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기사 제목 때문에 엉뚱한 기사를 읽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은 이런 기사가 등장했다.

너희가 '강남 좌파'의 비애를 아느냐

압구정이며 오렌지족 같은 말이 신유행어였던이던 시기에 대학을 다녔으니 궁금하기도 해서 기사를 클릭했건만,
도대체 본문에도 등장하지 않는 "좌파"라는 말이 왜 기사 제목에 떡하니 박혔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제 3세계 아이들에게 기부하고 싶은 선량한 욕망" 이 누군가를 좌파로 만든다면
(동전 한 푼 기부"한 것"도 아니고 기부하고 "싶은"???)
세상에 좌파 아닌 사람이 어디 있으며,

호텔 스위트 룸에 사는 이들의 무슨 비애가 소설에 그려졌다는 건지에 대해선
일언반구 설명도 없는,

이런 내용 없는 기사에 붙은 제목의 선정성이
가히 썬데이 서울이 울고 갈 지경이다.


점심시간인데 열받아서 식욕이 다 뚝 떨어졌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79350.html

너희가 ‘강남 좌파’의 비애를 아느냐
세계문학상 당선작 ‘스타일’ 펴낸 백영옥씨 “가진자의 욕망 그려”
 
 
한겨레 김일주 기자
 

 
» 세계문학상 당선작 ‘스타일’ 펴낸 백영옥씨
 
제4회 세계문학상을 받은 백영옥(34)씨의 장편소설 <스타일>(예담)이 출간됐다. 백씨는 출간을 기념해 1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고시원생, 백수 등 ‘88만원 세대’에 관한 소설들은 많지만 오히려 20·30대의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들은 문학에서 소외됐던 것 같다”며 “고시원에 사는 사람뿐 아니라 호텔 스위트룸에 사는 사람에게도 고독과 비애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스타일>은 작가가 실제로 패션지 <하퍼스 바자>의 피처 에디터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서른한 살 8년차 패션지 기자의 일과 사랑, 고민을 감각적인 문체로 그린 소설이다. 패션잡지 기자를 주인공 삼은 ‘칙릿’이라는 점에서 베스트셀러 소설이자 흥행 영화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자연스럽게 연상되지만, 소설은 처음부터 <악마는…>처럼 번드르르한 이야기는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주인공은 유명 여배우를 섭외하기 위해 매니저에게 ‘스토커’라는 말까지 들어가며 7개월을 공들이고, 후배에게 ‘잡지계의 성철스님’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지만 예금도

, 보험도, 펀드도, 애인도 없다.

그는 “패션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명품만 입고, 속물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게도 진정성은 있다”며 “좋은 집안에서 혜택 받고 자란 소위 ‘강남 좌파’의 상반된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소설의 주인공 이서정처럼 저도 프라다에 대한 속물적인 욕망과 제 3세계 아이들에게 기부하고 싶은 선량한 욕망을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을까 늘 고민합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화해’에 관한 성장소설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백씨는 2006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으며, 2007년 산문집 <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를 냈다.

글 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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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8-04-02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친.

치니 2008-04-02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꼴값을 한다, 라고 써도 되죠? 검둥개님. ^-^;;

잉크냄새 2008-04-02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초울트라황색저널리즘을 표방했던 선데이서울도 한번쯤 재고했을만 합니다.
 


해야 할 일이 한없이 많다는 데 우울해진 나머지 어제는 일어나서 밥을 먹고 도로 다섯시간이나 다 자버렸다. 정말 졸리지는 않지만 머리 아픈 일들이 너무 많아서 깨어있고 싶지 않았다고나 할까. 다행히 몸도 피곤했는지 자고나 싶은 마음에 흔쾌히 동의를 해주었다. 하루종일 자고 나니 그래도 기분이 좀 나아졌다. 웃기는 일이 아닌가. 꼭 웃을 일만은 아니지만 말이다.

