의 댈러웨이 부인의 눈으로 생생하게 그려지는 런던 풍경이 이윽고 곧 간곳 없이 허무하게 스러져 버릴 것이라는 것에 대한 언질은 버지니아 울프였기에 가능했다. 그녀는 줄곧 모든 생생함이 유한성 안에서 더욱 빛을 발함을 유한성 앞에 결국 굴복할 것임을 일깨운다. 그 자신이 시간 앞에서 죽음 앞에 삶이 속박되는 것을 못견딘 탓인지 그녀는 스스로 시간의 종결, 삶의 마침표로 걸어들어가며 자신의 삶으로 마지막 텍스트를, 마지막 조언을 남긴다.

 

이십 대를 눈부시게 긋고 지나갔던 수많은 과거의 노래들을 이제는 나이들어버린 가수들이 재현하는 모습에 언어로는 설명하기 힘든 절절한 막막함을 느꼈다. 그것은 언제든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나뿐만 아니라 조금은 건조해 보이는 사람들도 그 시대에 청춘을 맛보았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애절해했다. 결국은 '시간' 앞에 모든 것들이 무력화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인식과 지각의 틈새에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것들이 온전하게 남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김연수가 어느 포탈의 서재에서 권한 책. 소설가가 권하는 소설이 아닌 책은 언제나 주의를 끈다. '무경계'라니. 게다가 저자는 겨우 이십 대 중반에 존재와 생과 삶의 근원적 의미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행했다. 모든 궁금했던 것들이 모든 애매했던 것들이 이 얼마 안되는 책 안에 다 담겨 있었다. '내'가 '나'를 수많은 경계의 철책으로 얼마나 재단하고 속박하고 승산없는 전투를 했는 지에 대한 깨달음. 우리가 무심코 생각하고 끄달리는 모든 것들이 저도 모르게 어떤 경계와의 전투의 전장에 있었다는 것. 이것은 여든을 넘고 삶을 다 살아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아닌 인식과 지각의 지평이 넓어질 때 돌연 만개하는 듯한 내면의 확대와 심화의 정경이다. 도교, 불교, 기독교, 힌두교, 프로이트, 융의 이야기와 사상들은 더이상 대립하지 않고 한데 어우러져 과거와 미래라는 환상 속에 현재를 끊임없이 소모하는 인간에 대한 진지한 통찰과 따뜻한 연민으로 화해한다.

 

백 년 전에는 아마도 다른 남자가 바로 이 자리에 앉아 당신과 마찬가지로 빙하 위로 스러져 가는 빛을 경외심과 동경심을 갖고 바라보았을 것이다.-p.227

 

저자는 언어조차도 실재의 지도에 불과하다며 경계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문학적인 문장으로 자신의 앎을 전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전체, 합일의 개념에 대한 이상이 지나친 신비주의로 흘러가지 않도록 절제하는 그 균형감도.

 

수만번 고쳐살고 싶은 지점이 있다. 수만번 돌아가는 대목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살아있음' 그 자체에 탐닉했던 댈러웨이 부인보다 훨씬 못한 것이다.

 

<무경계>의 켄 윌버가 인용한 양자역학의 창시자인 에르빈 슈뢰딩거의 말을 재인용한다.

 

" <중략>영원히 그리고 언제나, 오직 하나이며 동일한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한다.

현재만이 유일하게 끝없이 영원한 것이다."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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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1-27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수 소설가가 무경계 추천했을 때... 그 시대 20대는 누구나 한번쯤 <정신세계사>의 도움을 받았겠구나 싶었던...어제도 헌책방 가서 정신세계사와 류시화 책들을 발견하며...

blanca 2015-01-27 17:50   좋아요 0 | URL
아. 시대적인 분위기가 있었군요. 저는 사실 이 책 추천이 좀 뜬금없다, 여겼는데 읽어보니 시야가 탁 트이는 느낌이 시원했어요.

AgalmA 2015-01-28 02:51   좋아요 0 | URL
김연수 작가 안목은 믿지만 기존 리뷰 반응이 좋지 않아 갸웃했는데 blanca님 리뷰가 독자들에게 도움될 듯 하네요. 워낙 이런 사유의 책은 모냐, 도냐 식으로 취향을 많이 타다보니...
 

 

때는 1995년 3월 20일, 월요일. 활짝 갠 초봄의 아침. 아직 바람이 차가워 오가는 행인들은 모두 코트를 입고 있다. 어제는 일요일, 내일은 춘분 휴일, 즉 연휴 한가운데다. 어떤 사람은 '오늘은 그냥 쉬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여러 사정상 당신은 쉴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신은 여느 때처럼 아침에 눈을 뜨고 세수를 한 다음, 아침을 먹고 옷을 입고 역으로 간다. 그리고 늘 그렇듯 붐비는 전차를 타고 회사로 향한다. 여느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딱히 다른 날과 구분할 필요도 없는 당신의 인생 속 하루에 지나지 않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언더그라운드> 머리말 중

 

 

 

 

 

 

일상이 그리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배워가는 것이 나이듦일 수도 있다. 살다 보면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남의 일', 때로는 '나의 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직전까지도 영원히 살 것처럼 일하고 미워하고 욕망한다.

