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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문학세계사 / 2002년 2월
평점 :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이나 표지가 확 깬다. 원제는 불어로 <튜브의 형이상학>, 영어로는 <비의 본성> 으로 번역되었으니 한국어권 및 영어권 번역자들 다 제목 정하는 데 고생 좀 한 모양이다. 그냥 <튜브의 형이상학>이라고 직역하는 것이 차라리 내용을 가늠하는 데는 수월했을 것을.
덕분에 한국 번역본 제목을 찾는 데 고생 좀 했다.
튜브가 도대체 어떤 종류의 것이냐, 하는 질문에는 아래의 이태리(?) 번역판 표지가 좋은 답을 준다.
연고 튜브같은 것이 아니고 일종의 소화관 같은 무조건 삼키고 배설하는 종류의 튜브다.
표지 그림도 역시 이태리판이 제일 맘에 든다는.
책 표지 이야기는 그만 하고 내용으로 넘어가면, 배경은 70년대 일본,
주인공은 태어나서 두 살이 될 때까지 미동도 없이 아무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소화관처럼 먹고 싸는 일 외에는 전혀 하지 않는, 그래서 부모에게 "식물"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우는 벨기에 부모를 둔 아기. 이 상태의 아기는 또한 신이나 다름없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기대하는 바도 없으며 아무 것도 지각하지 않고 거부하지 않으며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다. 아기의 삶은 신의 삶과 마찬가지로 완전하며 결여가 없다. 그래서 튜브 상태의 아기는 '사는' 게 아니라 단순히 '존재'할 뿐이다.
우연히, 뭔가 알 수 없는 사건이 이 신적 아기의 머리에 발생해, 처음으로 아기가 튜브상태를 벗어나는 순간이 온다. "식물" 아기가 귀찢어지게 울어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유는 처음으로 세계와 사물이 자신 밖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으로 전락하는 순간. 인간이 된 신은 절대적으로 불만족스럽다.
그에게는 정말이지 용납이 안 되는 이 오만가지 결여!
열을 받을대로 받아서 방 천장에 금이 가도록 낮밤으로 울어대는 이 인간이 된 신에게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손녀가 드디어 두 해 동안의 코마 상태에서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수트 두 벌을 맞춰 일본으로 날아온 할머니.
벨기에산 화이트 초콜렛의 맛을 보자 이빨도 안 난 손녀는 곧 분노를 잊는데 .
그야말로 할머니야말로 인생을 좀 아는 양반.
식물 상태를 벗어난 손녀는 비로소 언어를 익히며 인간의 세계에 적응해간다. 빗 속에서 수영을 한다든가, 맛난 음식을 먹는다든가,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본다든가 하는 감각이 주는 쾌락을 백 퍼센트 즐기면서. 사는 것도 할 만하군, 두살박이는 마침내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한편 유년기 아이들을 작은 신으로 간주하고 숭앙하는 일본 관습에 철저한 일본인 유모의 보살핌은 자신은 신이라는 아기의 확신을 한층 더 강화시킨다.
하지만 세번째 생일날 그토록 원한 코끼리 인형 대신 제일 밉스런 물고기, 잉어를 세 마리 받게 되는 재난이 발생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몇 년 후엔 외무관인 아버지의 발령지 변경에 따라 아기도 식구들과 함께 일본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따라서 일본인 유모와도 이별하게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이 통보된다.
이미 자신을 일본인으로 확정지어 놓은 아기는 그렇게 되면 자신은죽고 말거라고 항변하지만 , 어른들 귀에는 택도 없는 소리. 절대로 안 죽으니 걱정 말라는 대답만 돌아오는데.
간신히 식물 상태를 벗어난, 처음으로 지겹기 그지없는 죽음과 같은 완벽한 존재의 상태를 벗어나 살아 있는 인간이 된 아기는 이렇게 비통하게 자신의 깨달음을 서술한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떤 순간에 다다르면 모든 인간이 배우게 되는 것을 나 또한 배운 것이다. 결국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잃는다는 사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모두가 우리에게서 박탈될 거라는 사실. ... 삶은 우리가 상실하는 것들에 대한 애도와 비탄으로 수놓인다. 사랑하는 전원을, 산을, 꽃을, 집을, 유모 니시오상을, 그리고 모국어인 일본어를. 게다가 이건 오직 끝없이 이어지는 상실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렇게 잃는 것들 중 어느 것도 우리에게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
생일선물로 주어진 잉어 세마리의 끼니를 챙겨주는 일은 아기를 더욱더 깊은 절망으로 빠뜨린다.
먹이를 떨어뜨릴 때마다 수면으로 용솟음치며 몸통 너비로 사정없이 아가리를 벌려대는 잉어들의 모습이 징그럽기 그지 없는 것이다. 사정없이 아가리를 벌려 속창시를 다 내보이는 숭악한 잉어들. 차에 깔려 납작사한 개구리를 보는 일이라든가 똥으로 자기를 만드는 일 같은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역시 한 때 신이었던 아기라 이런 깨달음에 도달하는 일도 뭐 식은죽먹기.
"잉어들의 속창시가 징그럽다구? 그게 바로 네 속창자가 생겨먹은 모양이야. 그게 그렇게 징그럽다면 아마 잉어들의 속창시에서 너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겠지. 이게 바로 인간들의 모습이란 걸 모르니? 잉어들보다야 좀 덜 탐욕스럽게 먹긴 해도 인간들도 잉어와 마찬가지로 먹잖아. 그리고 네 엄마와 언니의 위장 속도 꼭 잉어들의 속창자 같이 생겼어. 너만은 잉어와 다르다고 생각하니? 너는 튜브에서 떠오른 또다른 튜브야. 최근에 넌 네가 뭔가 좀 대단한 생각을 하는 존재라고 믿으면서 너는 뭔가 특별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또라이. 넌 튜브고 평생 튜브일 뿐이야."
지겹고 지루한 튜브 상태를 벗어나 드디어 뭔가 멋진 삶에 진입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봤자 결국 삶은 또다른 튜브 상태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성과 속, 지루함과 징그러움.
"눈을 떠봐. 삶이란 네가 바로 지금 보는 것이야. 점막, 속창자, 바닥도 없이 채워지기만 요구하는 구멍, 삶은 끊임없이 삼키지만 언제나 비어 있는 튜브야."
밥맛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아기는 잉어들이 사는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하지만 여의치 않아 미수에 그친다.
잉어에게 밥주는 일만은 고만 좀 했으면 좋겠다는 호소도 그럼 엄마와 함께 하면 된다는 답변으로 인해 묵살되고 만다.
그리고 아기 왈,
세살 이후로 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존재와 무, 삶과 죽음에 대한 가벼운 트위스트 정도로 읽으면 딱 좋다.
세살짜리 주제에 엄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