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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유라시아의 역사
고마츠 히사오 외 지음, 이평래 옮김 / 소나무 / 2005년 5월
평점 :
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기준은 다양하다. 지정학적 위치, 경제적 정치적 역할, 사회적 층위의 분류, 가치 정도의 차이 등 절대적인 잣대는 있을 수 없다. 너무나 가변적인 그것이지만, 무엇이 중심인가는 누가 중심으로 향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중심으로의 욕망은 늘 자기 자신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방향은 이미 목적을 이루고, 그것이 하나의 공식으로 자리잡는다.
역사에 있어서도 우리는 주인공이고, 당연하게 중심적인 시각을 가진다. 주변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며, 심지어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하여 다락의 먼지 틈으로 사라져간다. 광활한 초원, 사막. 고원. 척박한 환경 속에서 억척스럽게 삶을 정복해나간 유목민과 오아시스 정주민들의 역사가 이에 해당되지 않을까.
이 책에 등장하는 몽골,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중국의 내몽골자치구, 신장위구르자치구, 티베트자치구, 부랴트공화국, 투바공화국, 바슈키르공화국, 타타르공화국이란 낯선 이름들은 낯가림을 하는 의식의 편향성을 드러내게 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국가들과는 달리 이들 국가들은 세계의 주변국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세계를 호령했던 칭키스칸의 몽골, 유럽을 공포로 몰았던 아틸라의 훈족, 중국을 위협한 흉노 외 스키타이, 티무르, 선비, 유연, 돌궐 등 많은 유목, 오아시스 세계의 유산은 역사의 큰 흐름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물론 키르기스스탄의 15년 독재를 끝낸 시민 혁명인 ‘레몬혁명’, 카자흐스탄의 풍부한 자원을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 중국의 에너지 전략, 티베트, 신장자치지구의 독립을 겨냥한 중국의 반분열법 등은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패권 국가들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패권 유지를 위해, 중국은 위구르 자치족 동요를 주시하고, 미국은 민주주의보다 이슬람 세력 확산에 우려하는 등 중앙 유라시아의 복잡한 인종, 종교, 역사적인 배경을 아는 것은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 남기’위한 방법 중의 하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은 중심과 주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역사 읽기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 유목민과 정주민, 과거와 근대의 역사를 적절히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코 따로 떼어내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임에도 이제까지 각각을 구분하여 출판되었던 책들에 비하면 총체적으로 바라 볼 수 있게 한다. 물론 너무나 방대한 양을 다루기에 지명, 인명만 읽고 있는 듯한 지루함을 한껏 안겨주기도 한다.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을 꼽는다면, 민족, 문화의 융합과 분열, 진화를 역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유목민 문화가 그러하듯이 불꽃처럼 피었다가 사라지는 ‘바람의 역사’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기서 민족문제를 슬그머니 집어낼 수 있는데, 흉노와 훈의 동족설에 대해서는 근대적 개념인 ‘민족’을 적절하지 못한 과거로의 적용을 지적하는 부분. 그리고 구소련 붕괴 후 독립한 신생국들과 중국의 ‘하나의 중국’을 위한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이 난무한 시대의 풍경을 총체적으로 바라 볼 수 있게 한다. ‘중앙 유라시아의 민족의 경계 확정 사업’처럼 중앙 유라시아라는 단일체를 머리, 팔, 다리 따로 살아가게 만들었다. 이곳의 생명력은 끊임없는 문화와 인적 교류를 통한 문화적 에너지의 역동성이 아니던가. 유목민의 군사적 우월성이 화약과 대포에 의해 무력화 되었다는 점이 쇠퇴의 원인이라 하지만, 근대적 개념의 민족과 국가, 경계와 장벽들은 그들의 척박한 환경을 더욱 척박한 공간으로 만들어 내고 있는 듯 하다.
고립된 하나가 아닌, 네트워크 시대에서는 교류가 세상을 움직이는 에너지가 될 것이다. 중앙 유라시아는 그렇게 재탄생 되어야 한다. 과거의 그들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