 

이윽고 회사 출근을 위해 지하철에 올라탄 사람들은 거의 압사당할 것 같은 지옥철의 사람의 밀도에 헉헉대며 전날의 휴식의 아쉬움을, 지금 당장의 불쾌함을,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일들을 생각하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목격하고 어떤 사람은 미처 자신의 시야를 어둡게 하고 욕지기를 치밀어 오르게 하는 것의 실체도 모르는 체 무방비로 당한다. 그럼에도 그 날 그 지하철을 탔던 시민들 대다수는 자신들의 몸이 무언가 알 수 없는 물질에 의해 교란당하고 있음을 자각하기도 하고 자각하지 못하기도 하면서 기어서라도 회사로 출근하려고 했다고 한다. 하루키의 이야기다. 몸이 괴롭고 도저히 컨디션이 살아나지 않는데도 관성처럼 다들 비틀거리며 회사로 향했다. 자신이 무엇에 의해 왜 이렇게 되었는 지에 대한 자각과 고민은 대부분 없었다.

 

1995년은 우리나라에도 대형 참사가 일어났던 해이다. 강남 한복판 견고하게 서 있던 백화점은 허술하고 빈약한 껍질처럼 와르르 무너지고 그 속에 품었던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죽고 다쳤다. 결코 움직여서도 움직일 것 같지도 않았던 건물이 노쇠한 노인처럼 예고도 없이 자멸하는 모습은 그것을 만들고 그 속에서 소비하고 살았던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근처 일본에서는 고베 대지진과 지하철 사린 가스 살포 사건이 일어났다. 옴진리교라는 컬트적 색채를 띠는 종교의 교주의 지령 아래 붐비는 통근 시간 지하철 안에 치명적인 독가스가 살포되어 무고한 시민들이 다치고 피해를 입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외국에 있다 귀국해 있던 시점이었다. 그는 이 날 지하철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익명화 속에 침몰되어 매스컴에서 무람없이 살포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는 피해자들의 이야기들을 듣고 그들의 이름을 그들의 개별적인 삶들을 건져내고 싶었다. 다만 그것은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것이어야지, 그 어떤 부담감이나 타의에 의한 것이어서는 안 되었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는 대신 그들의 삶 속으로 1년 남짓 걸어들어갔고 그것의 집적물을 가지고 걸어 나왔다.

 

어디에서 태어나고 어떤 첫인상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삶의 여정을 걸어왔는 지가 이야기되고 나면 그들은 어김없이 3월 20일 사린 가스가 살포된 그 지하철에 올라탄다. 때로는 3분 먼저 집앞에 온 버스 덕택에 타지 않아도 됐을 그 지하철에 타는 불운에 처하기도 했다. 근무교대가 끝나고 지원을 나온 덕에 사린 가스를 마신 역무원도 있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스를 들이마시고 비틀거리면서도 그들은 그게 어떤 고의적인 악의에서 나온 독가스이고 빨리 병원으로 가서 해독제를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쓰러져 바라보는 '저쪽 길'의 사람들은 여느 때처럼 바쁘게 출근길을 가고 있었다. 회사에 가서야 비로소 뉴스를 보고 자신이 사린 가스를 마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처치에 들어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내가 출산을 앞둔 에이지라는 사람은 아내와 딸,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두고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한 채 출근길에 짧은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하루키 앞에서 아내는 그를 처음 만나던 날, 사랑에 빠졌던 시간들을 이야기한다. 다시 돌아와 그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 모든 참사와 비극이 타자와 되는 것에 대하여 그녀는 한탄한다. 부지런하고 효녀였던 여동생이 식물인간이 되었다 힘겨운 자활을 하는 여정에 동참한 오빠는 여동생 대신 여동생이 항상 써왔던 일기를 대신 쓴다. 하루키는 아직 회복되지 않아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녀를 만나 그녀의 손을 잡는다.

 

이들의 이야기는 서로의 기억들의 교차로 부정합이다. 기억은 완벽한 사실들의 집적이 아니다. 하지만 하루키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이러한 집합적 이야기 속에 내재된 팩트를 뛰어넘는 진실에 주목한다. 지하철 사린 사건의 피해자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그는 사린 사건의 피해도 개개인이 살아온 내력과 상처를 처리하는 패턴에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개별의 이야기들을 취합하는 과정에서 역시 하루키는 이러한 예고되지 않은 대형 재난에 대처하는 구조 시스템이 얼마나 허술한 지 그리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기적들이 얼마나 개개인의 개별적인 선의와 구조 의지에 기대는 지를 발견한다.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루키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이러한 것에 멈추지 않는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어떤 제도=시스템에 인격의 일부를 맡기고 있지는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제도는 언젠가 당신을 향해 어떤 '광기'를 요구하지 않을까? 당신의 '자율적 파워 프로세스'는 올바른 내적 합의점에 도달해 있는가?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이야기는 정말로 당신의 이야기일까? 당신이 꾸고 있는 꿈은 정말로 당신 자신의 꿈일까? 그것은 언제 어떤 악몽으로 변해버릴지 모르는 누군가의 꿈이 아닐까?

