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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cing (Paperback)
Ryu Murakami / Bloomsbury Publishing PLC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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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이 책 번역됐을 것 같은데 알라딘에서 검색해도 안 나온다.그래서 그냥 영어본으로 올린다. 어짜피 그게 내가 읽은 거긴 하니까.... 정말 변역 안 되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절판인가... 


시애틀 헌책방에서 눈에 뜨이길래 집어들었다. 무라카미 류의 책은 처음 읽어보는 거였다. 읽히기는 죽죽 읽혔지만 사분의 삼까지는 별로 감동이 없었는데, 마지막 사분의 일 부분 때문에 이 소설은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숨을 못 쉬었다.

그냥 그런 많은 이야기 중의 하나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 장면의 그 피어싱 이미지가 순식간에 소설 전체를 시로 돌변시켰다. 

이렇게도 소설을 쓸 수 있구나, 하고 좀 놀랐다.


도입부와 소재가 식상하다고 생각되어도 끝까지 읽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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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끝 그리폰 북스 18
아서 C. 클라크 지음, 정영목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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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서 클락의 1953년작 공상과학 소설 <유년기의 종말>은 흥미로운 소설이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어느 날 오버로드라 불리는 외계인들이 지구를 점령하고 그들의 우세한 기술력과 군사력을 이용, 지구를 식민지화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버로드가 지구를 점령한 이래로 국가간의 분쟁도 사라지고 지구는 모처럼 평화를 누리지만, 전쟁을 억제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요구사항이 없는 오버로드의 동기는 수상쩍기 짝이 없다. 인간들을 평화롭게 살게 하려는 목적으로 먼 우주를 건너 지구까지 왔단 말인가? 오버로드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의심은 오직 부풀려지기만 할 뿐이다.

이 소설이 인상적으로 읽히는 이유는 아서 클락이 인류라는 종이 물리적 신체와 각 인간을 구별시키는 개인성을 상실하고 우주정신(!)이랄까 뭐 우주에 편재하는 정신력에 통합되는 방향으로 진화할 거라는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서 아주 공상과학스럽고 또 인류의 근본적 상상력에 부합하는 (불교나 힌두교를 생각해 볼 때) 줄거리를 펼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열심히 읽고 있으면 추상주의자 몬드리안의 "바다"가 자꾸만 떠오른다.



그런데 나는 그다지 이런 소설의 소재 설정에는 오히려 별로 관심이 가지 않고, 주인공 잰 로드릭의 흥미진진하다기 보다는 무용하고 서글프게 허무한 인생역정에 가슴이 찢어졌다. 잰 로드릭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고 무슨 기술력을 가졌는지도 이해할 수 없는 거의 전능해보이는 오버로드들의 정체를 알아내겠다는 일념으로 오버로드들의 행성으로 발사되는 우주선 안에 몰래 숨어든다. 오버로드들의 행성에서 그는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되는데, 그건 우주의 많은 종들이 저마다 결국엔 우주정신에 편입되는 진화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오버로드들은 전능하기는 커녕 사실은 이 우주정신에 복속되어 노예생활을 하는 슬픈 족속, 우주정신으로 진화하지 못한 채 도태된 열등한 종으로 우주정신의 뜻에 따라 다른 우주의 종들의 진화과정을 돕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는 신세일 뿐이다. 오버로드들은 로드릭에게 마침내 인간 종의 진화가 시작되었다며 이제 지구로 돌아갈 때라고 말한다. 로드릭에게는 오직 몇 달 걸린 여정이었지만 지구에서는 몇 백년이 흐른 후라 돌아온 고향 행성에서 그가 발견하는 것은 벌거벗은 채 언어를 모르고 한 대륙에 뭉쳐 순수 정신이 되어가는, 신체를 지닌 인류의 마지막 후예인 아이들이다.

로드릭은 인류의 마지막 진화가 완성되는 시점에 홀로 남은 태고적 인간으로 누가 읽을지 모르는 인류 최후의 진화과정을 기록한다. 혼자서 아무도 없는 텅빈 지구에서. 내가 읽은 그 어떤 소설에도 이보다 더한 고독은 없었다. 아무리 사람 사이에서 경험하는 외로움이 혼자 있을 때의 고독보다 더하다 해도 인간 종 자체가 사라진 텅 빈 행성의 마지막 인간의 그것에 비할 바 있으랴.

