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국시대냐 사국시대냐?
 가야사에 대한 축소는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우리에게 강요된 식민사학의 결과. 19세기말부터 일제의 역사가들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황후 삼한정토설화(서기 200년 신공왕후가 80척의 배를 이끌고 와서 신라를 치고, 삼국으로부터 조공의 서약을 받았다는 설화)를 비롯한 여러가지 왜곡된 사료들을 토대로 하여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일제 시기에 일본이 우리에게 가르친 역사 교과서는 바로 이런 신공왕후와 왜 왕권의 위대성을 선전. 해방 이후 교과서는 바뀌었으나 가야사 부분은 거의 삭제 되거나 극도로 축소되었다.
결국 가야사에 대한 무지와 연구의 부족 자신감의 결여 등이 삼국시대론을 낳았다는 건데 아직도 안 바뀌고 있는 이유는?

2. 신사유람단???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시찰단.
첫째, 공식사절단은 아니었다. 중견관리로 구성된 비공식 시찰단.
둘째, 일본의 권고에 따라 시찰단을 파견했고 일본의 편의 제공을 받았으나 자의의 성격도 있었다.
셋째, 이들의 보고서는 통리기무아문의 개편에 주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
이 시대 신사라는 명칭은 관리를 지칭하는데 관리가 아닌 민간인도 시찰단에 많이 포함 되었다는 문제.
거기다 일없는 관광객의 분위기를 풍기는 유람단이라는 호칭은 재고되어야 한다.
'1881년 일본 시찰단'으로 명명함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3. 개화파 용어와 개화파의 성격
교과서에서 흔희 온건개화파 급진개화파라는 구분을 사용하는데 이는 개념의 범주가 다른 두 개념을 사용하는 것으로 부적절하다. (그런데 온건과 급진을 대립시켜 설명하는건 개화파 뿐만 아니라 한두군데가 아닌데.... 고려말 신진사대부도 온건/급진으로 구분하는데.... )
개화사상을 엄밀한 의미에서는 '문명개화론"으로 한정짓자.
* 문명개화론 - 기존의 조선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고 패턴, 즉 조선은 이미 개화된 나라이고 구미열강이 야만'이란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꾼 논리(갑신정변의 주역들 - 김옥균, 박영효 등등),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근대화의 지표
*동도서기론 - 조선이 개화된 나라이며 소중화라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무의 수준에서 사회체제의 변화를 수용. 중국의 중체서용론과 양무운동을 조선 근대화의 지표로 삼음. 엄밀한 의미에서 개화파라 지칭하기 힘듬.

4. 조규와 조약
청의 입장 - 장정, 조규는 조정이 특별히 윤허하는 조규로 상하관계의 나라들이 맺는 것이며, 대등한 관계의 나라들이 맺는 조약과는 그 명칭이 다르기 때문에 그 성질 또한 다르다. 청은 일본 조선과 조규를 맺고, 일본 조선은 서구열강과 조약을 맺게 함으로써 형식적으로 일본, 조선, 서구열강을 모두 조공체제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의도. 결국 조공체제를 전제로, 조약체제를 수요한 조규체제는 이른바 중국판 근대성의 모색이라 일컬을 수 있는 양무운동 실천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1876년 강화도 조약의 정식명칭이 조약이 아니라 조규이다. 그렇다면 이것의 의미는?
  ----- 솔직히 내 생각엔 아무 의미 없음. 조선이 당시 조약과 조규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으며 또한 그 내용의 문제가 워낙에 심각한 마당에 조약과 조규를 따져서 뭐하겠는가 싶음.

5. 을사조약의 제대로 된 명칭
조약이란 1. 주권자의 조약체결 권한 위임 
                 2. 체결 권한을 위임받은 전권대표의 조인
                 3. 주권자의 비준
협약이란 양국 주무대신의 합의와 서명만으로도 효력을 가질 수 있음.
을사조약에서 외교권의 위임은 분명히 조약의 수준에서 거론될 문제. 그런데 일본은 이를 협약 수주에서 처리하고 조인문서에는 정식 명칭이 빠짐.
결국 을사조약은 체결되지 않은 조약이 되며 따라서 명칭은 '외교권 위탁에 관한 한일조약안'정도가 될 것.