-p.712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어떤 선의와 대의를 위해 헌신해야 할 것 같은 종교 집단이 비록 그것이 약간의 컬트적인 요소가 있는 신흥종교일지라도 대다수의 무고한 시민들을 살상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독가스를 살포하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일일 것이다. 하루키의 시선은 이제 '저쪽'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대를 더듬는 것으로 나아가려 한다. 혐오스럽고 괴이한 '저쪽'을 균질하고 단일하게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자발적으로 '저쪽'으로 걸어들어간 사람들도 익명성에서 구출해내어 '이쪽'을 비추는 거울상으로 면밀히 들여다보려 했다. '저쪽' 사람들도 한때 분명 '이쪽'에서 '우리들'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옴진리교 신도이거나 한때 그 종교에 귀의했던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성실하고 진지한 청취자의 자세를 견지하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조금 더 적극적이고 비판적인 그를 만날 수 있다. 그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 지나치게 왜곡되거나 편중된 지점으로 가려는 그들의 이야기를 적절한 균형추로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보인다. 평범하고 여느 사람들보다 조금 더 진지하거나 더 외로움을 느끼거나 했던 이들은 저마다의 개인적인 고민, 건강 상의 고민들로 우연히 옴진리교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교주 아사하라가 제시한 그 평면적이고 단순한 세계관은 너무나 허술하고 빈약한 실체로 인해 곧 한계를 드러내게 되고 사람들도 그에 대한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옴진리교에 귀의하여 부정합과 모순이 난무한 세계를 등지고 단순하고 평면적이고 명쾌한 지향을 향해 몸과 마음을 맡길 수 있었던 지난 시간을 그들은 후회하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고 사회를 교란시키려 했던 폭력을 걷어내고 남은 정경은 또다른 우리의 못나고 아픈 구석이다. 첨언처럼 덧붙인 하루키와 심리학자 가와이 하야오와의 대담 내용은 우리 인간 내부의 악하고 약하고 못난 구석을 부정하지 않고 직시한다. 그것을 무조건 거부하고 부인할 때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순수와 선으로 포장할 때 악은 기어나와 스스로를 형상화한다. 하루키가 왜 이토록 꾸준히 지하와 그리고 인간 내부의 부정적인 괴물 같은 면에 천착했는 지에 대한 단서가 나오는 대목이다.

 

나는 '나'를 온전히 신뢰하거나 단정짓지 않게 되었다. 물론 상식과 선과 타인에 대한 선의를 기반으로 하루 하루를 살려고 노력은 한다. 하지만 내 자신을 어떤 사건이나 어떤 상황에서 면밀히 들여다 보면 분명 거기에는 부정하고 싶은 내부의 정경이 있다. 그것을 뿌리째 소거해 버릴 수만 있다면 사는 게 얼마나 편하고 단순하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부터 어떤 비극은 시작될 지 모른다. 타인의 그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복합적이고 유동적이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소설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오늘은 자선을 행한 사람이 내일은 극도의 추하고 이기적인 행동에 전전긍긍할 수도 있다. 어느 한 면으로 그 인간을 다 설명, 판단할 수는 없다. 절대적으로 선하고 절대적으로 악하다는 심판을 내리는 지점에 분명 폭력의 맹아가 있다. 하루키는 어떤 판단을 정지하고 명확한 다수의 시점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재료'를 제공하는 데에 집필의 목적을 두었다 한다. 하지만 분명 이 지점은 대단히 웅변적이지만 더 나아가려다 머뭇거리고 만 것만 같아 아쉽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이 지점에서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어떤 판단을 시작하는 것부터가 또다른 폭력과 오만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식과 지각, 판단의 외연은 분명 또다른 어떤 한계 안에 봉착할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지 끊임없이 궁금해 하며 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게 삶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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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1-20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금요일날 돌아와줘> 책이 나온 걸 보고 하루키 <언더 그라운드> 생각을 했거든요. 하루키 책 중에 가장 하루키답지 않은 책이기도 한데, 이 책처럼 그 책도 객관적으로 뭔가를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그 생각을 했어요. 눈물 속에 오기와 미움만으로 맴돌지 않게 말이죠. <약속된 장소에서>는 읽지 않았는데 출판사 의도이든 아니든 하루키는 책임감있게 두 세계의 무너짐들을 대비하여 보여주는 마무리를 하려 했구나 싶군요.
오래전 누군가 대구 지하철 참사에 대한 소설을 쓰려고 했는데 지인들이 그건 아픔을 섣불리 건드리는 것 같다, 유족에게 더 아픔을 주는 일이다 비난조여서... 우리나라는 얼른 덮고 지나가려거나 회피하는 정서가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절망스러웠던 순간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마무리하지 못했던 과거는 되풀이되었고, 세월호 사건을 다시 겪으며 <삼풍>웹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통곡의 댓글을 올렸던가 다시 뼈아픈...
한강 작가 <소년이 온다>도 귀감이 되는 사례겠죠.

