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27일 화요일, 지금, 여기에 나는 또 있다. 하지만 2055년 1월 27일에도 여전히 여기에 또 이렇게 있을 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때 런던은 풀이 웃자란 오솔길일 것이고, 이 수요일 아침 인도를 따라 질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결혼반지를 낀 뼈다귀와 금이빨밖에 남지 않은 채, 먼지에 덮여 있으리라.
-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중
일단 지금 내가 해야 할 자질구레한 일들이 산적해 있고, 내가 듣고 말해야 할 관계들, 아직 욕심내고 때로는 질투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는 마당에 정작 '내'가 사라지고도 남을 것들의 그 굳건함에 시선을 돌리기란 쉽지 않다.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내고 때로 절망하고 그럼에도 영원하지 않음이 때로 위안이 되기도 하면서 그렇게 오늘은 또 어제가 되고 내일은 끊임없이 오늘이 되며 시간 앞에 무력하게 침몰된다.
과거, 현재, 미래를 온전하게 좀 내려다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그나마 이야기를 읽을 때이다. 주인공들은 시간에 지고 때로는 시간을 이기면서 삶을 사는 정경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나도 안 그럴 리가 없다. 오십 대의 댈러웨이 부인의 눈으로 생생하게 그려지는 런던 풍경이 이윽고 곧 간곳 없이 허무하게 스러져 버릴 것이라는 것에 대한 언질은 버지니아 울프였기에 가능했다. 그녀는 줄곧 모든 생생함이 유한성 안에서 더욱 빛을 발함을 유한성 앞에 결국 굴복할 것임을 일깨운다. 그 자신이 시간 앞에서 죽음 앞에 삶이 속박되는 것을 못견딘 탓인지 그녀는 스스로 시간의 종결, 삶의 마침표로 걸어들어가며 자신의 삶으로 마지막 텍스트를, 마지막 조언을 남긴다.
이십 대를 눈부시게 긋고 지나갔던 수많은 과거의 노래들을 이제는 나이들어버린 가수들이 재현하는 모습에 언어로는 설명하기 힘든 절절한 막막함을 느꼈다. 그것은 언제든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나뿐만 아니라 조금은 건조해 보이는 사람들도 그 시대에 청춘을 맛보았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애절해했다. 결국은 '시간' 앞에 모든 것들이 무력화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인식과 지각의 틈새에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것들이 온전하게 남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김연수가 어느 포탈의 서재에서 권한 책. 소설가가 권하는 소설이 아닌 책은 언제나 주의를 끈다. '무경계'라니. 게다가 저자는 겨우 이십 대 중반에 존재와 생과 삶의 근원적 의미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행했다. 모든 궁금했던 것들이 모든 애매했던 것들이 이 얼마 안되는 책 안에 다 담겨 있었다. '내'가 '나'를 수많은 경계의 철책으로 얼마나 재단하고 속박하고 승산없는 전투를 했는 지에 대한 깨달음. 우리가 무심코 생각하고 끄달리는 모든 것들이 저도 모르게 어떤 경계와의 전투의 전장에 있었다는 것. 이것은 여든을 넘고 삶을 다 살아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아닌 인식과 지각의 지평이 넓어질 때 돌연 만개하는 듯한 내면의 확대와 심화의 정경이다. 도교, 불교, 기독교, 힌두교, 프로이트, 융의 이야기와 사상들은 더이상 대립하지 않고 한데 어우러져 과거와 미래라는 환상 속에 현재를 끊임없이 소모하는 인간에 대한 진지한 통찰과 따뜻한 연민으로 화해한다.
백 년 전에는 아마도 다른 남자가 바로 이 자리에 앉아 당신과 마찬가지로 빙하 위로 스러져 가는 빛을 경외심과 동경심을 갖고 바라보았을 것이다.-p.227
저자는 언어조차도 실재의 지도에 불과하다며 경계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문학적인 문장으로 자신의 앎을 전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전체, 합일의 개념에 대한 이상이 지나친 신비주의로 흘러가지 않도록 절제하는 그 균형감도.
수만번 고쳐살고 싶은 지점이 있다. 수만번 돌아가는 대목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살아있음' 그 자체에 탐닉했던 댈러웨이 부인보다 훨씬 못한 것이다.
<무경계>의 켄 윌버가 인용한 양자역학의 창시자인 에르빈 슈뢰딩거의 말을 재인용한다.
" <중략>영원히 그리고 언제나, 오직 하나이며 동일한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한다.
현재만이 유일하게 끝없이 영원한 것이다."
-p.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