6. 일제시대의 적당한 명칭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드러내면서 국망의 강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용어 - 일제 강점기
문제는 이 용어는 한국민족국가사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정당한 표현이지만, 탈민족주의자들은 쉽게 수용하기 어려운 용어이다. 사실 일제감정기라는 표현은 '왜정'이라는 국민정서를 학문적으로 포장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탈민족적 성향을 가진 역사학자나 사회과학자들은 경향적으로 '일제시대'라는 표현을 즐겨쓴다. 동아시아적 시각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도 한반도의 경계를 넘어 동아시아 전반으로 시야를 확대할 때, 근대 동아시아사는 곧 일본 젝구주의사라고 볼수 있으므로, 일제시대라는 용어를 선호.

7. 군대 성노예, 정신대, 위안부????
학문적으로 가장 적당한 명칭은 군대 성노예라고 하지만 나조차도 섬뜩한 이 단어가 이 책의 말대로 생존 피해자들에게는 어떻게 다가가갈까? 이런 경우 학문적접근은 시기상조인것 같다.

8. 친일과 협력
오늘날 친일의 문제는 책임과 과거청산의 문제이다. 또한 그 친일파의 책임을 묻는 주체는 '민족'이 된다. 그러나 이 경우 기간의 근대사 체계가 '민족'의 가치를 절대화하면서 식민지에 존재했던 다양한 삶의 양식을 지배와 저항의 흑백논리로 재단해왔다는 비판이 제기되엇다. 식민지 사회를 '제국주의의 지배 -피억압 민족의 저항'이라는 단순 도식으로 파악하다보니 사회정치적 행위를 저항이 아니며 '친일=반민족행위'로 평가하게 되었다는 비판이다.
  이런 입장에서 친일 대신 협ㄺ의 개념을 도입하게 된다. 식민지나 반식민지 주변부 내부에서 현지 엘리트로 구성되는 협력의 체제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이런 경우 행위자 개인의 책임보다는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협력의 구조나 체제가 중요시될 수 밖에 없게 된다.
============= 어려운 문제. 개인의 책임을 어디까지 면제시켜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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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넘어 2006-09-04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난 책 읽고 계시네요. 역사비평에 연재되면서 재미있게 읽은 꼭지였는데 ^^*

클리오 2006-09-04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을만하나요..라고 물을랬더니 폐인촌님이 좋은 평을... 이벤트 하던데 서평쓰세요.. 전 도무지 읽을 시간이 없을 듯해서 포기합니다. 흑..

바람돌이 2006-09-05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폐인촌님/워낙에 오랫동안 공부를 안한지라 요즘 전공서적들을 이것저것 뒤적이니 재밌네요. 올해 3학년 국사를 7년만에 맡았더니 정말 제 바닥이 보이더라구요. ㅠ.ㅠ 이것 저것 열심히 책은 뒤지고 있는데 하도 오랫만이라 그런지 나날이 힘듭니다. ㅠ.ㅠ
클리오님/저야 워낙 오랫동안 공부에 손떼고 이것 저것 잡스럽게만 보다가 보니 새오워요. 아 그동안 진짜 무식하게 공부안했구나 뭐 그런 생각..... 늘 공부하시던 분들은 보면 뭐 그리 새로울 것 같지는 않아요. 저같이 오랫만에 공부하는 사람을 위한 정리서 같은 뭐 그런 책???? 어쨌든 재밌어요. 이것 저것 생각도 많이 하게 되고... 이 책 서평 이벤트도 봤죠. 상품이 무지 맘에 들던데.... ㅎㅎㅎ
 

 

 

 

 

1997년에서 1999년 - 그리고 덧붙여 2000년대 이야기 약간.

1997년의 시대의 화두는 IMF였다.
처음엔 그게 뭔지 조차도 몰랐던 그 단어가 우리의 삶을 그토록 절망적으로 만들줄 알았을까?
처음엔 늘 조금씩 있는 경기불황이겠지 하던건 정말 뭘 모르는 소리였었지...
날이면 날마다 이게 도대체 대한민국이 맞냐고 소리치고 싶던 날들.
날마다 도산하는 기업에 길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
생계형 범죄는 자식의 손가락까지 잘라내고, 절망에 자살하는 사람들.
월급이 깎여도 그저 직장 안짤리고 있는것만으로도 고마워 죽을 것 같던 시절.

