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 김수영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별을 보며 - 이성선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행구어 비치는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사랑스런 추억 -윤동주



봄이 오든 아침, 서울 어느 조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가고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합숙훈련 - 황인숙


남들은 잠도 잘 못 잔다는데
나의 '과거집착 후회원망
좌절감 염세비관 의욕상실
열등감 대인공포 호흡곤란
우울 예기불안 악성피로
성급한 행동 긴장 강박관념
망상 집념 권태
브리핑공포 회의공포
자기집착 게으른 성격'은
잘 먹고 때 되면
잠도 잘 자
건강하게 자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문지에서 동명의 시집이 나온 것이 1993년이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연도에 눈이 간다.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 이성복


1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짐 실은 트럭 두 대가 큰길가에 서 있고 그뒤로 갈아엎은 논밭과 무덤, 그 사이로 땅바닥에 늘어진 고무줄 같은 소나무들) 내가 짐승이었으므로, 내가 끈적이풀이었으므로 이 풍경은 한번 들러 붙으면 도무지 떨어질 줄 모른다

 

2

국도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노란 개나리꽃, 배가 빵그란 거미처럼 끊임없이 엉덩이를 돌리며 지나가는 레미콘 행렬, 저놈들은 배고픈 적이 없겠지 국도변 식육식당에서 갈비탕을 시켜 먹고 논둑길 따라가면 꽃다지 노란 꽃들 성좌처럼 널브러져 있고, 도랑엔 처박혀 뒤집혀져 녹스는 자전거, 올 데까지 온 것이다

 

3

운흥사 오르는 길 옆, 산에는 진달래 물감을 들이부은 듯, 벚나무 가지엔 널브러진 징그러운 흰 꽃, 거기 퍼덕거리며 울음 울지 않는 것은 바람에 불려 올라간 검은 비닐 봉지, 안 될 줄 알면서도 한번 해보는 것이다 꽃핀 벚나무 가지 사이에 끼어 진짜 새처럼 퍼덕거려보는 것이다

 

4

아파트 옥상마다 신나게 돌아가는 양철 바람개비, 언젠가는 저리 신나게 살 수도 있었을까 청도 각북 용천사 가는 길, 산 능선을 타고 건장한 송전탑들 이어지고 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진달래 꽃불, 저를 한 마리 꽃소로 만드는 것도 산은 알지 못한다

 

5

흐린 봄날에 연둣빛 싹이 돋는다 애기 손 같은 죽음이 하나둘 싹을 내민다 아파트 입구에는 산나물과 찬거리를 벌려놓고 수건 쓴 할머니 엎드려 떨고 있다 호랑가시나무,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그런 나무 이름, 오랫동안 너는 어디 가 있었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