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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시가 아니다 세계사 시인선 139
이승훈 지음 / 세계사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시인은 이 시집 '자서'에서 현실을 그대로 옯기는 것에 최고의 관심을 둔다고 썼다. 자서를 읽고 심드렁해져서 현실을 그냥 옮기면 그게 뭐 시냐, 그냥 넋두리지, 이렇게 시집을 읽기도 전에 푸념을 했다. 현실을 그대로 보는 일이 뭐가 재미있고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 뭐 대단하냐, 이렇게 중얼거렸다.

모름지기 읽을 만한 시라면, 유하처럼 이렇게 멋지게 사랑을 호박꽃으로 꿀의 주막으로 환멸의 지옥으로 입이 딱 벌어지는 비유라도 보여주던가,

사랑의 지옥--서시 (유하)

 

정신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짓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새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난 지금 그대 황홀한 캄캄한 감옥에 갇혀 운다


아니면 신경림처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이렇게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하는 아포리즘이라도  줄줄이 박아 주어야 읽고 나서 서운치 않은 시지.

가난한 사랑의 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위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하품을 하면서 이승훈의 시집을 뒤적이며 읽는데, 정말로 현실이 한여름 수박에서 쪼개져나온 한 조각마냥 수박물을 뚝뚝 흘리며 걸어나왔다. 내가 팔 년전에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나온 세상이 이승훈의 시집 속에서 내게 예기치 않은 안부 인사를 건네왔다.

잡채밥 (이승훈)

학교 연구실에서 20년 매일 잡채밥을 시켜 먹는다 지치지도 않으십니까? 빗물 묻은 우비를 걸치고 배달 온 청년이 묻는다 다른 건 잘 못 먹어요 청년이 나가면 연구실 낮은 탁자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 맛없는 잡채밥을 먹는다 학생들이 연구실에 앉아 잡채밥 먹는 걸 보면 실망할지 몰라 문을 잠그고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오전 열한시 반 낡은 잠바 걸치고 앉아 고개 숙이고 잡채밥 먹는다 물론 다 먹지 못하고 남긴 그릇을 신문지에 싸서 연구실 문밖에 내놓는다



이십년 내내 매일 잡채밥을 시켜 먹는 인생. 별로 맛있지도 않지만 다른 것은 또 먹히지 않아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고개 숙이고 잡채밥을 먹는 인생. 특별히 서글플 것도 없고 특별히 감동적이거나 교훈적인 구석도 없이 그냥 하루하루 지나는 남루하고 먼지내 나는 일상이 서툰 사진사 손에서 찍혀 나온 사진처럼 빨랫줄에 널린 낡은 속옷처럼 시집 안에 걸려 있다.


화장실 문 (이승훈)

화장실 문이 잠겼네 화장실 문이 잠겼어! 난 화장실 앞에서 아내를 부르네 석준이 시키세요 아내는 말하지 그러나 거실에도 건넌방에도 석준이는 없고 그럼 송곳을 구멍에 대고 여세요! 그러나 아무리 손을 대도 문은 열리지 읺고 안 열려! 소리치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아내가 온다 이리 줘요! 아내는 쉽게 문을 연다



이승훈은 언어가 있으므로 시를 쓴다고, 할 일 없어 시를 쓰고 시 쓰는 데서 바라는 바가 없다고 ("언어가 있으므로 시를 쓴다") 한다.  하지만 정작 시인이라 스스로를 칭하는 사람이 아무 감상도 생각도 걸러내지 않는 매끈매끈하고 몰개성한 스케치북 같은 시를 쓰기는 얼마나 힘든가. 그의 많은 시의 마지막 구절은 종종  안타까운 사족이다.