고독의 최절정, 호기심에 가득차 목숨을 걸고 모험을 감행한 물리학자 로드릭을 기다린 운명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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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8 1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0 2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1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1 1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Gateway (Paperback)
Frederik Pohl / Del Rey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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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폴의 1977년작인 이 소설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심란하다. 책 표지만 보면 인간들보다 훨씬 우월한 과학기술의 진보를 이룩한 외계인, 히치들의 유적에 남겨진 우주선을 타고 미답사된 우주를 모험한다는 내용으로 그야말로 박진감이 넘친다 싶지만,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하면 그런 기대는 금새 증발하고 만다.

연도가 딱히 정해지지 않은 채 막연히 미래로 설정된 소설 속의 인간들은 현재의 인간들만큼이나 고단하게 살아간다. 주인공 로비넷 브로드헤드는 별볼일 없는 식품광산 광부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도 식품광산의 광부로 막장인생을 살아간다. 식품광산의 광부 일이란 뭔가 조금만 잘못 되어도 자칫 굴에 갇혀 죽기 십상인 위험천만한 직종. 월급도 쥐꼬리만해서 미래라곤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운좋게 복권에 당첨된 브로드헤드. 무난하게 살면 가족을 꾸리고 배곯지 않고 평생 살 수 있을 만한 돈이지만, 출구 없는 인생이 답답하기만 한 젊은이인 그는 즉시 당첨금을 탈탈 털어 게이트웨이로 가는 표를 산다. 게이트웨이는 히치들이 오십만 년 전에 남겨둔 유적으로 일종의 우주정거장. 우주정거장엔 수백척의 히치 우주선들이 남겨져 있다. 게이트웨이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히치 우주선을 타고 미지의 우주 어딘가에 남겨져 있을 히치 유물을 찾아 모험을 떠난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그럴 듯 하지만 실은 상당히 중대한 문제가 있다.

아무도 히치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는 사실. 나아가 아무도 히치 우주선의 작동원리를 모른다는 사실. 과학자들이 기껏 발견해낸 것이라고는 어떻게 히치 우주선에 전원을 넣고 끄는지 작동 버튼을 누르는 지가 고작이다. 우주선의 원료가 뭔지, 우주선의 항해 시스템이 무언지, 출발 버튼을 누르면 우주선은 어디로 가는지, 항해는 얼마나 걸릴지, 항해 중엔 어떻게 항로를 조정하는지 같은 것도 전부 그러니까 써프라이즈다.  서점에선 전체가 빈 종이로 채워진 <히치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라는 책이 판매대에 어엿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운이 좋아서 우주선이 도착한 곳에서 히치 유물이라도 하나 찾아서 돌아온다면 평생 편히 먹고 낡은 장기도 때 되면 갈 수 있는 총체적 의료보험도 구입해 150년쯤 행복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되느냐가 전혀 계산불가능이라는 것이 문제다.

용감무쌍하게 목숨을 걸고 인생의 운을 시험하러 왔지만 러시아룰렛이나 다름없는 이 모험 앞에서 송장마냥 얼어붇는 브로드헤드.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그는 5인용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나간다. 우주선 안은 식량과 탐사장비와 사람으로 가득차서 발붙일 틈조차 없고 식량의 반쯤이 소모될 쯤까지도 우주선이 멈추지 않자 우주선 안은 긴장과 적의와 불안으로 가득 찬다. 항해 시간에 따라서 오 인 중의 한두명이 희생되어야 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도 살아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강건한 정체불명의 특수 금속으로 만들어진 히치 우주선은 행선지가 불타는 태양 위건 막 생성된 위험천만의 태양계건 폭발하거나 산산조각이 나지 않는 한 언제든지 출발지인 게이트웨이로 돌아간다. 우주선 속의 인간들이야 살아 있건 말건 간에.

우주선이 드디어 행선지에 도착하고 남은 식량으로 볼 때 뽑기를 해서 누군가 자살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브로드헤드와 동승한 다른 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만 그것도 잠시 뿐. 눈을 씻고 주변을 탐사해봐도 히치 유물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것이 다. 목숨을 내걸고 작동원리도 전혀 알 수 없는 외계인 우주선을 타고 몇 달을 고생하며 간신히 행선지에 도착했건만 보물이라곤 찾을 수 없다. 돌아가는 길은 살아서 도착하리라는 위안을 빼면 오던 길보다도 더 비참하고, 돌아가면 다시 한 번 목숨을 걸어야 하는 모험을 떠나야 한다.