그런데 그 고통을 온몸으로 맞으며 절망했던 사람이 국민 모두가 아니라는게 문제겠지....
있는 사람은 오히려 이를 기회삼아 돈의 덩치를 더 키워나가고...
빈부격차는 대다수의 사람을 더욱 더 절망으로 절망으로 내몰았다.
그런 시대적 분위기는 엉뚱한 방향에서 엉뚱한 대응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IMF사태는 '믿을 수 없는 정부와 공공영역'이라는 한국인의 기존 신앙을 강화시켰고 기존 가족주의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IMF 난국을 돌파하기 위한 과정에서 기존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졌으며, 또 그래서 내 자식을 잘 교육시켜야 할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최준식은 이렇게 개탄했다. "현금의 우리나라 교육 환경에서 가장 문제 되는것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내 새끼 위주의 무한경쟁 체제이다."(92쪽)

이른바 생존의 논리라는건가?
우리나라에서 교육열이 아이들을 죽여나가지 않은적이 없지만
실제로 IMF사태 이후 더 심각해진 건 맞는것 같다.

그런데 이 얘기가 시사하는 바 IMF가 우리에게 정말로 남긴것은 무엇일까?
정부는 벌써 IMF종료를 선언했고 경제는 여전히 어렵다고 죽는 소리를 하지만
그래도 급한 불은 껏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있는거 아닌가?
왜 그 때부터 갈수록 빈부격차는 줄어들줄을 모르는지....
왜 지금도 내 주변에는 너무 너무 어려운 아이들이 그 때나 지금이나 숫자상으로도 어려운 정도로도 어느쪽으로 따져도 줄어들지를 않는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던가?
IMF로 놀란 한국인들에게 그것이 남겨준것은 생존본능의 강화가 아닐까?
가난에 대한 사회적 연대는 사라지고,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나와 내 가족으로 모든 것이 환원되고...
'우리'는 사라지고 일단 중요한건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생존의 지상명령!!!
한국인들의 신체에 각인처럼 남겨진 IMF의 흉터가 아닌지.....

2000년대 중반의 한국인에게 분열은 우리의 운명이 되었다. 분열은 우리의 운명이라는 걸 인식하는건, 이제 우리의 목표가 '통합'이 아니라 '연대가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줄 수 있다. 자꾸 되지도 않을 통합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갈등과 증오도 일어나는 것이다. '분열'은 우리의 운명이지만, '연대'는 나의 운명이다. 그게 90년대의 한국사회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일지도 모른다.(3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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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썼다가 등록하려니 오류떠서 몽땅 다 날렸다.
오기로 다시 쓴다.
기억을 더듬어 썼으나 쓰고 보니 또 좀 다르군....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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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해콩 > 몽둥이를 놓자 폭력이 보였다.

몽둥이를 놓자 폭력이 보였다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로 징계를 앞둔 상동고 이용석 교사의 심경 고백…폭력을 휘두르는 교사가 된 자신을 돌아보며 전체주의에 반대하기로 결심

▣ 이용석 부천 상동고 교사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아침이다. 교문지도를 해야 하니까 서둘러야겠다. 아 참! 오늘은 학교 전체 운동장 조회가 있는 날이잖아.

아침 7시에 학교에 도착했다. 오늘의 수업 자료가 들어 있는 가방을 책상에 내려놓고 교문으로 나간다. 난 학생생활지도 담당 교사이다. 내 손에는 이미 나에게 잘 길들여진 단단한 몽둥이가 들려져 있다. 교문에서 학교 건물로 이어지는 진입로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제대로 봐야 한다.


△ 지난 7월 징계위에 불참한 이용석 교사는 고민 끝에 출석하기로 결심했다. 8월4일 출석에 앞서 경기도 교육청 앞에서 연설하고 있는 이 교사의 모습.

등교하는 아이들의 머리 모양, 교복 상태, 운동화 종류, 왼쪽 가슴에 부착돼 있어야 하는 이름표, 남학생의 넥타이와 여학생의 리본 착용 여부 등 이 모든 걸 한눈에 보고 지나가는 아이들 개개인을 모두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등교하는 아이들이 왼쪽으로 일렬을 지으며 들어온다. “너, 머리!” “너, 운동화!” “너, 야! 너 말이야! 왜 못 들은 척하고 지나가! 엉?” 색출된 아이들은 진입로 오른쪽에 손 들고 서 있게 한다.

가장 싫어하는 인간과 닮아버린…

아침 7시50분. 등교 시간이 끝났다. 이제부터는 모두 지각생이다. 지각생들은 진입로 오른쪽에 일렬로 ‘엎드려뻗쳐’를 시킨다. “인문계 고등학생들이 제정신이냐?” “넌 또 지각이야?” 지각생들은 엉덩이를 맞는다. 잘 부러지지 않게 다듬어놓은 몽둥이로 초범과 재범 등을 가려내어 엉덩이를 때린다. 어쩔 수 없다. 이건 벌이니까. 지각했으니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해서라도 아이들을 바로잡는 것이 결국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아직 아이들은 성인이 아니기 때문에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 이건 교사의 역할이자 의무이다.