고향 가게 (이승훈)

해 지는 가을 저녁 가게에 들른다 가게 총각은 인사도 없고 말도 없고 난 감자튀김 두 봉지를 들고 묻는다 하나는 노란 포장 하나는 붉은 포장이다 이 둘은 뭐가 다릅니까? 총각은 여전히 아무 표정도 없이 의자에 앉아 말한다 저도 모릅니다 저는 과자를 좋아하지 않아서 과자에 대해선 잘 몰라요 그럼 물건을 팔겠다는 거야? 뭐야? 속으로 중얼대며 감자튀김 두 봉지를 들고 나온다 물론 악의는 없다 너무 선량해서 문제지 안녕히 계세요 가게를 나오며 인사를 해도 대답이 없는 강원도의 가을 저녁



"물론 악의는 없다 너무 선량해서 문제지 안녕히 계세요 가게를 나오며 인사를 해도 대답이 없는 강원도의 가을 저녁," 이 한 줄만 삭제했다면 "고향 가게"는 "화장실 문"이나 "잡채밥"만큼이나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이승훈의 시는 그 안에서 시인의 바람이며 감상이며 시인의 목소리 자체가 사라질 때 성공한다. 한 두 자만  토를 달아도 현실을 보여준다는 그의 전략은 쉽사리 무너진다.

해 지는 가을 저녁 가게에 들른다 가게 총각은 인사도 없고 말도 없고 난 감자튀김 두 봉지를 들고 묻는다 하나는 노란 포장 하나는 붉은 포장이다 이 둘은 뭐가 다릅니까? 총각은 여전히 아무 표정도 없이 의자에 앉아 말한다 저도 모릅니다 저는 과자를 좋아하지 않아서 과자에 대해선 잘 몰라요 그럼 물건을 팔겠다는 거야? 뭐야? 속으로 중얼대며 감자튀김 두 봉지를 들고 나온다

마지막 줄을 잘라내면 이 시는 홍상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다. 무덤덤하고 조금 지루하고 조금 안달이 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채 중요치 않은 시간만 하염없이 흐르는, 부인할 수 없게 현실적인 공중 화장실 같은 나만의 만인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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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 2009-01-12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올해 개봉할 홍상수 영화의 제목이래요. 히히~

검둥개 2009-01-13 09:20   좋아요 0 | URL
이야 멋진 제목이예요. ^^

치니 2009-01-13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승훈이 별로 안 땡기던 이유가 일목요연하게 정리 되어 있는 리뷰입니다. 추천!

검둥개 2009-01-14 05:43   좋아요 0 | URL
이야, 추천 감사합니다. 치니님 ^^
몇몇은 좋았는데 몇몇은 그냥 그랬답니다.
자서와 책 뒷부분의 시론은 잘 이해가 안 갔지만 시인의 일상은 하여튼 눈에 선하더라구요.
잡채밥과 화장실문은 꽤 파워풀하다고 생각했어요.

2009-01-13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3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4 0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라닌 1
아사노 이니오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기분이 엿 같은 날이 뭐 하루 이틀인가. 호구지책을 마련하는 것보다 뭔가 더 중요한 걸 발견하고 싶다는 생각은 속수무책일 뿐이고 꿈보다는 언제나 고픈 배가 먼저다. <소라닌>은 이십대 초반의 대학을 갓 졸업하고 겨우 이년 사회생활을 한 젊은이들의 막막함을 그리고 있지만 삼십대나 사십대가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종류의 책이다. 막막함은 인생의 길이만큼 지속되고 마음은 나이를 먹지 않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과장이며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친구는 최근 무슨 생각으론지 갑자기 파마를 해서 졸지에 검은 양배추 머리가 됐다. 기러기 아빠가 될까 걱정된다는 친구는 아직도 뭔가 인생에서 중요한 걸 찾고 있는 걸까?

맘에 들지 않는 안정된 직장을 다니던 메이코는 하늘에 떠가는 풍선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에 직장을 때려치운다. 남들이 일하는 한낮에 모처럼 어슬렁어슬렁 산책을 즐기고 날씨가 좋은 날엔 빨래를 널고 이것저것 요리도 해보지만, 목적이 없는 자유는 지루하다. 메이코에 얹혀 프리터 노릇을 하던 남자친구 다네다는 메이코가 사표를 내자 앞으로 어떻게 살지 무서워 죽겠다며 길거리에서 울음을 터트린다.

세상은 그렇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게 무서운 곳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메이코의 말대로 '아무렴 어떠냐' 의 덩어리가 된 것일까?


배가 나와도 아무렴 어떠냐.
코털이 빠져나와도 아무렴 어떠냐
감옥만 안가면 아무렴 어떠냐.
마음 따윈 없다한들 아무렴 어떠냐.
어디선가 전쟁과 재해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도 자기만 행복하다면 아무렴 어떠냐.
이 회사는 월급이 괜찮으니까 아무렴 어떠냐.