브로드헤드는 두번째 여행에서도 살아 돌아오지만 그건 어이없이 짧고 보물 따위는 찾을 수 없는 종류였다. 게다가 성질머리 때문에 값을 따질 수 없는 일인용 히치 우주선마저 완전히 고장을 내버리는 바람에 그는 땡전 한푼 없는 신세에서 빚더미에 올라앉은 신세로 전락한다.

될대로 되라는 심사가 된 브로드헤드는 거액의 급료가 지급되는 위험천만한 과학답사여행에 자원한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고 살아서 돌아가기만 하면 상당한 보상액을 받을 수 있는 여행이지만 도착한 행선지는 그 누구도 살아 나올 수 없는 블랙홀.

이 정도 되면 그야말로 가슴이 찢어지는 공상과학소설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은 실망이라는 블랙홀이 가득찬 우주 같다. 위안이라고는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떠나서 도착하는 곳은 또다른 실망이 기다리는 친숙한 절망의 나락 뿐이다.

과학답사여행에 파견된 우주선은 두 척. 승무원 중 과학에 빠삭한 한 이가 묘안을 낸다. 어짜피 살아 나가기는 틀렸으니 모험을 해보자는 것. 두 척 중의 한 척에 전부 올라타고 다른 한 척에 각 우주선에 한 대씩 붙은 착륙선을 둘 다 부착해 가속시키면 두 우주선 중 하나는 블랙홀을 향해 돌진하고 그 반사력으로 다른 우주선은 블랙홀을 탈출하기에 충분한 속력을 얻지 않겠냐는 아이디어다.

이론은 좋지만, 문제는 어느 우주선이 블랙홀로 떨어지고 어느 우주선이 블랙홀을 탈출할 것이냐는 걸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 선택은 다시 한 번 눈먼 뽑기가 된다.

준비를 마치고 두 우주선에 타고온 승무원들이 전부 한 우주선으로 옮겨가는데, 인생이 지긋지긋한 브로드헤드는 혼자서 다른 우주선에 남는다. 우주선 중 하나에 함께 묶인 두 대의 착륙선에 가속도가 주어지고, 우주선 하나는 블랙홀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고 다른 하나는 게이트웨이를 향해 되돌아간다. 브로드웨이가 몹시 사랑했다는 여자친구는 블랙홀로 한없이 천천히 떨어져간다.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하는 블랙홀에서는 시간이 거의 정지된 듯한 속도로 천천히 그리고 점점더 천천히 흐른다. 일 초가 일 년으로 다시 십 년으로 한없이 한없이 느려진다. 단신으로 답사여행에서 살아 돌아와 거액의 보상금을 홀로 움켜쥐고 안락하고 호사스런 생활을 영위하며 브로드헤드가 수 년의 나이를 먹어가는 동안에도 그래서 우주 저 끝 블랙홀에서는 그의 생존의 대가로 블랙홀에 남겨진 그의 여자친구와 동승했던 승무원들이 여전히 한없이 천천히 블랙홀 안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게다가 그들에게 시간은 아직도 그들이 블랙홀에 도착한 이래 겨우 몇 분 밖에 지나지 않은 시각.

내가 그들을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직도 나는 그들을 죽이고 있다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브로드헤드는 그의 정신분석 전문의 로봇, 지그프리드를 향해 외친다.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이건 사는 게 아니라고.

그런 고통 같은 것을 로봇인 자신은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월등한 인공지능의 소유자, 로봇 지그프리드는 이렇게 답한다. 바로 그것이 삶이라고. 그리고 로봇인 자신은 결코 완전히 경험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서 지그프리드 자신은 그 인생을 매우 부러워한다고.

어떻게 보면 일확천금이지만 사실은 복권 한 장으로 인생을 불살라버린 거나 마찬가지가 된 브로드헤드의 지루하고 서글픈 모험을 그린 이 작품은 단연 특별한 종류의 공상과학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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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8-03-03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검둥개님 ^^ 꾸벅... 그냥 눈에 띄어서 왔습니다. "무난하게 살면 가족을 꾸리고 배곯지 않고 평생 살 수 있을 만한 돈"이 있어도 제 삶이 크게 달리질지는 모르겠네요.............. 라고 썼다가, 정작 많은 사람들이 그런 행운을 누린다면 자기가 알건 모르건 조금은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SF란 다 그런 건가요? 다 자기 사는 것에 대한 불만은 있지만, 또 그것이 아닌 삶을 일굴 수는 없는... 이렇게 살건, 저렇게 살건, 저보다 잘 사는 사람은 있는 법이고.... 또 그들이 부럽고..... 혹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있다면 다행히 그들에게 뭔가 내가 해줄 게 있다는 것 아닐지.. 그래서 사는 게 조금은 낫고...