blanca 2015-01-20 18:01   좋아요 0 | URL
저도 대구지하철참사가 떠올랐어요. 어쩌면 더 많은 피해와 참혹한 슬픔을 안겨준 사건인데... 아픔을 말하는 순간부터 치유가 시작된다고 한다면 더 안타까운 부분이 있어요. 우리나라 정서로 소설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있다면 하루키 식의 르포는 더욱 힘들것 같아요. 한강 작가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기회가 되면 읽어보고 싶어요..
 

누군가의 삶을 편견 없이 또 어떤 선입견에 기초한 재단 없이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기란 어쩌면 하나의 헛된 기대이자 망상, 무모한 시도로 결론나고 말지도 모른다. 시간의 풍화 속에 바랜 사실 들은 그 자체로 마멸, 퇴색되어 남을 것이고 또 어떤 선후 관계나 전후 상황이 소거되고 남은 것은 중립적이고 객관된 진실이 아니라 얼개가 무너진 쇠락한 잔해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하필 그 누군가가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누구라면, 내가 증오하고 반면교사로 삼고 싶은 이라면, 그의 일생을 내가 복기하는 자체가 그저 그 '누군가'를 빗대어 나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몸짓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를 어떻게든 뚫고 나가려고 하는 그 처절한 노력이 비어져 나올 때 우리는 비로소 수긍할 수 있다. 아니 수긍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시인 안도현이 쓴 백석의 평전이 그러한 한 가지 예가 될 수 있을 것같다. 솔직히 유명한 시인이 줄곧 존경하고 사랑해 왔던 게다가 북한에서 중년과 말년을 보내고 사망한 시인의 삶을 복원하였다 했을 때 어떤 가정,느낌, 감상이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고 오해했다. 하지만 막상 안도현 시인이 백석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하여 백석을 다시 읽는 일환으로 복원해 낸 그의 평생은 최대한 드러난 진실, 그것을 단초로 추측할 수 있는 것들의 망을 벗어나지 않기 위한 노력들이 두드러졌다. 그 틈새에서 빠진 것들에 대한 상상의 몫은 오롯이 우리들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읽기이자, 백석과의 만남의 일환이 될 것같다.

 

 

 

 

 

 

 

 

 

 

 

 

 

 

 

 

 

 

해방 이후 만주에서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로 귀향하는 백석의 행로에서 출발하는 이야기는 이윽고 오산학교 앞에서 하숙을 치며 생활한 부모 밑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는 그의 유년기와 오산학교 시절로 회귀한다. 일본 유학을 거쳐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며 평생의 지기들과 실패하는 첫사랑으로 남게 되는 여인과의 만남 들이 생생하게 시인의 필체로 떠오른다. 군데 군데 삽입되는 그의 시들은 평북 방언들로 처음 대할 때는 어렵게 들리지만 몇 번 되뇌이면 무어라고 언어화하기 힘든 친밀감과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눈과 귀와 마음의 비늘을 벗겨낸다.

 

그러나 무엇보다 백석의 전성기는 함흥의 영생고보 영어 교사 시절인 듯하다. 그때의 모습은 제자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각인되고 추억된다. 올백 머리, 최신식 양복, 50 명의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을 단번에 매치하고 출석을 부르는 놀라운 기억력, 출퇴근을 나귀로 하고 싶어하는 엉뚱하고 낭만적인 모습. 그리고 평생을 그를 그리워하며 여든이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그에 대한 추억, 사랑, 아쉬움을 술회했던 함흥권번 소속의 기생이었던 자야와의 만남. 그녀의 백석과의 로맨스는 그녀와 원고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함께 집필하다시피 한 시인 이동순 교수의 책으로 만날 수 있다.

 

 

 

 

 

 

 

 

 

 

 

 

 

 

시인으로서의 백석의 쇠락은 해방 이후 그가 고향인 북한에 남음으로써 시작되는 듯하다.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그는 예전 같은 아름다운 토속의 방언으로 된 감각적이고 전아한 시들을 더 이상 발표하지 못한다. 대신 아동을 대상으로 한 동시들, 러시아어 문학 작품 등의 번역 등에 매진하다 북한에서 가장 추운 지방의 하나인  삼수의 협동농장에 현지파견을 나가게 된 백석은 몸에 익지 않은 육체 노동을 하며 젊은 시절 영롱한 문학혼이 응축되어 있던 그만의 시어 대신 사회주의 체제에 어느 정도 복무하는 교조적이고 선동적인 시 몇 편을 남긴다. 북에서의 그의 문학은 사실 문학이라기보다는 어떤 생존을 향한 몸짓 같아 안쓰럽다. 죽는 그 날까지 시인의 이름을 잃어버린 그의 생애를 한정된 자료로 추적하며 안도현 시인은 그러나 섣불리 그의 삶이나 문학적 성과를 단정짓지 않는다. 시인의 이름을 잃어버린 자연인으로서의 그의 삶의 의미나 무게에 대하여 말을 아끼는 안도현 시인의 모습은 단정한 말줄임표 같아 와닿는다.