아침 9시. 학교 전체 운동장 조회가 시작된다. 국기에 대하여 경례! 저 뒤에서 시시덕거리는 아이들이 눈에 보인다. 아이들 사이를 가로질러 가서 정강이를 냅다 걷어찬다. “지금 국기에 대한 경례 하는 거 몰라?”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중이다. 아이들의 줄이 흐트러지고 여기저기서 잡담이다. 아이들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정강이 차기, 뒤통수 치기, 꿀밤 주기 등 온갖 잡기를 동원해서 ‘질서’를 잡는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반장, 시작하자” “차렷! 선생님께 대하여 경례!”….

교사 1년차 때 나의 모습이다. 덕분에 나는 1년 내내 1교시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울 수밖에 없었다.


△ 지금의 학교는 ‘이 사회’를 ‘그대로’ 가르치는 곳이다. 국기 경례에 대한 다른 의견도 다양성으로 포용하지 못한다.

군대 시절에 많이 맞았다. 군기를 잡기 위해, 부대가 원활히 움직이게 하기 위해, 상명하복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많이 맞았다. 그때 난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느꼈다. 인간으로서 존중이 아니라 오로지 계급에 의해 명령과 복종만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을 보고 치를 떨었다. 난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이미 나에게는 그 폭력이 내면화돼 있었다. 당연히, 혹은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각인시키면서 아이들에게 똑같은 폭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교사가 된 뒤 1년을 보내며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의 모습을 내가 닮아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내 손에서 몽둥이를 놓은 것은 그로부터 1년 뒤, 상당한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손에서 몽둥이를 놓은 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손에서 몽둥이를 놓은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에게 하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몽둥이를 들지 않은 손과 입과 마음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들이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나에게 말이다.

‘하지 않는 것’으로 출발하다

여학생들에게 여자다움을, 남학생들에게 남자다움을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남녀의 성역할을 고정시킴으로써 성적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있는 교무실에서, 꾸중을 듣고 있는 아이의 자존심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잘못을 해서 교무실에 불려와 교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야기를 듣는 아이의 수치심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프다는 아이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되돌아가는 모습에서 신뢰가 무너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똑같은 머리 모양과 똑같은 복장에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 전체주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교장 선생님께 대하여 경례!’라고 힘있게 말하는 마이크 소리에서 군대식 복종 문화가 자리잡은 학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만들지도 않은 학생 두발 규정에 의해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아이들의 인권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라는 구호에 모두가 국기만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무조건적 충성을 요구하는 국가주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한 폭력은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학교는 ‘이 사회’를 ‘그대로’ 가르치는 곳이기 때문이다. 가진 자, 남성, 성인, 이성애자, 비장애인 중심의 획일화된 가치관과 그것이 반영된 제도가 ‘상식이고 정상’이라고 말하는, 단지 차이일 뿐인 것을 차별하는 이 사회를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소외된 약자(없는 자, 여성, 청소년, 성적 소수자, 장애인)의 권리는 사회 전체를 위해 희생될 수 있다는,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 ‘미덕’이고 ‘우선’이라고 말하는 이 사회를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그렇기에 말로는 다양성을 말하지만 사실은 ‘획일화된 상식’이 교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몽둥이만 들지 않았을 뿐, 획일화된 상식의 폭력이 이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했던가. 아마 눈에 보이지 않았다면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장의 말 한마디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지금의 학교 구조 속에서 일개 교사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몇 명의 학생이 남았는지가 교사의 학생지도 능력으로 이해되는 입시지옥 학교 현실에서 일개 교사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이들에게 인권은 사치가 되어버린 학교의 몰인권적 문화 속에서 일개 교사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스스로에 대한 좌절과 무기력함이 부끄러운 시간들이었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으로 아이들과 함께할 것인가? 학교가 단순히 지식을 주입시키는 곳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하기에 나는 삶으로 아이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의 삶에서 차이를 차별하지 않고, 나의 삶이 획일적 상식이 아니라 다양성 그 자체를 인정하고, 나의 말과 행동이 어떤 대상에게도 폭력적이지 않도록 하는 것에서 말이다.

