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일이 한없이 많다는 데 우울해진 나머지 어제는 일어나서 밥을 먹고 도로 다섯시간이나 다 자버렸다. 정말 졸리지는 않지만 머리 아픈 일들이 너무 많아서 깨어있고 싶지 않았다고나 할까. 다행히 몸도 피곤했는지 자고나 싶은 마음에 흔쾌히 동의를 해주었다. 하루종일 자고 나니 그래도 기분이 좀 나아졌다. 웃기는 일이 아닌가. 꼭 웃을 일만은 아니지만 말이다.
울적할 때에도 맘에 드는 음식을 먹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지난 금요일 오전에는 직장이 있는 건물 안의 매점에서 계란 부친 것+ 감자 지진 것+베이컨+초콜렛 크로와상+커피를 사 와서 포식을 했다. 상사가 출근하기 전에 서둘러서 먹어 치웠다. 그러고나니 기분이 어찌나 업되던지! 워낙 가지가지 사다보니 돈도 꽤 들었는데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금요일 저녁에 집에 와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는 데 마이애미 바이스란 영화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정통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웃음이 삐질삐질 나오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제이미 폭스, 콜린 파렐 같은 미남들이 나와 악당들을 소탕해줄 뿐 아니라 배경도 야자수가 우거지고 호화 주택들이 즐비한 마약과 도박으로 유명한 열대의 도시 마이애미. 겨우 영화가 시작한지 십 분 됐는데 콜린 파렐의 대사가 배꼽을 잡게 한다. "이미 우린 너무 깊이 들어와 있어." 하긴 영화 러닝 타임으로 보면 십분도 전체 영화의 십 분의 일이니 뭐 그렇다고 봐 줄 수도 있겠지만. "깊기는 뭐가 깊냐, 이 넘아," 하고 지저분한 수염을 하고 온갖 똥폼을 다 잡는 콜린 파렐한테 한 마디 해주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킬킬대고 웃고 말았다.
그런데 갑자기 영화 중간에 공리가 척, 하고 등장하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심장이 졸아드는 것 같았다.
공리의 아우라가 삽시간에 영화 전체를 장악했다.
영화 전체가 갑자기 아티스틱하게 변모했다.
공리의 얼굴엔 신산스런 아름다움이라고나 할 그런 비장미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행운이란 주어진 시간에 다름아니다, time is luck," 이런 의미심장한 대사를 단물 빠진 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콜린 파렐이나 제이미 폭스는 공리에 대면 후까시의 격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진다는.
콜린 파렐이 술이나 한 잔 하러가자고 공리에게 수작을 걸자, 공리는 어디를 가고 싶냐고 묻는다. 콜린 파렐이 어디를 주로 가느냐고 답하자 공리는 좋아하는 술을 대라, 그 술을 가장 잘 하는 주점에 데려다주마, 하고 큰 소리를 친다. 잠시 후 공리는 콜린 파렐을 쾌속보트에 태우고 하바나로 쏜살같이 항해해 간다.
영화 속 장면이긴 하지만, 정말 살 맛 나는 인생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