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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를 위한 감정코칭 - 존 가트맨.최성애 박사의
존 가트맨.최성애.조벽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친구들이 한 시간씩 약속 장소에 늦어도 화내지 않았다. 고객이 전화에 대고 육두문자를 날려도 흥분하지 않았다. 십 년 동안 화를 내는 모습을 전혀 못 봤다는 친구의 말을 칭찬으로 알아들었다. 정서적으로 대단히 안정되어 있다고 착각했고, 감정조절에 능하다고 자만했다. '다혈질'과 거리가 먼 나의 모습을 나는 좋아했다.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예민했다. 엄마 아니면 그 누구도 한 시간 이상 볼 수 없었다. 백일 기념으로 한 가족모임에서 아이는 두 시간을 울어대는 기염을 토해냈다. 졸리거나 감기가 걸리면 종일토록 울어댔다. 피곤한 몸, 나 아니면 안되지만 그 누구도 그 가치를 산술적으로나 표면적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일에 매여 점점 나는 다혈질이 되어 갔다. 아니, 사실 감정조절도 못하고 대단히 유치했던 '나'를 재발견하는 과정이 팔할이었다. 수많은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잊혀졌던 유년기의 기억들의 미처 봉합되지 못한 상처들이 아가리를 벌렸다. 육아는 분명 또다른 자기성장의 계기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종의 관문이 있다. 자기노출. 내 눈으로 차마 보고 싶지 않아 파묻어 버렸던 수많은 약점과 취약한 지대들이 드디어 백주대낮에 내 앞에 도열하는 환각. 그것을 직시하는 것은 너무 아프고 참혹하다.
웃는 아이는 이쁘다. 밥 앞에서 둥지 안에서 먹이를 물어오는 어미를 기다렸다는 듯 입을 쫘악쫘악 벌려 대고 '엄마를 제일 사랑해'라고 볼에 입을 맞추고 어른들 앞에서 배꼽인사를 하는 아이는 누구나 예뻐할 수 있다.
본게임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 드러누워 떼를 쓰는 아이, 친구를 마구 가격하는 아이, 아니면 맞고도 구석에서 훌쩍이며 전혀 방어를 못하는 아이, 밥은 안먹고 사탕과 과자만을 요구하는 아이들 앞에서 시작된다. 많은 엄마들이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평소에는 더없이 너그럽다 친구의 장난감을 빼앗거나 친구를 때리는 아이의 모습에 광분하는 엄마, 맞고 있는 모습을 보면 눈을 흘기는 엄마, 공공장소에서 민폐를 끼치면 바로 등짝을 시원하게 때리기 시작하는 엄마, 그 어떤 아이의 행동에도 눈하나 끔쩍하지 않고 무감각하고 방임하는 엄마, 너그러움을 가장하고 아이에게 이기심을 조장하는 엄마, 아이의 감정에 공감해 주지만 잘못된 행동에는 단호한 엄마(모범답안이겠지만) 등 백인백색이다. 나는 유독 일관성이 없는 부류에 속했던 것 같다. 평소에는 아이의 감정을 공감해주려 애쓰지만 나의 컨디션이 저조하면 목소리 크게 내기 대회에 참가하면 대상 감이었을 것 같다. 격정 소나타. 감정의 기복과 훈육의 강도는 제멋대로였다. 그리고 밤에는 처절하게 반성했다. 세 아이를 키워내며 크게 화내지 않았던 친정엄마를 사랑하고 원망했다. 머리가 아프다고 일찍 잠자리에 든 엄마에게 악몽을 꾸고 갔다 무안하게 야단맞고 돌아선 기억, 무작정 슬프고 나쁜 감정을 거부하라고 했던 것 같은 어렴풋한 기억, '사랑한다'고 나를 안아주는 서구식 사랑을 해주지 않았던 서운함. 그럼에도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들어주려고 동분서주했던 그 표없는 사랑들이 서로 웅웅거리며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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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급할 때 보이는 모습이 그 사람의 기본형입니다. 평소 아이가 별 말썽을 부리지 않을 때는 감정도 잘 공감해주고 다정다감한 모습이다가도, 아이가 말을 안 듣고 떼를 쓰고 울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화를 내거나 야단부터 친다면 '억압형'이 그 사람의 기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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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하지 않은 책이다. 제목은 <내 아이를 위한 감정 코칭>이지만 사실 <나를 위한 감정 코칭>으로도 읽힐 수 있다. 육아서를 읽으며 얻게 되는 기대하지 않았던 부가 소득은 내 안의 상처받은 여린 과거들의 치유 경험이다. 설명할 수도 설명되지도 않는 격정적인 감정 분출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곳엔 나의 아이보다 '내가 아이였던 시간'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 과정이 불편할 수도 있다. 불편한 진실과의 대면. 유난히 참기 힘든 아이의 행동은 내가 아이였을 때 부모가 과도하게 반응했던 나의 그 반복되던 실수였던 경우도 많다.
감정코칭의 핵심은 모든 감정은 다 받아주고 공감해 주되 타인과 아이 자신에게 해가 되는 행동의 한계는 분명히 정해주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감정이다. 우리는 기쁨, 행복함, 즐거움 같은 긍정적인 감정은 좋은 것이고 분노, 우울, 짜증 같은 부정적 감정은 나쁜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 특히 나는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아이가 어쩌다 보이는 분노, 짜증과 내 안에서 일어나는 시기, 분노 같은 감정에 과도하게 반응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모든 감정이 삶에 어떤 면으로든 기여한다는 얘기는 기너트의 <부모와 아이 사이>에도 나온다. 오늘 EBS에서 우연의 일치로 보게 된 다큐에서도 이러한 아이의 부정적 감정에 반응하는 두 엄마의 다른 모습이 나왔다. 부정적인 감정을 훈육의 대상으로 보는 엄마와 그 감정 자체를 심판하지 않는 엄마의 모습의 대비는 아이의 감성 지능의 차이로도 연결됐다. 그림책의 주인공들을 놓고 보이는 공감의 정도가 엄마가 아이를 훈육하는 방식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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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를 통합했을 때 27~28세는 되어야 전두엽이 온전한 기능과 작동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른바 '철들었다'고 표현할 만큼 계획, 판단, 우선순위, 감정 조절, 충동 조절을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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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엽 성숙이 이렇게나 늦게까지 끄는 것인 줄 몰랐다. 청춘의 방황은 생물학적 성숙도에 연관된 이야기였다. 스무 살에 철드는 것은 불가능했었다,고 아전인수격으로 끌어다 놓아 본다. 아이들은 1층 뇌인 감정으로 먼저 수용과 공감을 해 준 뒤, 2층 뇌인 전두엽으로 합리적인 생각을 하여 행동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한다. 이십 대 성인도 철들기 힘든 마당에 아이들을 데리고 전두엽 수준의 논리적인 생각과 행동을 강요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슈퍼에서 뜬금없이 딸아이가 소세지를 졸랐다. 집에는 구워먹을 소세지가 잔뜩 있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계산대의 아주머니가 간식으로 먹는 소세지 껍질을 벗겨가며 맛있게도 드시고 계셨다. 아이가 말하는 소세지는 이런 소세지였다. 그거였다. 나는 지레 엉뚱한 떼를 쓴다고 짐작하고 훈육하려고 뒤돌아 섰고 거기에 아이가 소세지를 먹고 싶었던 이유가 버티고 서 있었다. 조금만 시간을 내고 조금만 방향을 틀면 아이의 떼는 잘못되거나 과도한 행동이 아니라 하나의 감정과 욕구로 설명될 수 있다. '사랑'은 '자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읽어주는 것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