획일화된 상식을 거부한다

그래서 나는 하나만을 강요하는 모든 경향성을 반대한다. 그 경향성은 ‘전체주의’로 귀결될 것이다. 전체주의는 결국 모두에게 개인의 삶을 부정하는 억압과 폭력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 경향성은 ‘인간’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획일화된 문화와 규범에 반대한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개인과 존재의 다양성을 말살하기 때문이다. 학교장의 지시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학교 구조에 반대한다. 그것은 일방적 복종만을 통해 이 사회를 그대로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또한 국기에 대한 경례(맹세)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힘들 것 없는 동작과 몇 마디밖에 안 되는 문장이 무조건적 충성만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 이 교사의 행동은 수구보수 세력의 ‘전교조 죽이기’에 이용되고 있다. 8월4일 집회에 나온 민주노총 조합원들.

다르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이 사람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 권리와 정당성은 과연 누구에게서 부여받은 것인가? 지금 이 획일화된 사회에서 내가 ‘인간’으로 존중받기 위해 나는 내 삶에서 작은 것이라도 ‘획일화된 상식’을 거부하고 싶다. 국기 경례(맹세)를 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일부 학부모들은 나에 대해 경기도교육청에 민원을 접수시켰고, ‘학교를 사랑하는 학부모 모임’은 나를 교단에서 영구 퇴출할 것을 경기도교육청에 요구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나를 ‘편향된 가치관 교육’의 문제 교사로 낙인찍었다. 그리하여 나는 경기도교육청으로부터 중징계 의결 예정을 통보받았다. ‘획일화된 상식’의 벽이 아직 매우 높다는 것에 마음이 우울하다.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상황이 나 자신에 대한 시험장이 될 것 같다. 과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차라리 헌법을 징계하라”

이 교사 사건은 수구 세력의 ‘전교조 죽이기’와 연결돼

▣ 수원=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이용석 교사의 징계위원회가 열린 8월4일 오후, 수원은 섭씨 35도까지 올랐다. 경기도교육청 앞에서는 40여 명의 동료 교사와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땡볕 속에서 장시간 집회를 벌였다. 이 교사는 고민 끝에 징계위 출석을 결심하고 나왔다. 그는 “위원회에 들어가 징계의 부당성을 말하겠다”며 집회 군중을 뒤로하고 건물로 들어갔다. 징계위는 오후 2시께 시작됐다.

국기 경례를 하지 않고 ‘편향 교육’을 했다는 이유로 징계위 회부까지 이어진 이용석 교사 사건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수구보수 세력의 일련의 ‘전교조 죽이기’ 속에서 돌출된 사건이라는 점이다. 도교육청의 ‘장학지도’로 해결되던 사안이 <조선일보>에 의해 대서특필돼 사회 문제화되고, 급기야 ‘학교를 사랑하는 모임’ 등 보수단체가 개입하기 시작한 점이 이를 보여준다. <조선일보> 등 수구보수 세력들은 전교조 부산지부의 통일교재 사건 등과 함께 이 교사를 지목하며 사상 공세에 ‘올인’하고 있다.

하지만 이 교사 사건은 근본적으로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관한 문제다. 우리는 국기 경례를 하지 않는 개인에게 과연 불이익을 줄 수 있느냐는 논쟁적 장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경기도교육청은 이 교사의 행위가 공무원의 품위 유지와 성실의 의무를 위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평화인권연대 등 39개 단체가 모인 인권단체연석회의는 8월3일 성명을 내어 경기도교육청의 징계 시도를 “우리 사회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검열하고 교사가 소신 있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는 위험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징계위는 5시께 끝났다. 온도는 2도밖에 내려가지 않았다. 이 교사는 “가치관에 관한 문제는 징계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해 사실관계에 대해서만 답변을 했다”며 “이 때문에 징계하려면 차라리 헌법을 징계하라”고 말했다. 경기도교육청은 최종 징계 수위를 결정해 이 교사에게 통보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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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6-09-03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님 댓글 잘 읽었습니다. 님이 말하신 것처럼 그런 경향도 있지요. 이 경우에는 결국 개인의 신념과 사상의 자유를 인정해주냐 마냐의 것인데 그것을 이념 대립으로 끌고 가면서 그가 속한 단체의 사상검증으로까지 사건을 확대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마도 이 사건을 크게 확대한 측의 의도일겁니다.
하지만 세상이나 역사는 이렇게 싸우는 사람에 의해서 변해간다고 믿습니다. 그 믿음이 이용석 선생님을 지켜주리가 믿기도 하고요. 쉽지는 않겠지만....
 