학생 때처럼 회사도 설렁설렁 다니던 메이코는 호치키스는 서류의 오른쪽 위에 딱 두 개만 찍어야 한다는 규칙을 깜빡하는 바람에 결국 사표를 내지만, 학생 때처럼 회사를 죽어라 다닌다고 해도 회사나 학교나 평생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작 뭔가 인생의 용단을 내려야 할 사람은 메이코지만 정작 메이코는 엉뚱하게 망설이지 말고 하고 싶은 밴드를 하라고 다네다를 부추긴다. 유명 소녀가수의 백밴드로 활동하지 않겠냐는 제안에 정작 "싫습니다", 라고 멋지게 다네다 몫의 결단을 내려주는 것도 메이코. 아니나 다를까 이후로 더이상 다네다의 데모테입에 대한 관심은 없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갑자기 어른이 되라고 사회로 떠밀려진 메이코, 다네다, 친구들은 모두 우왕좌왕 어쩔줄을 모른다.
전쟁도 없고 세상은 평화롭고 여름 한낮의 태양은 그야말로 멋지게 쏟아지는데 말이다.

아빠네 약국에서 두통약 따위를 파는 인생을 막 시작한 친구 빌리의 말마따나,


개구리야
그럼 내 인생은 대체 뭐니
일년 내내
비바람을 맞아도
가게 매상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활기찬 웃는 얼굴로
이~딴 포즈를
하고 있지만
결국엔 우체통으로
오인되는 너의
역할이란!?

다네다는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제안하고, 메이코는 언제까지나 우리는 함께라는 그런 맘에도 없는 말은 그럼 왜 했느냐고 화를 터트린다. 물에 잔뜩 젖은 생쥐 꼴로 돌아오지만 마음이 가는 길을 알 수 없는 다네다에게 과연 어느 말이 마음에도 없는 말이고 어느 말이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을까. 역 앞 같은 사람들이 많은 데 가서 노래해 보려고 기타를 메고 신주쿠까지 가보지만,
그런 배짱이라고는 제로인 메이코가 정작 노래를 부르는 곳은 집 앞 개천가 뚝방.

왜 아이들은 그렇게 눈깜짝할 새 어른이 되고 어른들은 왜 그렇게 눈깜짝할 새 늙어버리는 걸까. 도통 늙어주지 않는 마음의 짐을 지고 어른들은 저녁마다 노래방에서 목청이 터져라 흘러간 옛가요를 열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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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3 1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4 0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육체는 슬퍼라
황인숙 지음 / 푸른책들 / 2000년 1월
절판


시란 주문이다. 어느 정도로 감각적인가 하는 것이 주술력의 척도다. 나는 행복한 감각을 깨우는 시를 쓰고 싶다. 경박할 정도로 명랑한 시. 따뜻하고 향기롭고 자유로운 시! 그런데 '심금을 울릴 정도로 명랑한 시'라는 것도 있나? 심금은 왜 비애에만 울리는 것일까? 내게 시를 쓰게 하는 애초의 감정은 비애다. 그런데 나의 비애는 말라있다.실패할 경우에는 뻣뻣할 정도로. 하지만 난 질척거리는 게 싫다. 그것이 문제다. 수분 함량을 조절하는 일. -89-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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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6-06-15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도 퍼갈래요. 공감 100프로.

검둥개 2006-06-15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럴 때는 산문집이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좀 되는 거 같아요. ^^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0
고미숙 지음 / 책세상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명쾌하고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다. 어떻게 한반도에서 오백년 봉건 왕조 신분제 사회에서 살던 사람들이 정신없는 구한말/일제강점 시기를 거치면서 민족국가의 민주주의 사회 국민이 되었는지, 또 그러한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들이 어떻게 지금의 한국인들의 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쳤는지 하는 것은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주변에서 미만하므로 별로 놀랍거나 의심스럽게 생각되지 않는 말과 태도와 행동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중 꽤 많은 부분은 근대로의 변화에서 기원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분야 연구에서 더 많은 진전이 있었으면 싶다. 

