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에서 동명의 시집이 나온 것이 1993년이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연도에 눈이 간다.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 이성복


1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짐 실은 트럭 두 대가 큰길가에 서 있고 그뒤로 갈아엎은 논밭과 무덤, 그 사이로 땅바닥에 늘어진 고무줄 같은 소나무들) 내가 짐승이었으므로, 내가 끈적이풀이었으므로 이 풍경은 한번 들러 붙으면 도무지 떨어질 줄 모른다

 

2

국도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노란 개나리꽃, 배가 빵그란 거미처럼 끊임없이 엉덩이를 돌리며 지나가는 레미콘 행렬, 저놈들은 배고픈 적이 없겠지 국도변 식육식당에서 갈비탕을 시켜 먹고 논둑길 따라가면 꽃다지 노란 꽃들 성좌처럼 널브러져 있고, 도랑엔 처박혀 뒤집혀져 녹스는 자전거, 올 데까지 온 것이다

 

3

운흥사 오르는 길 옆, 산에는 진달래 물감을 들이부은 듯, 벚나무 가지엔 널브러진 징그러운 흰 꽃, 거기 퍼덕거리며 울음 울지 않는 것은 바람에 불려 올라간 검은 비닐 봉지, 안 될 줄 알면서도 한번 해보는 것이다 꽃핀 벚나무 가지 사이에 끼어 진짜 새처럼 퍼덕거려보는 것이다

 

4

아파트 옥상마다 신나게 돌아가는 양철 바람개비, 언젠가는 저리 신나게 살 수도 있었을까 청도 각북 용천사 가는 길, 산 능선을 타고 건장한 송전탑들 이어지고 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진달래 꽃불, 저를 한 마리 꽃소로 만드는 것도 산은 알지 못한다

 

5

흐린 봄날에 연둣빛 싹이 돋는다 애기 손 같은 죽음이 하나둘 싹을 내민다 아파트 입구에는 산나물과 찬거리를 벌려놓고 수건 쓴 할머니 엎드려 떨고 있다 호랑가시나무,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그런 나무 이름, 오랫동안 너는 어디 가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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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2 -진은영

 

 

맞아 죽고 싶습니다
푸른 사과 더미에
깔려 죽고 싶습니다


붉은 사과들이 한두 개씩
떨어집니다
가을날의 중심으로


누군가 너무 일찍 나무를 흔들어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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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 - 이정록

그릇 기(器)라는 한자를 들여다보면
개고기 삶아 그릇에 담아놓고
한껏 뜯어먹는 행복한 식구(食口)들이 있다
작은 입이 둘이고 크게 벌린 입이 둘이다
그 중 큰 입 둘 사라지자 울 곡(哭)이다
식은 개고기만 엉겨붙어 있다
개처럼 엎드려 땅을 치는 통곡이 있다

아니다, 다시 한참을 들여다보면,

기(器)란 글자엔 개 한 마리 가운데 두고
방싯방싯 웃는 행복한 가족이 있다
옹기종기 그릇이 늘어나는 경사가 있다
곡(哭)이란 글자엔, 일터에 나간 어른 대신
남은 아이들 지키느라 컹컹 짖는 개가 있다
집은 제가 지킬게요 저도 밥그릇 받는 식구잖아요
밤하늘 별자리까지 흔들어대는 목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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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관을 짜는 남자 - 임현정


한밤까지 이어지는 못질 소리

심장에 박아대는 것 같아


피 묻은 대못들이 모여

아무리 대문을 두드려도

주인은 나오지 않아

열쇠장이는 따따블을 부르고

두근대는 호기심은 따따따블이야


현관에 세워져 있는 껍질이 벗겨지 통나무들

아니 조금씩 관을 닮아가는 것들

지나치게 아늑해 보여


그는 작업실에 있었어

아주 흔한 얼굴의 사나이

죽은 새를 넣는 작은 관부터

거구의 남자가 주문한 대형 관까지


어둠이 고인 유리 진열장 안은

심해에 가라앉은 난파선처럼 고요했지


막 완성된 관은 아주 작았어

그는 곁에서 젊은 여자에게

말없이 작은 관을 건넸어

여자는 문득 두고 온 아이가 생각났지.

꼭 그 사이즈였어


관 귀퉁위마다 적혀 있는 이름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대이동이 시작되었어

상냥한 남자는 일일이 손을 흔들어주고

간혹 주문 품목을 손수 메고 가는 성급한 고객들도 있었어

개미 떼처럼 지루한 행렬


별이 없는 밤

반짝이는 못대가리는 밖에서만 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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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운묵서(玄雲墨書) - 이정록

겨울 논바닥
지푸라기 태운 자리
얼었다 풀렸다
검게 이어져 있다

산마루에서 굽어보니
하느님이 쓴 반성문 같다

왜 이리 말줄임표가 많지?

겨울 새떼들이
왁자하게 읽으며 날아오르자
민망한 듯 큰 눈 내린다

반성문을 쓸 때
무릎 꿇었던, 쌍샘에서
소 콧구멍처럼 김이 솟아오른다

온 들녘에, 다시
흰 종이가 펼쳐지자
앞산 뒷산이
깜깜하게 먹으로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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