탈출기 서화 과도기 낙동강 석공조합 대표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4
최서해.이기영 외 지음, 최원식 외 엮음 / 창비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문학에 대해 글에 대해 쥐뿔도 아는게 없지만....
그래도 단하나 생각하는건 문학이든 잡문이든 글이란 것은 삶의 반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문학성이든 문체든 글솜씨든 어떤걸 따지기 이전에
그 글이 삶의 냄새를 풍기느냐 아니냐로 글의 선호도가 나뉘게 된다.

그러면 식민지 시대의 삶의 냄새는 어떤 것일까?
그 시대에도 향기롭기만 하고 즐겁기만 한 삶을 살았던 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은 한없이 어렵고 고달팠으리라....

1920-30년대는 토지조사사업이 마무리 되면서 일제의 수탈이 본격화되던 시기이다.
이 고달픈 시기에도 그래도 사람들은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카프문학은 이런 지점에 위치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식민지의 어려웠던 사람들의 삶을 표현하고자 했고,
그들에게 희망이 되고자 글을 썼던 사람들이다.
그들이라고 왜 낭창낭창한 연애소설같은걸 안쓰고 싶었을까?
조금만 눈을 감으면 좀 더 편하게 글을 쓸 수 있는 삶이 왜 없었을까?

20세기에 와서 읽는 카프문학은 소설이나 이야기로 읽히기 보다는 한시대의 보고서로 더 읽힌다.
일제하 고단했던 삶의 다큐멘터리가 펼쳐지는듯하다.
때로 글은 이념과 목적이 앞서기도 한다.
교과서에서 카프문학을 평하던대로 목적의식이 지나쳐서 문학성이 부족하다는 평을 들을 수도 있겠다.

최서해씨의 글 <탈출기>, 조명희씨의 <낙동강>, 송영씨의 <석공조합대표>같은 글들을 읽다보면,
그들의 사회주의적 이념을 펼치기 위한 장으로서 문학이 활용되고 있다는걸 느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이념이 이야기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기보다는 주장이 앞선다는 느낌이 오기도 한다.
이 글들속의 주인공들은 지나치게 정형화되어 있어 자연스런 느낌이 모자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보면 약간 오버로 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오히려 더 당시로서는
자연스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식민지시대에 그런 지사적인 모습 없이 누가 과연 그 어려운 시대와 맞설수 있었을까?
지금에 와서 보면 신파같은 느낌이 들지 몰라도
오히려 나는 그게 시대의 모습을 더 잘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작품들 중 가장 뛰어난 글을 보이는건 이기영씨다.
희망없는 시대, 농촌의 가난한 소작농들의 모습과 그들의 삶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듯 생생하게 묘사된다.
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의 글은 큰 울림을 갖는다.
나는 그것이 농민들의 삶의 냄새를 가장 진솔하게 표현하고자 한 그의 글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21세기에 와서 그들이 표현하고 했던 삶과 지금의 삶은 물론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시대를 뛰어넘어 카프 문학가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를 이 책은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어떤 시대에도 문학은 삶의 반영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 말이다.
이 시대에도 그들의 문학이 촌스럽다는 느낌이나 낯선 느낌없이 읽혀졌던건
아마도 그들의 이런 진실이 통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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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에 대해서 한마디....
글들이 옛날 글들이다보니 요즘은 잘 안쓰거나 해서 모르는 단어들이 꽤 많이 나온다.
이런 낱말들의 경우 거의 따로 표시를 해뒀다.
여기까진 괜찮은데 이런 낱말풀이를 책의 뒤쪽에다가 한꺼번에 모아서 해놨다.
그것도 작품 순서대로가 아니고 가나다순... 즉 사전형식으로 만들어놨다.
근데 이게 영 불편하다.
읽다가 책 뒤쪽 찾아서 열심히 해당 낱말을 찾다보니 책을 읽는 흐름이 자꾸 깨진다.
그냥 해당 페이지 아래쪽에다가 주 처리를 하는게 훨씬 나을 듯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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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8-30 0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집에 배려가 부족했군요. 그래도 만족스럽게 읽으신 것 같아요^^

바람돌이 2006-08-30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에게는 소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시대보고서 정도로 읽혔어요. 그런 의미에서 만족스럽다고 할까요. ^^
 

일본공산당의 조선인을 기억하라
[한겨레21 2005-08-05 18:06]

[한겨레] 1952년 6월, 동포 죽이는 살인무기 제조를 거부한 스이타역 타격사건
일본 지식인사회에서 새롭게 주목받는 그들의 잊혀진 역사를 찾아나서다

▣ 도쿄·오사카=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최근 일본 사회는 일본공산당뿐만 아니라 남한도 북한도 버린, 1952년의 재일 조선인의 ‘위대한 투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 가운데 스이타 사건은 일본 반전 투쟁의 커다란 산이다. 일본공산당이 지도한 스이타 사건은 오사카부 스이타시 스이타역 조차장에 있던 군수열차를 타격하려다 경찰의 발포로 강제 진압된 투쟁으로, 지난해 6월 <오사카에서의 반전 투쟁>이라는 책이 나와 학계로부터 다시금 주목받았다.