울적할 때에도 맘에 드는 음식을 먹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지난 금요일 오전에는 직장이 있는 건물 안의 매점에서 계란 부친 것+ 감자 지진 것+베이컨+초콜렛 크로와상+커피를 사 와서 포식을 했다. 상사가 출근하기 전에 서둘러서 먹어 치웠다. 그러고나니 기분이 어찌나 업되던지! 워낙 가지가지 사다보니 돈도 꽤 들었는데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금요일 저녁에 집에 와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는 데 마이애미 바이스란 영화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정통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웃음이 삐질삐질 나오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제이미 폭스, 콜린 파렐 같은 미남들이 나와 악당들을 소탕해줄 뿐 아니라 배경도 야자수가 우거지고 호화 주택들이 즐비한 마약과 도박으로 유명한 열대의 도시 마이애미. 겨우 영화가 시작한지 십 분 됐는데 콜린 파렐의 대사가 배꼽을 잡게 한다. "이미 우린 너무 깊이 들어와 있어." 하긴 영화  러닝 타임으로 보면 십분도 전체 영화의 십 분의 일이니 뭐 그렇다고 봐 줄 수도 있겠지만.  "깊기는 뭐가 깊냐, 이 넘아," 하고 지저분한 수염을 하고 온갖 똥폼을 다 잡는 콜린 파렐한테 한 마디 해주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킬킬대고 웃고 말았다.

그런데 갑자기 영화 중간에 공리가 척, 하고 등장하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심장이 졸아드는 것 같았다.
공리의 아우라가 삽시간에 영화 전체를 장악했다.
영화 전체가 갑자기 아티스틱하게 변모했다.
공리의 얼굴엔 신산스런 아름다움이라고나 할 그런 비장미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행운이란 주어진 시간에 다름아니다, time is luck," 이런 의미심장한 대사를 단물 빠진 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콜린 파렐이나 제이미 폭스는 공리에 대면 후까시의 격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진다는.

콜린 파렐이 술이나 한 잔 하러가자고 공리에게 수작을 걸자, 공리는 어디를 가고 싶냐고 묻는다. 콜린 파렐이 어디를 주로 가느냐고 답하자 공리는 좋아하는 술을 대라, 그 술을 가장 잘 하는 주점에 데려다주마, 하고 큰 소리를 친다.  잠시 후 공리는 콜린 파렐을 쾌속보트에 태우고 하바나로 쏜살같이 항해해 간다.

영화 속 장면이긴 하지만, 정말 살 맛 나는 인생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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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8-03-10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공리가 이런 영화에도 나오는군요.

검둥개 2008-03-10 13:53   좋아요 0 | URL
글쎄 말예요.
준비 없이 보고 있다가
갑자기 공리 얼굴을 보고 충격을 받았지 뭐예요. ^^

잉크냄새 2008-03-10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술 마시러 하바나로...정말 멋진 인생이네요.ㅎㅎ
제 사견입니다만 그래도 공리는 예전 붉은 옥수수의 공리가 가장 기억에 남네요.

검둥개 2008-03-10 13:56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님, 오랜만예요. ^^
아직도 중국 중원에서 활약 중이신가요?
술 한 잔 하러 미국에서 쿠바로 바다를 건너갈 수 있는 인생이란
마약 수입상의 것이라고 해도 부럽더군요.

그러고보니 전 붉은 옥수수는 안 봤네요.
귀주 이야기의 공리가 인상에 깊이 남았어요.

2008-03-10 1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10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08-03-11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리, 내 사랑의 한 명이었는데, 마이애미 바이스라, 조금 안 어울릴 거 같기도 하고, 더 멋질 거 같기도 하고. ^^

검둥개 2008-03-11 09:18   좋아요 0 | URL
뜻밖이었지만 멋있었어요. ^^
이상한 듯 하면서도 또 은근히 잘 맞아떨어진다고나 할까요.
피상적인 영화 속에서 깊은 감정의 폭을 연기한다고나 할까.

콜린 파렐이나 제이미 폭스는
어째 공리에 대면 신참 배우들 같았어요!

