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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맛과 추억
황석영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바베트의 만찬이나 투스카니의 태양 같은 영화를 보고나면 음식에 대한 시각이 확 달라진다. 허기진 배를 채워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먹어야 된다, 에서 삶을 즐기는 데 필수적인 향신료 같은 그 무엇이 바로 음식이다, 하는 식으로. 이 책을 읽고나서 성장기에 음식복이 없었던 것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밥을 굶는 일은 없었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음식도 없는 것이다. 기껏해야 아홉살 때 한 점 먹어본 돈까스, 여의도 시내에서 먹었던 짜장면 (완두콩이 뿌려져 있는 것이 동네 짜장면과 달라 엄청나게 고급스럽다고 생각했었다.), 친구 생일날 처음 먹어본 탕수육 같은 것이 인상적인 음식 리스트의 전부라니! 갑자기 초라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 서로 다른 지방 출신인데도 그 지역의 난다 하는 음식은 커녕 흔하다 하는 음식도 먹어본 게 없고, 집에서 먹어본 특이한 음식으로 손에 꼽을 수 있는 거라곤 양미리 졸인 것이 고작인데, 보잘 것 없는 양미리 같은 게 식도락 목록에 낄 날은 세상이 뒤집히기라도 하지 않는 한 오지 않을 것이다.
문화도 경험을 해봐야 즐길 수 있는 것인데, 먹는 일을 문화로서보다는 주로 주린 배나 그때 그때 채우는 식으로 해치우며 살다보니 요리책에 눈길을 주게 된 건 어른이 되고도 아주 한참이 지나서였다. 요즘은 서점에서 칼라로 화려하게 인쇄된 멋진 요리책을 보면 이스트가 들어간 밀가루 반죽 마냥 마음도 부풀고 당장 장을 보러 나가서 낯설기만 한 이름을 가진 채소며 식재료를 잔뜩 사오고 싶다. 랄랄라 노래를 부르며 호박을 썰고 달걀을 풀고, 즐겁게 음식을 준비해 알록달록한 그릇에 멋지게 차려낸 다음, 행복하게 음미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싶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간신히 퇴근해서 피곤해 죽겠는 마당에 배가 고프다는 것도, 먹을 것을 직접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도, 먹고 난 그릇을 치워야 한다는 것도 끔찍스럽기 그지 없는 일들에 불과하다. 음식을 만들며 노래를 부른다는 건 택도 없는 일이다. (언젠가 잡지에서 하루 중에 제일 스트레스가 심한 시간이 바로 퇴근하고 집에 와서 저녁식사를 하기까지의 시간이라는 기사를 읽었는데 체험상 그건 정말 맞는 말이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집어들고 뜨아한 생각에 한참 표지를 들여다봤다. "삼포 가는 길"이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같은 책을 쓴 작가는 먹는 일에도 아주 스파르탄 같은 사람일 거라고 혼자서 엄한 추측을 맘대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 <노티를 꼭 한 점만 먹고 싶구나(초판 제목)>에는 정말 별별가지 음식이 다 나온다. 그 중에는 군대에서 서리해 철모에 삶아먹은 닭이나 감옥에서 요구르트 + 곰팡이 피운 빵 + 원기소를 섞어 담가 먹었다는 술이 있는가 하면 김일성이 루이제 린저에게 대접했다는 시꺼먼 언감자 국수 같은 이북 음식도 있고, '가즈파초 수프', '파에야', '되너 케밥', '리볼리타' 같은 생뚱스런 유럽 음식도 있다. 해서 책을 읽어가다 보면, 이 양반 자시기도 이것저것 정말 많이 자셨구만,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된다.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음식이 이어질 때마다 입맛을 다시며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치기 어린 배신감도 느꼈다. 그렇게 치열한 삶도 얼마든지 맛난 음식만 잘 먹으면서 살 수 있는 거였단 말인가, 하고! 하지만 그런 배신감은 음식에 얽힌 이야기 얻어듣는 재미로 금새 다 잊혀졌다.
