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 아래 다시 생긴 점은 구태여 빼지 않을 작정이다 - 성미정


눈 밑의 점은 눈물점이란 얘기를

듣고 난 후 빼버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난 드라이한 사람이고 눈물

따윈 내게 어울리지 않으니까


구월 어느 날 비뇨기과에 가서

(우리 동네는 비뇨기과가 피부과도 겸하고 있다)

살 타는 냄새와 함께 점을 뽑았다


그런데 아직 여름 햇살이 남아

있는 탓인지 주근깨처럼 엷게 눈 밑의

점이 다시 올라오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나는 김수영이 그러했듯

내 눈 아래 다시 생긴 점을 구태여

빼지 않을 작정이다


김수영은 모든 곡은 눈물이고

눈물은 시인의 장사 밑천이라

빼지 않겠다고 시인다운 이유를 댔지만


나는 단지 그 비뇨기과에 다시 가기

싫고 살 타는 냄새를 두 번 맡고 싶지

않다는 전혀 시인답지 않은 이유로

빼지 않을 작정이지만


어쨌든 다시 빼지 않겠다는 점에

있어선 김수영과 다를 바 없고 엷은

주근깨처럼 눈물점이 올라오고 있는 건

그래도 내게 시인의 마음이 엷게나마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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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표지의 파일 - 임현정


그에 대한 기억들은 스테이플러로 모서리가 찍혀

얌전히 스크랩된다

그녀를 향한 사소한 인사말도 파일에 담겨 있다

검은 표지의 파일은 사무적인 표정으로 묵묵히 일한다

어두운 표정의 것들이 그렇듯

그녀는 눈에 띄지 않는다

사람들은 때론 모나미 볼펜 같다고 생각한다

볼펜 자국 같은 일상이 지나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스르르 넘어가는 비닐의 장정들

오늘은 그가 나를 보고 웃 - 었 - 다

웃는 모습을 가위로 오린다

기억은 꼼짝없이 갇힌다

그녀는 두터운 파일을 말끔히 정리했다

언젠가 검은 파일은 정리된 내용들을 펼칠 것이다

그는 잘 말려들어가 종이 몇 장으로 추억된다

갑자기 두터운 파일 안에 놓인 그는

한 장을 넘길 때마다 과장된 기억들과 마주친다

나날이 그녀는 두터워진다

하지만 파일은 지나간 것만 실을 뿐

그는 소리 내어 말할 것이다

당신의 기억 속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과장된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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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서울에서 한국책을 산더미로 부쳐왔다.

작은 소포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커다란 상자 속에 수년간 구경도 못한 신간들이 가득 차 있다.


갑자기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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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cing (Paperback)
Ryu Murakami / Bloomsbury Publishing PLC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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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이 책 번역됐을 것 같은데 알라딘에서 검색해도 안 나온다.그래서 그냥 영어본으로 올린다. 어짜피 그게 내가 읽은 거긴 하니까.... 정말 변역 안 되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절판인가... 


시애틀 헌책방에서 눈에 뜨이길래 집어들었다. 무라카미 류의 책은 처음 읽어보는 거였다. 읽히기는 죽죽 읽혔지만 사분의 삼까지는 별로 감동이 없었는데, 마지막 사분의 일 부분 때문에 이 소설은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숨을 못 쉬었다.

그냥 그런 많은 이야기 중의 하나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 장면의 그 피어싱 이미지가 순식간에 소설 전체를 시로 돌변시켰다. 

이렇게도 소설을 쓸 수 있구나, 하고 좀 놀랐다.


도입부와 소재가 식상하다고 생각되어도 끝까지 읽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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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거울은 빛나건만 - 황인숙


문득 튀어 일어나

아무에게고 전화를 걸고 싶네.

아무 번호나 눌러

아아아아아 끔찍해요!

그 목소리 외침일지, 속삭임일지

입을 열기도 지긋지긋해

짐승 같은 흐느낌일지.


살아갈 날들이 두렵지도 않아.

오직 '살아 있음'이

나를 꽁꽁 염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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