대학 시절에 고시공부나 취직공부를 죽자사자 하는 선배들이 있었는데, 그 중 성공한 한 사람은 천장에다가 칼을 매달아두고 공부를 했다는 전설이 있었다. 밤새서 공부하다가 졸기라도 하면 칼에 베어서 그야말로 피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으라고! 듣기만 해도 정신이 번쩍 나지 않는가. 고시건 취직이건 그렇게까지 해서 통과를 해야 한다는 건 지금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엽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늘 사람들의 고개를 감탄으로 주억거리게 만든다. (황영조나 임춘애를 생각해보라.) 뭐든지 죽기살기로, 특히 물질적으로 거의 목적의 달성이 불가능한 악조건 하에서 오직 정신력에 의지해 뭔가를 추구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엄청난 찬탄의 대상이 된다. 중학교 때 반장이었던 친구는 공부를 위해서 하루에 네 시간 이상은 자지 않는다고 했다. 왜 한국 사람들은 뭐든지 죽어라고 하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할까? 

이 책 1부 2장에서 저자는 구한말 개화기에 형성된 민족 담론의 특성을 고찰하는데,그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민족의 거처인 국가가 사라질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신의 우위를 적극 강조해야 하는 까닭이다."(44) 이 문장이 나온 맥락은 개화기에 강조된 이념 중의 하나가 민족의 발전을 위한 개인주의의 척결이다. 즉. 한국의 경우에는 민족담론이 막 형성되는 당시가 민족의 물질적 기반인 국가(=조선왕조)가 사라지는 순간과 일치하면서 정신으로서의 민족이 극도로 강조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1909년 4월 29일자 대한매일신보 논설 중 일부가 일례로 인용된다.  "오호라 국가의 정신이 망하면 국가의 형식은 망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그 나라는 이미 망한 나라이며 국가의 정신만 망하지 아니하면 나라의 형식은 망하였을지라도 그나라는 망하지 아니한 나라이니라..." (45)

저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논평한다. "한마디로 오직 정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국가의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국가의 형식을 갖출 능력이 없는 상황에 대한 반어적 언표이다. 국가의 형식을 갖출 능력이 없는 존재로서는 정신이라는 초월성을 상정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거기서 더 나아가 그것이 국가라는 형식과는 무관하게 존재해야만 하는 어떤 가치로 떠오르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정신주의를 견고하게 한 것은 무엇보다 기독교이다. ... 기독교는 계몽 담론의 정점이자 태풍의 눈이기도 한 민족 담론 안에 깊은 흔적을 새긴다"

고등학교 교실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끄떡하면 강조되는 정신력의 배경이란 그러니까 구한말의 민족담론과 거기 공헌한 기독교의 영혼 사상인 것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정신력의 강조 뒤에 생략되는 진실은, 예나 지금이나, 사실 주어진 물질적 조건은 목표를 달성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가지 더, 모성 민족주의 (여성의 임무는 가족에 헌신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국가를 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와 관련해 이 책이 보여주는 흥미로운 관찰. "나라 사랑하는 사람은 미인을 사랑하지 못하옵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강감찬에게 신채호는 이렇게 말하게 한다. "... 한 사람이 한평생 두 사랑을 가지면 두 사랑이 하나도 이루어지기 어려운 고로... 애국자가 나라 밖에 다른 사랑이 있어도 애국자가 아니다." 저자의 논평: "사랑과 애국, 둘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마치 칼이 놓인 자리에 다른 것을 놓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구도 하에서는 사랑이나 성, 그것을 둘러싼 계열들은 모두 민족, 국가, 도덕 등의 가치들과는 적대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121)

어떤가? 이념과 사랑이 양립불가능으로 여겨졌던 지나간 시대가 생각나지 않는가?
근대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아직도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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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6-12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겉모습만 현대적으로 변하고, 뭐 앞으로도 계속 그 모양일 것 같다는
비관적인 생각이!;;

마태우스 2006-06-12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미숙님의 책이군요. 우리나라는 축구도 헝그리정신으로 했었지요 아마^^

검둥개 2006-06-13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역시 로드무비님다운 코멘트십니다. ^.^
어쩌면 좋아요!