2008-03-13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19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19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20 1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20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끔 보는 드라마 중에 <레스큐 미>라는 것이 있다. 어쩌다 한 번씩 봐서 그랬는지 제목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어제 우연히 본 에피소드를 보고 있으니 유레카의 순간이 왔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토미는 아내와는 별거중이고 알콜중독으로 고생하며 9-11 때 소방대원의 임무를 수행하다 사망한 사촌의 아내와 연애관계에 얽히는 등 개인적으로 꼬인 것이 많은 머리 아픈 인생을 살아간다. 욱하면 사람을 두들겨 패는 게 일상이고 동료 소방대원의 사물함에서 강도 높은 진통제를 슬쩍 하질 않나, 조카가 목을 매는 학교 여선생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등 모범적인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데, 그래도 좋게 봐 줄 수 있는 측면이 있다면 그건 직업인 소방대원의 직무에는 충실하다는 사실. 규칙도 어기고 위험도 불사하면서 화재에서 사람들을 구조해낸다.

목숨을 내걸고 남들은 매일 화마에서 구해내지만 정작 본인은 예수의 환영에 시시각각으로 시달리며 술독에서 헤어나질 못한다.
남을 구조하는 게 직업인 토미를 구조해 줄 사람은 누구인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어긋난 인생.

동네 짱게집에서 친척들과 모처럼 한데 모여 아버지의 생일잔치를 하는 날, 토미의 알콜의존증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전직신부 사촌은 이런 날이 술의 유혹을 이기기 무척 어려운 경우 중의 하나라고 충고한다. 이런 날 당신은 어떻게 견디냐는 토미의 질문에 사촌 왈, "대마초를 다발로 피운다네."

술이냐, 담배냐, 진통제냐, 인생을 위안해 줄 사물의 종류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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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0 0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10 0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10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10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Gateway (Paperback)
Frederik Pohl / Del Rey / 2004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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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폴의 1977년작인 이 소설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심란하다. 책 표지만 보면 인간들보다 훨씬 우월한 과학기술의 진보를 이룩한 외계인, 히치들의 유적에 남겨진 우주선을 타고 미답사된 우주를 모험한다는 내용으로 그야말로 박진감이 넘친다 싶지만,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하면 그런 기대는 금새 증발하고 만다.

연도가 딱히 정해지지 않은 채 막연히 미래로 설정된 소설 속의 인간들은 현재의 인간들만큼이나 고단하게 살아간다. 주인공 로비넷 브로드헤드는 별볼일 없는 식품광산 광부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도 식품광산의 광부로 막장인생을 살아간다. 식품광산의 광부 일이란 뭔가 조금만 잘못 되어도 자칫 굴에 갇혀 죽기 십상인 위험천만한 직종. 월급도 쥐꼬리만해서 미래라곤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운좋게 복권에 당첨된 브로드헤드. 무난하게 살면 가족을 꾸리고 배곯지 않고 평생 살 수 있을 만한 돈이지만, 출구 없는 인생이 답답하기만 한 젊은이인 그는 즉시 당첨금을 탈탈 털어 게이트웨이로 가는 표를 산다. 게이트웨이는 히치들이 오십만 년 전에 남겨둔 유적으로 일종의 우주정거장. 우주정거장엔 수백척의 히치 우주선들이 남겨져 있다. 게이트웨이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히치 우주선을 타고 미지의 우주 어딘가에 남겨져 있을 히치 유물을 찾아 모험을 떠난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그럴 듯 하지만 실은 상당히 중대한 문제가 있다.

아무도 히치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는 사실. 나아가 아무도 히치 우주선의 작동원리를 모른다는 사실. 과학자들이 기껏 발견해낸 것이라고는 어떻게 히치 우주선에 전원을 넣고 끄는지 작동 버튼을 누르는 지가 고작이다. 우주선의 원료가 뭔지, 우주선의 항해 시스템이 무언지, 출발 버튼을 누르면 우주선은 어디로 가는지, 항해는 얼마나 걸릴지, 항해 중엔 어떻게 항로를 조정하는지 같은 것도 전부 그러니까 써프라이즈다.  서점에선 전체가 빈 종이로 채워진 <히치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라는 책이 판매대에 어엿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운이 좋아서 우주선이 도착한 곳에서 히치 유물이라도 하나 찾아서 돌아온다면 평생 편히 먹고 낡은 장기도 때 되면 갈 수 있는 총체적 의료보험도 구입해 150년쯤 행복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되느냐가 전혀 계산불가능이라는 것이 문제다.