 

백석이 태어나 자라 늙고 죽은 시대는 유달리 개인의 삶을 질곡으로 치닫게 할 우여곡절이 많은 시공간이었다. 많은 작가들이 일본에 협력하거나 이념에 복무하기를 강요받았다. 그가 적극적으로 시대의 격류에 저항하거나 야합한 흔적은 없지만  그 누구보다도 시인의 표현처럼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려 했다. 그를 내리 눌렀던 질곡의 삶도 그 자체도 가고 난 지금, 안도현 시인의 말처럼 "첫눈이 내리는 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은 백석 이후에 이미 죽은 문장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오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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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창고 2015-01-13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빨간책방 듣고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아직 주문못한책이예요
어제 재방으로 듣고 박씨봉방은 검색해서 베껴쓰고 혼자읽어보고 했는데
넘 좋고 쓸쓸하고 슬픈것이 머랄까 이런느낌이 행복한거라고 하려고요

blanca 2015-01-14 15:53   좋아요 0 | URL
아, 이 책이 빨책방에 나왔었군요! 맞아요, 저도 시는 문외한인데 백석시는 방언 때문에 정확하게 의미를 못 알아차려도 그냥 읽는 것만으로도 시란 이런 것이구나, 싶어요.

Nussbaum 2015-01-14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그는 단호하다기 보다는 때론 엉뚱한 구석이 있는 선생님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치만 눈빛은 꽤나 날카롭고 말하는 문장 사이에 나오는 다양한 생각들은 매우 지적인 것이어서 학생들이 그에 대해 받은 인상은 꽤나 강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마침 책장 뒤에 백석 시집이 있길래 펼쳐보았더니 2010년 어느 커피숍에서 읽었는지 커피 영수증이 있네요. 살짝 바랜 종이가 지난 날을 거스릅니다.

이 밤에 통영, 흰 바람벽이 있어, 여우난골족 같은 시를 뒤적이네요.

blanca 2015-01-14 15:55   좋아요 0 | URL
엉뚱하기도 하고 좀 결벽성도 있고 학생들이 꽤나 고생 좀 하게 한 영어 선생님이었다고 하네요.^^ 맞아요, 두고 두고 백석의 수업 시간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더라고요. 아! 저는 백석 시집에서 엉뚱한 채소 이름(장볼 것) 잔뜩 적은 메모 발견했어요 ㅋㅋ
 

2014년이 가고 2015년이 온다. 1996년을 제외한다면 나에게 특별히 기억되는 한 해는 없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난 해를 정확히 기억해 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누군가 2001년을, 혹은 2009년을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시간이란 인위적인 구획으로 가두는 것이 불가능함을 머리로는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가는 해와 오는 해의 경계에서는 머뭇댄다. 정말 2015년이 오고야 만다.

 

서른 살이 되는 나를 1996년에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지만 마흔 살이 되는 나를 2014년에는 현실감 있게 지각한다. 아니 더 나아가 내가 쉰도 심지어 여든도 될 수 있음을 안다. 이제 나는 저지를 수 있는 일들이 점점 줄어드는 나이로 간다.

 

2014년, 아직 추위가 물러나지 않은 아침을 유모차를 굴리며 학부형이 되는 시간들을 나름 힘겹게 보내고 결혼기념일 한 학교의 한 학년 아이들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거짓말 같은 비보를 접하고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 한창 예쁜 짓을 하는 아기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더욱 더 그 부모들 마음에 감히 감정이 이입되어 그냥 눈물이 줄줄 흘렀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도 일어나는 게 세상사구나, 싶어 사는 게 더 한층 두렵게 느껴졌다.

 

 

 

 

 

 

 

 

 

 

 

 

 

 

엄마로서 부족한 점이 많다 보니 더 육아서에 집착하게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은 좀 더 나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 느낌에 안심이 되고 어떤 방향등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을 밝혀 주는 것 같아 마음이 차분해진다. 많은 육아 관련 책 중 이 책은 나에게 베스트다. 무엇보다 어떤 교조적인 가르침을 남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실제 아이를 키우는 그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들, 더 나아가 그 인터뷰에 응한 부모들에 대한 강한 공감, 친밀감, 지지가 그들의 내면 깊은 곳의 이야기를 끌어내어 공명하게 한 점이 감동적이었다. 유아기, 어린이, 사춘기를 거쳐 성장해 가는 아이들에 따라 변하는 부모의 역할과 자리에 대한 느낌, 감정 들이 다채롭게 펼쳐지면서 우리가 부모가 되어 부모로 산다는 것이 우리의 긴 생애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까지 나아간 부분은 이 책의 대단원이다. 좋은 부모로 사는 것보다 좋은 인간으로 삶을 잘 사는 것과 그것을 접목시키는 지점에서 읽는 이의 지지를 끌어낼 수 밖에 없는 책.