검둥개 2008-03-07 01:2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에로이카님.
그러게 인생이 지리멸렬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기분전환을 하려고 집어든 공상과학 소설마저도 기대를 배반하기도 하고요. ^^

2008-03-08 0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08 0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08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문학세계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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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이나 표지가 확 깬다. 원제는 불어로 <튜브의 형이상학>, 영어로는 <비의 본성> 으로 번역되었으니 한국어권 및 영어권 번역자들 다 제목 정하는 데 고생 좀 한 모양이다. 그냥 <튜브의 형이상학>이라고 직역하는 것이 차라리 내용을 가늠하는 데는 수월했을 것을.

덕분에 한국 번역본 제목을 찾는 데 고생 좀 했다.

튜브가 도대체 어떤 종류의 것이냐, 하는 질문에는 아래의 이태리(?) 번역판 표지가 좋은 답을 준다.

연고 튜브같은 것이 아니고 일종의 소화관 같은 무조건 삼키고 배설하는 종류의 튜브다.
표지 그림도 역시 이태리판이 제일 맘에 든다는.







책 표지 이야기는 그만 하고 내용으로 넘어가면, 배경은 70년대 일본,

주인공은 태어나서 두 살이 될 때까지 미동도 없이 아무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소화관처럼 먹고 싸는 일 외에는 전혀 하지 않는, 그래서 부모에게 "식물"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우는 벨기에 부모를 둔 아기.  이 상태의 아기는 또한 신이나 다름없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기대하는 바도 없으며 아무 것도 지각하지 않고 거부하지 않으며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다. 아기의 삶은 신의 삶과 마찬가지로 완전하며 결여가 없다. 그래서 튜브 상태의 아기는 '사는' 게 아니라 단순히 '존재'할 뿐이다.

우연히, 뭔가 알 수 없는 사건이 이 신적 아기의 머리에 발생해,  처음으로 아기가 튜브상태를 벗어나는 순간이 온다. "식물" 아기가 귀찢어지게 울어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유는 처음으로 세계와 사물이 자신 밖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으로 전락하는 순간. 인간이 된 신은 절대적으로 불만족스럽다.
그에게는 정말이지 용납이 안 되는 이 오만가지 결여!

열을 받을대로 받아서 방 천장에 금이 가도록 낮밤으로 울어대는 이 인간이 된 신에게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손녀가 드디어 두 해 동안의 코마 상태에서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수트 두 벌을 맞춰 일본으로 날아온 할머니.

벨기에산 화이트 초콜렛의 맛을 보자 이빨도 안 난 손녀는 곧 분노를 잊는데 .
그야말로 할머니야말로 인생을 좀 아는 양반.

식물 상태를 벗어난 손녀는 비로소 언어를 익히며 인간의 세계에 적응해간다. 빗 속에서 수영을 한다든가, 맛난 음식을 먹는다든가,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본다든가 하는 감각이 주는 쾌락을 백 퍼센트 즐기면서. 사는 것도 할 만하군, 두살박이는 마침내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한편 유년기 아이들을 작은 신으로 간주하고 숭앙하는 일본 관습에 철저한 일본인 유모의 보살핌은 자신은 신이라는 아기의 확신을 한층 더 강화시킨다.

하지만 세번째 생일날 그토록 원한 코끼리 인형 대신 제일 밉스런 물고기, 잉어를 세 마리 받게 되는 재난이 발생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몇 년 후엔 외무관인 아버지의 발령지 변경에 따라 아기도 식구들과 함께 일본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따라서 일본인 유모와도 이별하게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이 통보된다.

이미 자신을 일본인으로 확정지어 놓은 아기는 그렇게 되면 자신은죽고 말거라고 항변하지만 , 어른들 귀에는 택도 없는 소리. 절대로 안 죽으니 걱정 말라는 대답만 돌아오는데.