"변소에 들어가니 판자를 얹은 변기 구멍 위로 막대기 하나가 비죽이 올라와 있다. 이건 뭣에 쓰는 막대기인고, 급한 대로 주저앉는데 갑자기 밑에서 꾸울,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돼지 대가리가 널판자 아래로 쑥 들어온다. ... 나는 혼비백산하여 얼른 바지를 추스르고 일어나 변소 밖으로 뛰어나와 버렸다. ... 밖으로 나와서 어쩔 줄 모르고 발을 구르며 서성대다가 하여튼 일이 급하여 다시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주저앉는데 또 꾸울, 한다. 그제서야 나는 구멍 위로 비죽이 솟아 있는 막대기의 쓰임새를 알아차렸다. ... 일도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대충 하고서 얼른 나온다. 나오면서 뒤를 돌아보니 돼지가 다시 울타리 판자 사이로 그 영리한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본다. 나는 뒤늦게야 돼지의 눈빛이 어째서 그렇게 영리해 보이는지를 집작했다. 그가 나를 보는 눈빛은 이를테면 "야, 밥 온다!"하는 느낌의 표정 그대로였기 때문일 것이다. 괘씸한 놈 같으니."
"홍어를 잡으면 암놈과 수놈은 가격에서 큰 차이가 난다. 수놈 홍어는 암놈에 비하면 헐갑이고 쳐주지도 않는다. ... 살 맛도 부드럽고 쫄깃하지 못하고 어딘가 퍽퍽한 느낌이다. 사 가는 사람이야 ... 어느 게 암놈이고 수놈인지 불간하기가 어렵다. 이때에는 생선을 뒤집에 배 아래쪽을 보면 된다. 물론 암수의 성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니, 물고기에 성기라니! 홍어는 다른 물고기들처럼 난생이 아니라 태생이다. ... 중간 상인들은 홍어가 들어오면 배를 뒤집어 살피고 나서 수놈 홍어의 '거시기'부터 얼른 떼어낸다. 암놈과 같은 가격을 받아 내려는 속셈에서다. 그래서 '만만한 게 홍어 거시기'가 되어 버렸다."
"올림픽 즈음이던가 ... 수감된 문인들 석방시켜 보려고 해외 문인들과 몇 차례 자리를 같이 했었는데, 누군가 짓궂게도 어치 하나 보려고 산낙지 회를 시켰다. 그들의 소스라치던 얼굴이 생각나서 지금도 웃음이 난다. 미국 펜 회장이던 수잔 손타그가 비명을 지르면서도 호기심 때문에 먹어보고는 연신 맛있다고 했다."
그 중엔 이런 애잔한 이야기도 있다.
"군에서는 가끔 발생하는 일이지만 ... 과식사고가 있었다. ... 당시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비상식으로 건방이 나왔는데, ... 어느 훈련병이 무려 다섯 봉지를 구해다가 낮에는 다른 녀석들 시선 때문에 먹지를 못하고 취침 시간에 개인 침낭 안에다 몽땅 털어 넣고 오물오물 먹기 시작했다. ... 그런 짓은 나도 가끔 해 보았고 ... 내 독자라는 헌병이 ... 건빵 한 봉지씩을 주었는데, ... 담요를 둘러쓰고 ... 천천히 씹어 먹었다. 그런데 아무리 조용하게 먹으려 해도 와삭거리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마치 천둥소리 같았다. 그 병사도 남들이 모두 깊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먹기 시작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하여튼 와사삭와사삭 씹어서 그 건빵 다섯 봉지를 새벽녘에 모두 해치웠건만, 취침시간에 화장실을 가도 신고를 해야 되는 터에 물을 마실 시간은 없었나 보다. 건빵이 비상 식량인 것은 백속에 들어가면 몇 배로 불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장은 물론 식도까지 꽉 막힐 수밖에. 그래서 한 젊은 병사는 행복하게 숨을 거두었다."
황석영이 음식과 함께 풀어놓는 이야기들 속엔 가출해서 돌아다니다 중이 되겠다고 절 음식 먹은 이야기, 감옥 가서 부침개 부쳐 먹은 이야기, 유럽에서 손으로 가자미 잡아 먹은 이야기, 해남 살 적에 매생이국 맛 본 이야기, 윤이상 선생이 개장국 소리에 혹해 나서다가 혹시라도 커리어가 끝장 날까봐 아쉽게도 포기한 이야기 등등이 고스란히 다 들어가 있다. 그는 천상 이야기꾼이라, 그 이야기들 듣는 것이 깨소금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