 

소설은 무거운 것도 가벼운 것도 재미있게 읽은 것이 많았다. 특히 브론테 자매의 <제인에어>와 <폭풍의 언덕>을 읽으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시골의 목사관의 한정된 공간에서 어떻게나 그런 다이나믹한 상상의 세계를 그릴 수 있었는 지, 정식으로 작가가 되는 과정을 밟은 것도 아닌데 문장들은 또 어찌나 아름다운 지, 요절한 자매들은 소설가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표본 같았다.

 

 

 

 

 

 

 

 

 

 

 

 

 

 

 

 

찾아보니 2013년과 2014년에 걸쳐  톨스토이의 <유년 시절 소년 시절 청년 시절>을 읽은 기록이 있다. 지금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자서전을 읽고 있다. 유아기부터 소녀 시절을 거쳐 이제 애거서는 결혼을 하고 딸을 낳고 힘든 경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고 아직 유명 작가가 되기 전이다. 그녀는 자신이 사십 년이 훌쩍 지나 영국 여왕과 만찬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전업 작가가 되리라고도. 나도 지금으로부터 사십 년 뒤 내가 어떤 모습일 지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여든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어떤 할머니가 되어 있을지. 그 때도 건강하게 읽고 쓰고 까페라떼를 마시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지금 같은 정서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상식이하의 끔직한 일들이 많이 벌어져도 세계는 진보하고 있다고 믿고 싶으니 그 세상은 더욱 아름답고 지금보다 한층 성숙한 모습이었으면 좋겠고. 무엇보다 나이가 들수록 더 너그러워지고 사랑이 많아지고 편견이 적어졌으면 하는, 그런 소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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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1-01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블랑카님덕분에 책 읽는 즐거움을 많이 배웠어요~~~. 늘 충실하게 글쓰는 모습을 배우고 싶고요,,,2015년도 블랑카님의 서재를 즐겨 찾으며 공감을 나누게 되길 바랍니다. 가족이 늘 평안하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blanca 2015-01-01 16:57   좋아요 0 | URL
비비아롬모리님, 서재에 돌아오셔서 생생하고 즐거운 일상 남겨주어 저에게도 행복 전염이 되어 고마워요.
비비아롬모리님 가족도 또 저희 가족도 항상 건강하고 더욱 즐거운 이벤트 많이 만드는 2015년이 되어요.^^

2015-01-01 0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01 1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이 2015-01-02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숙한 모습을 갖는 일은 생각과 달리 꽤 어렵더라구요. 요즘 들어 자주 느끼죠. 블랑카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_ 더 그득한 사랑 누리시기를 바랄게요.

blanca 2015-01-03 15:08   좋아요 0 | URL
야나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더욱 더 즐거운 읽기의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
저는 아직 멀었어요. 계속 실수하고 반성하고 그러며 나이 먹는 것 같아요.

2015-01-02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03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장소] 2015-01-03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더..배워야 한다니..또 고쳐야 한다니.
한참..멍해서 종일 부지런 떨어 집안일을
했어요....더는 새로울 게 없다고.
저는 어디서 그런 마음이 든걸까요ㅡㅡ
이건 책 속에 있을 답이 아닌 듯 합니다.
하긴..모두 아는 사실이겠지만 책엔 어떤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하는 인생의 정답 따위..없어요.그렇지요?. 또 다른 길이
있을 뿐... 음..은사님..하핫 자주 뵈야지.좀 괴롭혀 드리고..약도 좀 올려 드리고요.부쩍
노염이 많아지시더라고요..흐하하..세월의 힘이지..합니다.더 자주 가까이 뵈야지.
blanca 님..단꿈..꾸시고 또 뵈요..^^

blanca 2015-01-03 15:12   좋아요 1 | URL
그장소님, 집안일 얘기하셔서 돌아보니 제 주위는 --;; 새해 벽두부터 속에 탈이 나
이것저것 다 의욕 상실이네요. 저는 살면 살수록 모르는 것 투성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나마 정답이라고
여기던 것들도 또다른 시각에서 다른 답이 보여요. 이게 지각의 한계일까요?
안 그래도 며칠 전 저는 다시 신입사원이 되는 꿈을(미생 부작용일까요 ㅋㅋ) 꿨는데
그 당시는 그렇게 힘들었던 상황을 너무 잘 풀어가고 있어서 일어나고 나니 참 기분이 좋더라고요.

