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모르게 멋지다고 생각되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대학 초년병 때에는 왜 남자애들이 술만 벌컥벌컥 마시고 말은 잘 안 하는지 궁금했다. 그런 남자애들이 분위기 있다고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몇 년 후에 깨달았는데 분위기 있다는 남자애들이 술만 마시고 말은 잘 안 하는 이유는 별로 할 말이 없어서였다. 심오한 생각에 빠져 있거나 심각한 걱정이 있거나뭐 그런 게 아니었다. 그리고 또 궁금했던 건 일어나서 눈 뜨자마자 술 마시는 사람들이었다. 문사의 예를 들자면 천상병 시인이라거나. 동네 막노동하는 아저씨들이라거나. 술은 맛도 없고 비싸기만 한데 맛있는 걸 사먹지 왜 소주 같은 걸 아침부터 들이키고 있을까나? 근데 요즘에 내가 이런다. 위염이라 자나깨나 속이 쓰린데도 일어나서 담배를 물고 소주는 못 구해서 맥주병나발을 부는 신세가 됐다. 역시 경험만이 이유를 알려주는 행동들이 있다. 그럼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현실 도피? 도피하지 말고 현실을 마주하라고? 현실이 대처가 안 되니까 도피를 하지! 아, 그래서 한 대 더 피우고 한 병 더 마시고... 그냥 잊으려고. 기억 속 생텍쥐페리의 술주정뱅이의 묘사가 아주 가슴을 찌른다.
득의양양해서 삼돌이와 나, 아는 사람들에게 공작새 사진을 돌렸더니 위조한 게 아니냐는 반응이 다수였다. 음, 그러니까 우리는 공작새 같은 걸 위조 사진으로 만들어서 유포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으로 보였단 말이지... 그렇다면 진실을 고화질 사진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해서... 아, 이거 찍느라고 힘들었다. 어쨌든 동네에 집단서식하는 공작새의 존재를 이렇게 해서 증명! QED
남편의 새 직장 때문에 보스턴에서 마이애미로 이사를 왔다. 길거리엔 열대의 야자수가 무성하고 한낮에 기온은 극성맞게 올라간다. 이사를 오면서 짐을 줄인다고 잔뜩 있던 펜이랑 포스트잇이랑 스카치 테입, 지우개 등속을 전부 버렸다. 담배도 서너 갑 있었는데 진짜로 끊는다고 하면서 라이터까지 다 싸서 버렸다.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서 담배와 커피가 주로 등장하는 친구 웹사이트의 포토 앨범을 들춰보고 있으니 담배가 피우고 싶어 죽겠다. 어제는 이력서를 보내는데 스카치 테입이 없어서 쩔쩔맸다. 다시는 펜 등속이며 담배를 버리지 않을 테다. 동네 슈퍼를 가려고 해도 차를 몰고 십분쯤 운전을 해야 해서 우리는 주로 집 안에서 소일을 하는데, 어제 참지 못하고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로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동네에서 공작새를 봤다. 칠면조 크기의 엄마 공작새와 중닭 크기의 아기 공작새! 집에 돌아와서 해리를 데리고 삼돌이와 함께 동네의 공작새를 다시 보러 나갔는데 공작새는 온데 간데 없었다. 공작새를 한 번 더 보려고 동네를 돌고 있는데 갑자기 스우쉬쉬 하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키큰 나무 위에 거대한 공작새가 앉아 있다. 두 마리 저 가지에 세 마리 다른 가지에. 그리고 매우 경계하는 눈초리의 숫놈이 꼿꼿이 서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꽁지를 펴서 커다란 날개를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작새가 날 수 있는 줄 난 전혀 몰랐다. 아래는 무시시해 보이는 동네 숫놈 공작새. 이것은 앞마당 코코넛 나무에서 잘라낸 코코넛. 저 거대한 코코넛이 머리 위로 떨어지면 딱 즉사감이다. 맛있을 줄 알았는데 맛이 수상쩍인 물 같은 쥬스만 안에 조금 있고 영 무용했다. 실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