1945년 패망한 일본은 1950~53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다시 고도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다. 패망 이후 멈췄던 군수공장에서 다시 기계가 돌아갔고, 경기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강제징용자들의 새로운 비극

그러나 재일 조선인의 비극은 다시 시작됐다. 일제시대 강제징용으로 끌려와 군수공장에서 노역에 시달렸던 조선인들은, 이번에는 한국전쟁에 쓰이는 각종 무기를 만들어야만 했다.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우리 손으로 동포를 살해하는 무기를 만들어선 안 된다”며 파업을 선동했다. 그리고 공산당의 지도 아래 모인 시위대는 반전 집회를 마치고 군수공장 폭파·군수열차 정지 등 각종 폭력투쟁을 벌였다. 그 하나가 바로 스이타 사건이다.

초여름의 열기가 피어오르는 오사카 최대의 한인촌 쓰루하시. 한국전쟁에 실려가는 각종 무기의 원자재가 생산됐던 이곳에서 재일동포 시인 김시종(74)씨를 만났다. 일본공산당 민족대책부 산하 조국방위위 기관지 <마루세다>의 기자로 스이타 사건을 지켜본 그는 아직도 일본 경찰이 벌였던 추악한 탄압을 잊지 않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4·3 항쟁을 겪고 한국에 건너온 뒤 1950년 공산당에 입당했어. 미군에 의해 폐쇄된 나카니시 민족학교를 다시 여는 임무를 맡았고, 동네 구석구석을 다니며 학생들을 모집했지. 고생 끝에 1952년 5월에 나카니시 학교의 문을 열고 조선말을 가르쳤어. 겨우 안정됐나 싶었는데 스이타 사건이 일어났어. 그해 6월24일이었지.” 한국전쟁 발발 2주년 전야였던 1952년 6월24일. 미군은 오사카부 이타미 기지에서 터를 잡고 연일 한반도를 향해 폭격기를 쏘아올렸다. 스이타역의 조차장에선 전쟁무기와 군수품을 실은 열차가 달렸다. 이 물건들은 고베항에서 한반도로 보내졌다.

이날 저녁 6시께 오사카대학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4천여명은 ‘이타미 기지 분쇄, 반전 독립의 밤’ 집회를 치렀다. 집회를 마친 뒤, 시위대열은 두 갈래로 나눠 행진했다. 목표 지점은 스이타역 조차장. 시위대는 이곳에서 군수열차를 부수는 거사를 벌이기로 한 터였다.

“일본인들 대부분은 1차 집회를 마치고 자리를 떴고, 조선인들이 많이 남았어. 일단 스이타역의 철길과 열차에 불을 지르고, 그래도 안 되면 쇠사슬을 묶고 시위대가 철길에 드러눕기로 했지. 군 수송열차를 1시간 지연시키면, 조선인 동포 1천명을 살릴 수 있거든.”

흥분한 시위대열 “오사카역으로 가자!”
시위대는 화염병을 던지면서 경찰과의 대치와 돌파를 거듭한 끝에 25일 새벽에야 스이타역 조차장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러나 썰렁한 철길 위에는 새벽 안개만 피워오를 뿐이었다. 군수열차는 보이지 않았다.

“오사카역으로 가자!” 흥분한 시위대열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내로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전철을 타기 위해 시위대가 스이타 역사로 들어서는 순간, 기다리던 일본 경찰은 총을 쏘기 시작했다. 스이타역은 순간 아수라장이 됐다. 시위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11명이 중경상을 입고 250여명이 체포됐다.

김씨는 자신이 일궈왔던 나카니시 민족학교의 동지들이 많은 희생을 치른 것에 대해 가슴 아파했다.