[그장소] 2015-01-03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합니다.저는 불면증이 심해요.잠을자도
보통 악몽이 대부분이고 그래서 누구와 곁을 같이해 잠을 자는 것 ..엄청 신경 쓰이는 일이되곤합니다. 아직 새해..잠든 시간이래야 잠시 앉아 꾸벅 존 정도..그 사이 다녀간 손님도 역시 지독하게 ..이건
좋은지 않좋은지..ㅎㅎㅎ반복해서 상황만 조금 다를 뿐 여러버전으로 제가 한꿈에서 수도 없이 지독하게 죽고 .죽고 또 죽고..뭐,
그럽니다..이젠 아..또 올게 왔구나..할정도..입니다.하도 여러버전으로
다양하게 죽어봐서요.
인생을..신입으로 다시 사는것.과 죽었.다
사는 것..뭐가 더 끔찍할까요?
저는 이쪽도 blanca님 쪽도 그닥 반갑진
않아요.하핫..
그래도 blanca님 꿈끝이 기분 좋으셨다니..
참 다행이고 기쁩니다.^-^

blanca 2015-01-04 10:11   좋아요 0 | URL
그장소님, 아웅 힘드시겠어요. 저도 물론 악몽도 꾸긴 하지만 좋은 꿈 어쩌다가 한번 꾸고 나면 그 여운이 참 달콤하더라고요. 저는 꿈을 많이 꾸는 편이었어요. 내용도 다니나믹하게요. 그나마 나이가 들어가니 점점 꿈없는 밤이 많아지네요.

[그장소] 2015-01-04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뭐 벌써 연장전 돌입해서요..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신경이 예민한 상태..
집중 못하고있죠.^^ 그래도 점점 꿈이 줄어
든다니 희망이 저...멀리 있긴 한거네요.!
비소식있더라고요..오후던가,내일즈음..감기 조심하시고요..기지개 켜고 시작할까요?^^

blanca 2015-01-05 19:28   좋아요 0 | URL
오늘 날씨가 많이 풀렸더라고요. 마무리하는 시점에 댓글을 달게 되네요.
그장소님도 오늘 하루 잘 마무리하셨기를 바라요^^

[그장소] 2015-01-05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녁 맛있게 드셨나요? 날씨 풀린 듯..했죠. 그치만 비 올거같아요...잠자리 드시기까지 내내 평안이 함께..
그럼.또 뵈어요*^^*
 

"행복하지 않다"와 "불행하다"가 동의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제 더 이상 온전히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일은 없지만 그래도 질투심이 없어졌다,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별것 아닌 일을 별것 아닌 것으로 좀 밀어 둘 수 있지만 그것이 사소한 일들 모두를 쿨하게 넘길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좋은 인간이 되기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이제 나는 살아온 만큼 더 살면 노인이 된다. 지금은 어떤 능선을 따라 내려오기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천상병 시인은 세상이 아름다웠노라고 회고할 수 있게 늙었지만 나에게 비친 세상은 점점 더 참혹하게 느껴지고 부조리하고 불합리하게 비치고 나를 감싸던 안온한 포근함은 점점 더 하나의 착각처럼 느껴진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비극이 일어나고 언제나 지켜져야 할 기본 원칙은 수시로 무너지는 풍경, 그것이 내가 곧 사는 곳이다. 이제 더 이상 바깥은 꽁꽁 얼어붙을 만큼 춥지만 지글지글 끓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귤을 까먹으려 읽고 또 읽었던 '쿠오레' 같은 세상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엄혹한 현실이다.

 

혹독한 시련과 고통, 불평등과 부조리, 착취와 굴종만이 삶의 조건인 것일까? 어린 시절, 세상에 대한 느낌은 늘 따듯했다. 비록 늘 지쳐 있었지만 어딘가 믿음직스러운 아버지와 다정한 엄마, 자신이 누군가와 단단히 결속되어 있고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뿌듯한 안심...... 그것은 마치 새 둥지처럼 아늑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느낌은 다 사라지고 없는 걸까? 왜 모든 게 가혹하고 싸늘해진 걸까? 그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

-천명관 <퇴근> 중

 

맞다. 이런 느낌인 것같다. 미래의 사회상을 그린 극단적이고 어두운 이 <퇴근>이라는 자본주의의 불평등이 만들어낸 세계의 나락에서 건져 낸 이 비참한 가장의 회고는 사실 미래의 것이 아니다. 어렸을 때 때로 너무 슬프고 너무 아프다,는 느낌을 가졌지만 종종 가지는 안온하고 따뜻한 그 안정감의 보루만은 명확한 것이었다. 그것은 나를 둘러싼 구체적인 풍경 때문이 아니었고 어린이만이 세상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그 아주 편협하고 자그마한 영역의 울타리가 주는 본질적인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중년이 되어간다는 이러한 싸늘한 느낌은 오직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라는 위로,가 분명 주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한국작가가 쓴 단편을 찾아 읽지 않게 되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 밀도 있는 찰진 서사가 뚫고 들어오던 내면의 벽이 더 두꺼워진 탓도 있을 테고 어느 순간 한국의 단편에도 어떤 '찡'하던 총기가 감하고 매력이 흘러 넘치던 전성기를 치고 내려오는 지점에서 좀 머뭇댔던 탓도(나만의 생각?) 있었던 듯 싶다. 하지만 김훈, 김연수, 은희경, 성석제, 김영하, 김언수, 천명관이 쓴 단편들은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 같았다. 그것도 이럴 줄 알았어,가 아닌 역시 산타 할아버지는 늙지 않는구나, 싶을 만큼의 재기가 여전히 반짝이는.