용감무쌍하게 목숨을 걸고 인생의 운을 시험하러 왔지만 러시아룰렛이나 다름없는 이 모험 앞에서 송장마냥 얼어붇는 브로드헤드.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그는 5인용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나간다. 우주선 안은 식량과 탐사장비와 사람으로 가득차서 발붙일 틈조차 없고 식량의 반쯤이 소모될 쯤까지도 우주선이 멈추지 않자 우주선 안은 긴장과 적의와 불안으로 가득 찬다. 항해 시간에 따라서 오 인 중의 한두명이 희생되어야 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도 살아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강건한 정체불명의 특수 금속으로 만들어진 히치 우주선은 행선지가 불타는 태양 위건 막 생성된 위험천만의 태양계건 폭발하거나 산산조각이 나지 않는 한 언제든지 출발지인 게이트웨이로 돌아간다. 우주선 속의 인간들이야 살아 있건 말건 간에.

우주선이 드디어 행선지에 도착하고 남은 식량으로 볼 때 뽑기를 해서 누군가 자살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브로드헤드와 동승한 다른 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만 그것도 잠시 뿐. 눈을 씻고 주변을 탐사해봐도 히치 유물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것이 다. 목숨을 내걸고 작동원리도 전혀 알 수 없는 외계인 우주선을 타고 몇 달을 고생하며 간신히 행선지에 도착했건만 보물이라곤 찾을 수 없다. 돌아가는 길은 살아서 도착하리라는 위안을 빼면 오던 길보다도 더 비참하고, 돌아가면 다시 한 번 목숨을 걸어야 하는 모험을 떠나야 한다.

브로드헤드는 두번째 여행에서도 살아 돌아오지만 그건 어이없이 짧고 보물 따위는 찾을 수 없는 종류였다. 게다가 성질머리 때문에 값을 따질 수 없는 일인용 히치 우주선마저 완전히 고장을 내버리는 바람에 그는 땡전 한푼 없는 신세에서 빚더미에 올라앉은 신세로 전락한다.

될대로 되라는 심사가 된 브로드헤드는 거액의 급료가 지급되는 위험천만한 과학답사여행에 자원한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고 살아서 돌아가기만 하면 상당한 보상액을 받을 수 있는 여행이지만 도착한 행선지는 그 누구도 살아 나올 수 없는 블랙홀.

이 정도 되면 그야말로 가슴이 찢어지는 공상과학소설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은 실망이라는 블랙홀이 가득찬 우주 같다. 위안이라고는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떠나서 도착하는 곳은 또다른 실망이 기다리는 친숙한 절망의 나락 뿐이다.

과학답사여행에 파견된 우주선은 두 척. 승무원 중 과학에 빠삭한 한 이가 묘안을 낸다. 어짜피 살아 나가기는 틀렸으니 모험을 해보자는 것. 두 척 중의 한 척에 전부 올라타고 다른 한 척에 각 우주선에 한 대씩 붙은 착륙선을 둘 다 부착해 가속시키면 두 우주선 중 하나는 블랙홀을 향해 돌진하고 그 반사력으로 다른 우주선은 블랙홀을 탈출하기에 충분한 속력을 얻지 않겠냐는 아이디어다.

이론은 좋지만, 문제는 어느 우주선이 블랙홀로 떨어지고 어느 우주선이 블랙홀을 탈출할 것이냐는 걸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 선택은 다시 한 번 눈먼 뽑기가 된다.