마태우스님, 아, 그 헝그리 정신, 너무 싫어요.
뭘 해도 사람이 밥은 두둑이 먹고 해야 된다는 게 이제 제 입장입니다. ^^
 
황석영의 맛과 추억
황석영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바베트의 만찬이나 투스카니의 태양 같은 영화를 보고나면 음식에 대한 시각이 확 달라진다. 허기진 배를 채워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먹어야 된다, 에서 삶을 즐기는 데 필수적인 향신료 같은 그 무엇이 바로 음식이다, 하는 식으로. 이 책을 읽고나서 성장기에 음식복이 없었던 것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밥을 굶는 일은 없었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음식도 없는 것이다. 기껏해야 아홉살 때 한 점 먹어본 돈까스, 여의도 시내에서 먹었던 짜장면 (완두콩이 뿌려져 있는 것이 동네 짜장면과 달라 엄청나게 고급스럽다고 생각했었다.), 친구 생일날 처음 먹어본 탕수육 같은 것이 인상적인 음식 리스트의 전부라니! 갑자기 초라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 서로 다른 지방 출신인데도 그 지역의 난다 하는 음식은 커녕 흔하다 하는 음식도 먹어본 게 없고, 집에서 먹어본 특이한 음식으로 손에 꼽을 수 있는 거라곤 양미리 졸인 것이 고작인데, 보잘 것 없는 양미리 같은 게 식도락 목록에 낄 날은 세상이 뒤집히기라도 하지 않는 한 오지 않을 것이다. 

문화도 경험을 해봐야 즐길 수 있는 것인데, 먹는 일을 문화로서보다는 주로 주린 배나 그때 그때 채우는 식으로 해치우며 살다보니 요리책에 눈길을 주게 된 건 어른이 되고도 아주 한참이 지나서였다. 요즘은 서점에서 칼라로 화려하게 인쇄된 멋진 요리책을 보면 이스트가 들어간 밀가루 반죽 마냥 마음도 부풀고 당장 장을 보러 나가서 낯설기만 한 이름을 가진 채소며 식재료를 잔뜩 사오고 싶다. 랄랄라 노래를 부르며 호박을 썰고 달걀을 풀고, 즐겁게 음식을 준비해 알록달록한 그릇에 멋지게 차려낸 다음, 행복하게 음미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싶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간신히 퇴근해서 피곤해 죽겠는 마당에 배가 고프다는 것도, 먹을 것을 직접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도, 먹고 난 그릇을 치워야 한다는 것도 끔찍스럽기 그지 없는 일들에 불과하다. 음식을 만들며 노래를 부른다는 건 택도 없는 일이다. (언젠가 잡지에서 하루 중에 제일 스트레스가 심한 시간이 바로 퇴근하고 집에 와서 저녁식사를 하기까지의 시간이라는 기사를 읽었는데 체험상 그건 정말 맞는 말이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집어들고 뜨아한 생각에 한참 표지를 들여다봤다. "삼포 가는 길"이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같은 책을 쓴 작가는 먹는 일에도 아주 스파르탄 같은 사람일 거라고 혼자서 엄한 추측을 맘대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 <노티를 꼭 한 점만 먹고 싶구나(초판 제목)>에는 정말 별별가지 음식이 다 나온다. 그 중에는 군대에서 서리해 철모에 삶아먹은 닭이나 감옥에서 요구르트 + 곰팡이 피운 빵 + 원기소를 섞어 담가 먹었다는 술이 있는가 하면 김일성이 루이제 린저에게 대접했다는 시꺼먼 언감자 국수 같은 이북 음식도 있고, '가즈파초 수프', '파에야', '되너 케밥', '리볼리타' 같은 생뚱스런 유럽 음식도 있다. 해서 책을 읽어가다 보면, 이 양반 자시기도 이것저것 정말 많이 자셨구만,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된다.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음식이 이어질 때마다 입맛을 다시며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치기 어린 배신감도 느꼈다. 그렇게 치열한 삶도 얼마든지 맛난 음식만 잘 먹으면서 살 수 있는 거였단 말인가, 하고! 하지만 그런 배신감은 음식에 얽힌 이야기 얻어듣는 재미로 금새 다 잊혀졌다.

