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5는 내가 요즘 열심히 보고 있는 영국 비비씨 미니시리즈물이다. 한국에는 <스푹스>라는 제목으로 방영되고 있는 모양인데 모처럼 리뷰 한 번 써보려고 아무리 찾아도 알라딘에는 뜨지 않는다. 시종일관 좀 정이 들만 하면 일제히 중요 인물을 죽이는 것이 주요 특징인 이 시리즈, 보고 있으면 아주 골 때린다.
며칠 전 본 에피소드의 주요 인물은 과거 쏘비에트 공화국의 스파이로 활동하다 영국에서 검거되어 30년동안 장기수 복역을 하고 60이 넘어 출옥한 미스터 X (그만 이름을 까먹었다). 삼십년을 기다렸다 드디어 남편을 데리러 감옥 입구에 나온 늙은 사회주의자 아내는 목이 메인 채 인터네셔널가를 부르는데. MI-5 (영국 FBI/CIA 쯤 되는) 대장인 해리는 젊어서 10 년 동안 이 미스터 엑스를 어떻게든 더블 에이전트로 만들어보려고 매달 감옥을 방문했었다. 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회주의 신념으로 무장한 애국자 미스터 엑스는 콧방구도 안 뀌는데. 그의 신념이란 주택과 의료, 노동은 모든 인간의 권리이며 평등히 분배되어야 한다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마침 미스터 X와 젊은 시절 함께 사회주의 소비에트를 위해 스파이 활동을 했던 미스터 칸딘스키의 아들이 엘친 이후 러시아에서 부패와 폭력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은 영국 국민의료 서비스를 통채로 매입할 의사를 내비친다. 사회주의자들은 아니지만 국민의료 서비스가 독점 자본주의의 희생양이 될 것을 염려한(! 영국 스파이들은 나름 세계관이 있다) 해리와 몇몇 다른 스파이 대장들이 이 칸딘스키 주니어의 사업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할 계획을 세운다. 반면 영국 정부는 매입에 대찬성, 칸딘스키 주니어야말로 구세주라 생각하고 국민의료 서비스를 러시아의 수상스런 기업가에게 헐갑에 하루라도 빨리 팔아치우지 못해 안달이다.
해리의 기발한 계획은 미스터 X를 이용해 칸딘스키 주니어의 비리를 파헤치고 국민의료서비스의 매각을 백지화하는 것. 전 소비에트 공화국의 스파이 미스터 x가 동의할 성 싶지 않지만, 의료권이 모든 인간의 권리라는 사회주의 믿음 때문에 그는 의외로 30년만에 영국 스파이를 위해 일하는 더블 에이전트 노릇을 하기로 한다. 흥미로운 건 구사회주의의 믿음을 강조하며 어떻게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아들로서 자본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하느냐는 미스터 x의 질문에 대한 칸딘스키 주니어의 대답.
"내 아버지는 나의 영웅이요. 아버지가 사회주의로 이루지 못한 자본주의의 몰락을 나는 기업 매각과 합병을 이용해 훨씬 손쉽게 이룩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칸딘스키 주니어의 이상은 건설 없는 파괴, 이상향 없는 자본의 축적과 사회의 몰락. 요즘 주택 매입과 구직 문제로 온통 골치를 썩고 있는 통이라 사회주의 주택/노동정책이 이렇게 솔깃하게 들릴 수가 없다.
"구소련에서는 누구나 직업이 있었소" -미스터 x
"호텔 문 돌리는 데 다섯명이 고용됐지요" -칸딘스키 주니어
이렇게 투철한 사회주의자 미스터 X의 논변은 쉽게 묵살되지만, 왜 호텔 문 돌리는 일에 다섯 명이 일해서는 안된단 말인가? 다섯명이 호텔 문을 돌린다면 하루에 열시간 일하는 대신 두 시간만 일하고 여덟 시간 놀면 될텐데. 집 장만 따위에 인생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면 남는 시간을 카페인에 중독된 비버처럼 미친듯이 일하지 않아도 좋을 텐데.
그런데 빚내서 장만한 (정말 실수였다 10개월 무이자 할부라는 바람에...) 고화질 플랫 스크린 티비는 왜 이렇게 시간이 갈수록 더이상 거대해보이지 않고 아주 노멀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냐는 말이다. 첨 들여왔을 때는 아니 영화관이 따로 없네, 이런 감동을 불러일으켰었는데. 하지만 나라에서 주택 같은 걸 장만해 준다면 가스가 들어오느냐 방이 몇 개냐 지하실이 있느냐 따위에 또 목숨을 걸고 당파 싸움에 인생을 소모하고 말리라. 중공 인민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고 코믹하게 다룬 하진의 소설이 증명하듯이. 어쩌면 우리는 전부 비버 수준 밖에 안 되는 건가. 그래서 무슨무슨 주의의 깃발 아래 모이건 결국 각자 제멋대로 각개격파 이상을 이룩하는 못하는 모양이다. 하루 종일 죽자고 일하고 이력서 쓰고 돈문제로 머리털 뽑으며 속이 쓰리도록 커피를 들이켰더니 잠은 안 오고 이런 잡생각 뿐이다. 반 이상 빈 냉장고 속 씩스팩 맥주병에 자꾸만 눈이 가는데, 아, 무료 주택이라도 무료 알콜은 아니겠지, 역시 사회주의에도 한계는 있다, 하지만 그거야 뭐 매실주라도 담그면 되는 거 아니겠어, 하늘이 무너져도..., 아 하늘이 완전히 시꺼멓다... 밤이라 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