준비를 마치고 두 우주선에 타고온 승무원들이 전부 한 우주선으로 옮겨가는데, 인생이 지긋지긋한 브로드헤드는 혼자서 다른 우주선에 남는다. 우주선 중 하나에 함께 묶인 두 대의 착륙선에 가속도가 주어지고, 우주선 하나는 블랙홀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고 다른 하나는 게이트웨이를 향해 되돌아간다. 브로드웨이가 몹시 사랑했다는 여자친구는 블랙홀로 한없이 천천히 떨어져간다.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하는 블랙홀에서는 시간이 거의 정지된 듯한 속도로 천천히 그리고 점점더 천천히 흐른다. 일 초가 일 년으로 다시 십 년으로 한없이 한없이 느려진다. 단신으로 답사여행에서 살아 돌아와 거액의 보상금을 홀로 움켜쥐고 안락하고 호사스런 생활을 영위하며 브로드헤드가 수 년의 나이를 먹어가는 동안에도 그래서 우주 저 끝 블랙홀에서는 그의 생존의 대가로 블랙홀에 남겨진 그의 여자친구와 동승했던 승무원들이 여전히 한없이 천천히 블랙홀 안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게다가 그들에게 시간은 아직도 그들이 블랙홀에 도착한 이래 겨우 몇 분 밖에 지나지 않은 시각.

내가 그들을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직도 나는 그들을 죽이고 있다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브로드헤드는 그의 정신분석 전문의 로봇, 지그프리드를 향해 외친다.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이건 사는 게 아니라고.

그런 고통 같은 것을 로봇인 자신은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월등한 인공지능의 소유자, 로봇 지그프리드는 이렇게 답한다. 바로 그것이 삶이라고. 그리고 로봇인 자신은 결코 완전히 경험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서 지그프리드 자신은 그 인생을 매우 부러워한다고.

어떻게 보면 일확천금이지만 사실은 복권 한 장으로 인생을 불살라버린 거나 마찬가지가 된 브로드헤드의 지루하고 서글픈 모험을 그린 이 작품은 단연 특별한 종류의 공상과학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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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8-03-03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검둥개님 ^^ 꾸벅... 그냥 눈에 띄어서 왔습니다. "무난하게 살면 가족을 꾸리고 배곯지 않고 평생 살 수 있을 만한 돈"이 있어도 제 삶이 크게 달리질지는 모르겠네요.............. 라고 썼다가, 정작 많은 사람들이 그런 행운을 누린다면 자기가 알건 모르건 조금은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SF란 다 그런 건가요? 다 자기 사는 것에 대한 불만은 있지만, 또 그것이 아닌 삶을 일굴 수는 없는... 이렇게 살건, 저렇게 살건, 저보다 잘 사는 사람은 있는 법이고.... 또 그들이 부럽고..... 혹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있다면 다행히 그들에게 뭔가 내가 해줄 게 있다는 것 아닐지.. 그래서 사는 게 조금은 낫고...

검둥개 2008-03-07 01:2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에로이카님.
그러게 인생이 지리멸렬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기분전환을 하려고 집어든 공상과학 소설마저도 기대를 배반하기도 하고요. ^^

2008-03-08 0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08 0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08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혹시나 해서 유튜브에서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을 찾아본다.
이런 비디오를 올려준 네티즌에게 축복 있으라.

코러스의 우우하는 소리가 더 죽여준다. :-)


그대 나를 위해 웃음을 보여도 / 허탈한 표정 감출 순 없어 /
힘없이 뒤돌아선 그대의 모습을 / 흐린 눈으로 바라만 보네 /
나는 알고 있어요 우리의 사랑은 /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
서로가 원한다 해도 영원할순 없어요 / 저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듯한 /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은 / 잊지 말고 기억해줘요 /

-- 세월이 가면 (최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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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2-12 0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명곡이지요? 이 곡의 작곡가 최귀섭씨는 사랑은 유리같은 것, 그옛날의 연극이 끝나면 까지 근사한 노래를 많이 만들었었는데..
이 노래가 나올때 저는 고 3이었어요. 독서실에서 세월가 가라~~하며 듣고 또듣고 ^^

검둥개 2008-02-12 11:58   좋아요 0 | URL
저는 중학생!
독서실에서는 정말이지 공부만 빼고 모든 일을 다 했던 것 같아요.
만화책 빌려다 읽고 부시닥거리면서 과자 먹고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