"변소에 들어가니 판자를 얹은 변기 구멍 위로 막대기 하나가 비죽이 올라와 있다. 이건 뭣에 쓰는 막대기인고, 급한 대로 주저앉는데 갑자기 밑에서 꾸울,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돼지 대가리가 널판자 아래로 쑥 들어온다. ... 나는 혼비백산하여 얼른 바지를 추스르고 일어나 변소 밖으로 뛰어나와 버렸다. ... 밖으로 나와서 어쩔 줄 모르고 발을 구르며 서성대다가 하여튼 일이 급하여 다시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주저앉는데 또 꾸울, 한다. 그제서야 나는 구멍 위로 비죽이 솟아 있는 막대기의 쓰임새를 알아차렸다. ... 일도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대충 하고서 얼른 나온다. 나오면서 뒤를 돌아보니 돼지가 다시 울타리 판자 사이로 그 영리한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본다. 나는 뒤늦게야 돼지의 눈빛이 어째서 그렇게 영리해 보이는지를 집작했다. 그가 나를 보는 눈빛은 이를테면 "야, 밥 온다!"하는 느낌의 표정 그대로였기 때문일 것이다. 괘씸한 놈 같으니."

"홍어를 잡으면 암놈과 수놈은 가격에서 큰 차이가 난다. 수놈 홍어는 암놈에 비하면 헐갑이고 쳐주지도 않는다. ... 살 맛도 부드럽고 쫄깃하지 못하고 어딘가 퍽퍽한 느낌이다. 사 가는 사람이야 ... 어느 게 암놈이고 수놈인지 불간하기가 어렵다. 이때에는 생선을 뒤집에 배 아래쪽을 보면 된다. 물론 암수의 성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니, 물고기에 성기라니! 홍어는 다른 물고기들처럼 난생이 아니라 태생이다. ... 중간 상인들은 홍어가 들어오면 배를 뒤집어 살피고 나서 수놈 홍어의 '거시기'부터 얼른 떼어낸다. 암놈과 같은 가격을 받아 내려는 속셈에서다. 그래서 '만만한 게 홍어 거시기'가 되어 버렸다."

"올림픽 즈음이던가 ... 수감된 문인들 석방시켜 보려고 해외 문인들과 몇 차례 자리를 같이 했었는데, 누군가 짓궂게도 어치 하나 보려고 산낙지 회를 시켰다. 그들의 소스라치던 얼굴이 생각나서 지금도 웃음이 난다. 미국 펜 회장이던 수잔 손타그가 비명을 지르면서도 호기심 때문에 먹어보고는 연신 맛있다고 했다."

그 중엔 이런 애잔한 이야기도 있다.

"군에서는 가끔 발생하는 일이지만 ... 과식사고가 있었다. ... 당시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비상식으로 건방이 나왔는데, ... 어느 훈련병이 무려 다섯 봉지를 구해다가 낮에는 다른 녀석들 시선 때문에 먹지를 못하고 취침 시간에 개인 침낭 안에다 몽땅 털어 넣고 오물오물 먹기 시작했다. ... 그런 짓은 나도 가끔 해 보았고 ... 내 독자라는 헌병이 ... 건빵 한 봉지씩을 주었는데, ... 담요를 둘러쓰고 ... 천천히 씹어 먹었다. 그런데 아무리 조용하게 먹으려 해도 와삭거리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마치 천둥소리 같았다. 그 병사도 남들이 모두 깊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먹기 시작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하여튼 와사삭와사삭 씹어서 그 건빵 다섯 봉지를 새벽녘에 모두 해치웠건만, 취침시간에 화장실을 가도 신고를 해야 되는 터에 물을 마실 시간은 없었나 보다. 건빵이 비상 식량인 것은 백속에 들어가면 몇 배로 불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장은 물론 식도까지 꽉 막힐 수밖에. 그래서 한 젊은 병사는 행복하게 숨을 거두었다."

황석영이 음식과 함께 풀어놓는 이야기들 속엔 가출해서 돌아다니다 중이 되겠다고 절 음식 먹은 이야기, 감옥 가서 부침개 부쳐 먹은 이야기, 유럽에서 손으로 가자미 잡아 먹은 이야기, 해남 살 적에 매생이국 맛 본 이야기, 윤이상 선생이 개장국 소리에 혹해 나서다가 혹시라도 커리어가 끝장 날까봐 아쉽게도 포기한 이야기 등등이 고스란히 다 들어가 있다. 그는 천상 이야기꾼이라, 그 이야기들 듣는 것이 깨소금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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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12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6-06-12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속삭님 어트케 아셨습니까?
정말로 털어왔어요. 반납기한이 되어서 빨리 빨리 읽어내느라고 쩔쩔매고 있답니다.
산문집이 역시 술술 잘 읽히죠? 요 책은 먹는 이야기에 또 홀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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