간신히 식물 상태를 벗어난, 처음으로 지겹기 그지없는 죽음과 같은 완벽한 존재의 상태를 벗어나 살아 있는 인간이 된 아기는 이렇게 비통하게 자신의 깨달음을 서술한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떤 순간에 다다르면 모든 인간이 배우게 되는 것을 나 또한 배운 것이다. 결국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잃는다는 사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모두가 우리에게서 박탈될 거라는 사실.  ...  삶은 우리가 상실하는 것들에 대한 애도와 비탄으로 수놓인다. 사랑하는 전원을, 산을, 꽃을, 집을, 유모 니시오상을, 그리고 모국어인 일본어를. 게다가 이건 오직 끝없이 이어지는 상실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렇게 잃는 것들 중 어느 것도 우리에게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


생일선물로 주어진 잉어 세마리의 끼니를 챙겨주는 일은 아기를 더욱더 깊은 절망으로 빠뜨린다.

먹이를 떨어뜨릴 때마다 수면으로 용솟음치며 몸통 너비로 사정없이 아가리를 벌려대는 잉어들의 모습이 징그럽기 그지 없는 것이다.  사정없이 아가리를 벌려 속창시를 다 내보이는 숭악한 잉어들. 차에 깔려 납작사한 개구리를 보는 일이라든가 똥으로 자기를 만드는 일 같은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역시 한 때 신이었던 아기라 이런 깨달음에 도달하는 일도 뭐 식은죽먹기.

"잉어들의 속창시가 징그럽다구? 그게 바로 네 속창자가 생겨먹은 모양이야. 그게 그렇게 징그럽다면 아마 잉어들의 속창시에서 너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겠지. 이게 바로 인간들의 모습이란 걸 모르니? 잉어들보다야 좀 덜 탐욕스럽게 먹긴 해도 인간들도 잉어와 마찬가지로 먹잖아. 그리고 네 엄마와 언니의 위장 속도 꼭 잉어들의 속창자 같이 생겼어. 너만은 잉어와 다르다고 생각하니? 너는 튜브에서 떠오른 또다른 튜브야. 최근에 넌 네가 뭔가 좀 대단한 생각을 하는 존재라고 믿으면서 너는 뭔가 특별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또라이. 넌 튜브고 평생 튜브일 뿐이야."

지겹고 지루한 튜브 상태를 벗어나 드디어 뭔가 멋진 삶에 진입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봤자 결국 삶은 또다른 튜브 상태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성과 속, 지루함과 징그러움.

"눈을 떠봐. 삶이란 네가 바로 지금 보는 것이야. 점막, 속창자, 바닥도 없이 채워지기만 요구하는 구멍, 삶은 끊임없이 삼키지만 언제나 비어 있는 튜브야."


밥맛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아기는 잉어들이 사는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하지만 여의치 않아 미수에 그친다.
잉어에게 밥주는 일만은 고만 좀 했으면 좋겠다는 호소도 그럼 엄마와 함께 하면 된다는 답변으로 인해 묵살되고 만다.

그리고 아기 왈,
세살 이후로 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존재와 무, 삶과 죽음에 대한  가벼운 트위스트 정도로 읽으면  딱 좋다.
세살짜리 주제에 엄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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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8-01-20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판의 제목과 표지는 아동도서같네요,,^^;;;
님의 리뷰를 읽으니 이 책을 사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어요~.
간만에 적당한 길이의 좋은 리뷰를 읽었습니다.

검둥개 2008-01-21 08:10   좋아요 0 | URL
정말 아동도서 같아요.
사실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요.
리뷰에 언급 못한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아서 저는 나름 즐겁게 읽었답니다.
짧아서 순식간에 읽을 수 있기도 했구요. ^^

치니 2008-01-21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통의 책은 언제나 이게 문제인 거 같아요.
여기서 '이게'란 , 리뷰에 언급 못한 재미있는 부분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최고야 라고 말하기엔 주저하게 만드는 그 무엇. ^-^;; 제 생각에요. 두서너권 읽고나서 또 찾아보지 않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듯 하고...

검둥개 2008-01-21 12:22   좋아요 0 | URL
별을 너무 후하게 줬나봐요
재미있다는 생각에 그만. ^^
전 노통의 책을 이것까지 포함해서 딱 두 권 읽었는데,
그냥 그렇단 말이죠?

치니 2008-01-22 13:07   좋아요 0 | URL
저도 두 권 읽었어요, 이 책은 안 읽었고, <오후 네시>와 <살인자의 건강법>을 읽었었는데
<오후 네시>를 읽었을 땐 전율이 오를만큼 이었다가, <살인자의 건강법>에서 좀 질리더라구요.
물론 잘 쓰긴 했지만...다음 책은 망설이게 되는.
하지만 이 책도 아직 보관함에 있어요. ^-^

검둥개 2008-01-24 0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두려움과 떨림>, 아주 재밌었어요. :-)

네꼬 2008-02-02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네꼬라고 합니다. 이주의 리뷰 보고 따라왔어요. (축하드려요~) 노통 책들은 정신 번쩍 들었던 게 반, 하품했던 게 반이었는데, 이 책은 제목이 좋아서 읽으려다가 표지가 표지가 표지가 그래서 안 읽고 있었어요. 근데 나비님 말씀따나 리뷰를 읽고 나니 인제 책 안 봐도 될 것 같아요. (^^) 근데 여기 오니까 나비님 치니님 다 계시네요. 종종 들르겠습니다. 하핫.