 

김훈의 노량진 고시텔에서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생의 이야기는 역시 그의 정묘한 문장, 묘사 들과 어우러져 생생한 하나의 르포 같았다. 사실 나도 여기에서 재수를 했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는 낯설지만은 않았다. 근처에 있는 사육신의 묘지의 이야기와 공무원 시험 과목 중 국사의 쪽집개 식 강의가 펼쳐지는 풍경과의 교차는 마치 우리의 삶과 어떤 죽어 있는 이론, 상식의 대조의 풍경과 닮아 있었다. 필요에 의해 가난한 계약 동거를 마치고 쿨하게 찢어지는 '나'와 '영자'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담담하지만 어떤 '찡'한 구석이 있다.

 

김연수의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는 여전히 김연수적인 아름다움과 또 거기에 덧대어진 약간의 권태, 하지만 은은한 여운이 길게 남는 이야기였다. 한국의 포크 여가수가 일본에 공연 초대를 받아 간 사연, 또 그 사연이 서술되는 방식인 이미 끝난 사랑에게 보내지는 이메일, 자신은 미처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떤 성의가 익명의 누군가의 삶을 구원하는 감동, 김연수의 시선은 여전히 별을 향해 있어 반갑기도 하고 안심이 된다.

 

김영하의 <아이를 찾습니다>는 섬뜩했다. 마트에서 우연히 아이를 잃게 되고 그 아이를 찾아 헤매며 흘러가는 십년 남짓한 세월이 파괴하는 일상, 그 일상을 다시 뚫고 들어오는 실종된 아이의 귀환이 행복이라는 마침표 대신 더한 비극과 파국으로 치닫는 서사의 진폭은 소설적이라기보다는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소름이 끼쳤다.  앓던 이가 빠진다,는 표현. 어쩌면 우리는 어느새 '앓던 이'에 익숙해지고 그것이 미결로 남아 나를 규정하고 내가 그것을 하소연하는 데에 점점 더 익숙해지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고민했던 모든 문제가 풀리고 남는 것은 명쾌함과 행복이 아니라 어떤 황망함과 또다른 상실감에 맞닥뜨릴 수도 있다는 그러한 예리한 간파.

 

천명관의 <퇴근>은 놀라웠다. 회사에 정식으로 출퇴근하는 정규직들은 극소수의 상류층으로 고착화되고 대다수는 '담요'라는 너절하고 초라한 '환유' 아래에서 하루 하루 힘겹게 생존을 위하여 투쟁해야 하는 미래의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그린 이야기 속에서 발견되는 어떤 일말의 진실은 사실 우리가 지금 오늘 애써 외면하는 지대에 있다. 미 모든 역겨운 일들의 중심에는 사실 사람마저 도구화 부속화시키는 천민자본주의의 횡행이 있지 않을까. 작가는 이제 욕할 정부마저 슈퍼리치들 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모든 것들이 철저히 돈의 논리에 종속되는 황량한 풍경을 눈에 보이듯 그린다. 천식에 걸려 암시장에서 약을 구해야 하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해매던 무능한 아버지가 어린 시절 집을 나갔던 아버지와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의 반전은 압권이다.

 

토마 피케티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던 터라 그와 함께한 좌담 자리의 기록이 반가웠다. 자본주의의 소득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그의 대안적 관점은 실현 가능성이나 한계 등을 차치하고라도 오늘날 누구나 느끼고 있는 물질에 의한 삶과 생명의 소외, 그리고 불평등에 대한 하나의 출구를 진지하고 젠체하지 하고 모색하는 움직임이라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자주 인용하는 발자크의 소설에서의 인물들의 '돈'을 매개로 혹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움직임에 대한 이야기가 반가웠다. 발자크는 그 자신이 누구보다 '돈'에 시달렸던 '돈'에 집착했던 인물이다. 그의 이야기는 그래서 오늘날에도 지근거리에서 벌어지는 일들 같다. 기회가 된다면 토마 피케티의 저서를 읽어보고 싶다.

 

 

 

 

 

 

 

 

 

 

 

 

 

 

 

문학이라는 게 결국은 삶을 기록하는 데 끝내 실패하는 행위잖아요. 중요한 건 실패하면서도 끝까지 기록한다는 거죠.

-리뷰 좌담 '답할 수 없는 물음들의 곁에서' 중 양재훈 

 

이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눈에 보이는 것들, 손에 만져지는 것들만으로 효율성으로 수익성으로만 무언가를 인정하고 평가하는 세태에서 실패하는 게 당연한 무용한 시도들을 밀고 나가는 일은 분명 쉽지 않겠지만 그 자체만으로 가지는 무게와 가치, 아름다움이 있다. 응원을 보내주고 싶고 오랜만에 감칠맛 나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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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3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23 1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23 16: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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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3 18: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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