- 근데 근데 (나도 모르게 입을 내밀고) '아동도서'도 심오한 것 많다고요 뭐. :p

검둥개 2008-02-03 03:02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네꼬님. 고양이 얼굴 너무 귀여우십니다.
이주의 리뷰가 되었다니 놀랐어요.

저 아동도서 아주 좋아해요.
특히 그림이 많이 나오는 종류를요. ^^

프레이야 2008-02-03 0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정성껏 쓰신 글이네요. 원판과 이탤리판 책표지도 구경하구요.
원제의 느낌이 저도 훨씬 좋으네요. 튜브가 제겐 뱀처럼 보여요. 욕망하는 뱀이요.
그러니 늘 채워도 채워도 텅 빈 튜브처럼 허전할 밖에요, 우리 삶이..
전 노통의 살인자의 건강법과 적의 화장법을 읽었어요. 충격적인 반전이 기억에 남아요.
이 책은 앞부분을 좀 읽다가 덮은 게 벌써 몇년이나 되었네요. 당시 별로 와닿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버지 덕에 일본에 대한 동경을 많이 갖고 있는 작가 같더군요.

검둥개 2008-02-04 22:2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글쎄 원제를 그대로 썼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왜 굳이 바꿨는지 모르겠어요.
작가는 아무래도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기 때문에
많은 기억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시간 여행자의 아내 - 전2권 세트
오드리 니페네거 지음, 변용란 옮김 / 미토스북스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아도 입고 있던 옷과 신고 있던 양말에 신발, 떼운 이빨의 아말감까지 홀연히 남겨놓고 졸지에 사라져버리는 남자가 있다. 끊임없이 현재에서 미끄러지는 남자. 예측불허의 과거와 미래에 맨몸으로 내동댕이쳐지는 남자. 무사히 현재로 귀환하는 순간이 올 때까지 살아남기 위해서 잠긴 가게 열쇠를 따고 옷을 훔치고 길거리에서 남의 지갑을 털어야 하는 남자. 그래서 매일 아침 뛰고 또 뛰는 남자.

이 남자에게 현재는 비누거품으로 한없이 미끈거리는 빨래판, 삶은 시간의 못된 농담 같다. 시간이 이 사람을 무작위의 좌표로 내키는대로 쓸려보낸다. 마치 아무렇게나 끊임없이 자신을 흘려보내는 사람들에 대한 복수처럼.

껌딱지처럼 현재에 들러붙어 사는 우리에게도 하지만 시간이 잔인스럽기는 매한가지다. 돌아가고 싶은 과거는 굳게 닫혀 있고 피하고 싶은 미래는 오징어 흡판처럼 우리의 목덜미를 움켜쥔다. 이쯤 되면 시간여행자 헨리의 곤란한 삶이 남의 일만도 아니다.

시간여행자 헨리와 우리처럼 평범한 그의 아내 클레어는 이 시간의 압제 하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고전적이게도 그 답은 사랑과 믿음이다. 그리고 시간과 함께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것. 헨리와 다시 한 번 조우할 것을 기다리면서 47년 동안 클레어는 무엇을 했을까? 82살이 된 클레어의 뒷모습이 담긴 마지막 책장을 덮는 독자를 궁금하게 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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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2-16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님의 리뷰를 읽고 나니 더욱 책에 흥미가.. ^^
추천 누르고 갑니다.

검둥개 2006-02-17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낡은구두님 이 책 재미있답니다. 꼭 읽어보세요. ^^ 영화로도 만들어진다고 해요.

비로그인 2006-02-19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드디어 나왔군요. 끊임없이 현재에서 미끄러지는 남자라니 멋진 표현입니다 검둥개님.

검둥개 2006-02-20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런가요. ^^;;;
감사합니다. Manci님.

191970 2006-04-04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문단의 헨리의 소개. 참 좋네요-

검둥개 2006-04-10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1970님 처음 뵙네요.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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