“보통 열차 정지 투쟁에서 후미 대열은 선두 대열보다 훨씬 위험했어. 후미 대열은 십중팔구 경찰에 잡혀갔지. 공산당 상부에서 후미 부대를 누구로 할까 고민했는데, 나카니시 사람들이 선정된 거야. 나카니시는 당시 오사카 일대에서 가장 잘 조직된 곳이었거든. 말리고 싶었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김씨와 절친했던 나카니시 민족학교 교장인 장학수씨와 학생과 교사, 학부모들이 이날 일본 경찰에 연행됐다. 이날 체포된 시위대 250여명 가운데 111명이 소요죄와 공무방해죄로 일본 검찰에 기소됐다. 이 가운데 40%가 조선인이었다. 재판은 19년이 걸렸다. 이 와중에 1953년 재판정에 선 피고들이 전쟁에서 숨진 사람들을 위해 묵념을 한 ‘스이타 묵념’ 사건(상자기사 참조)이 일어나는 등 여러 논란이 인 끝에 결국은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김시종씨는 한국 음식점이 즐비한 쓰루하시 일대를 가리키며 “여기서 한국전쟁 때 쓰이는 군수물자를 다 조달했다”며 씁쓸해했다. 가난했던 조선인들은 고철을 주워 영세 철공소에 갖다주며 생계를 이어갔다. 철공소는 이를 적당히 가공해 대규모 군수공장에 내다 팔았다. 군수공장의 하청업체였던 셈이다. 한번 터지면 사방 200m로 파편이 튀는 오아쿠 폭탄도, 네이팜탄도 이곳 조선인 노동자들의 손을 거쳤다. 수류탄의 안전핀을 직접 만드는 공장도 있었다.

‘조선인 사장’들은 파업에 불편해하다


그래서 조선인 당원들은 철공소 노동자들에게 ‘동포를 죽이는 일에 가담치 말라’며 파업을 선동했고, 일단 만들어진 전쟁무기가 조국으로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선 군수열차를 정지시켜야만 했다. 돌을 던져 신호등을 깼고, 철길의 목침을 잘랐다. 화염병을 던져 수송열차 한 편만 정지시켜도 복구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만큼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절박했다. 살인무기가 조선 반도로 건너가도록 놔둬선 안 됐다.

흥미로운 건 쓰루하시에 있는 영세 철공소 사장의 상당수가 자수성가한 조선인이었다는 점이다. 조선인 사장으로선 ‘동족상잔의 무기’라도 팔아야 이문이 남았다. 그래서 김씨는 “1950년대 반전 투쟁은 재일 조선인이 계급적으로 분리되는 계기”라며 “반전 투쟁은 계급 투쟁이기도 했다”고 평했다. 철공소 사장들은 공산주의자들이 ‘기계를 멈추라’고 하는 파업 선동에 불편해했고, 일부는 민단이 보낸 ‘학도 의용군’에 성금을 보냈다고도 했다.


일본 공산당 주요 연표
1922년 7월 일본공산당 창당. 가타야마 센, 사카이 도시히코, 도쿠다 규이치 등이 중심 인물.

1923~24년 주요 간부가 체포되면서 비합법적인 투쟁 전개.

1931년 10월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조선노동당 일본총국이 흡수되면서 조선인들이 활동 시작.

1945년 10월 주요 간부 출옥, 합법적인 정당으로 재건. 중앙위원에 재일 조선인 김천해 포함됨.

1949년 1월 총선거에서 35석 차지.

9월 점령군(미군)·일본의 좌익 탄압 정책(단체 등 규제령)에 따라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해체.

1950년 1월 코민포름의 일본공산당 비판. ‘평화혁명론’과 ‘점령군=해방군론’은 제국주의를 찬미하는 이론이라는 내용. 이를 소극적으로 받아들인 소감파와 전면적 수용을 주장한 국제파로 분열.

5월 민족대책부 중심 비합법적 조직 조국방위위 결성.

6월 점령군, 공산당 중앙위원 추방령 발표. 기관지 <아카하타> 발행 금지. 도쿠다 규이치 중국 망명.

1951년 10월 ‘51년 테제’ 발표. 무기제조법 교과서 배포하는 등 군사노선으로 선회.

1952년 5월 조선전쟁 반대 투쟁. 도쿄 ‘피의 메이데이’ 사건, 스이타 사건.


7월 나고야 오스 사건 1954년 8월 북한 남일 외상 성명 “재일 조선인은 공화국의 해외 공민”.

1955년 초 조선인 당원 집단 탈당.

5월 재일본조선인총연합(총련) 결성.

7월 제6차 전국협의회에서 극좌모험주의 비판, 평화혁명 노선으로 재전환, 민족대책부 해체.

2005년 현재 중의원 9석(총 480석), 참의원 9석(총 242석).



‘묵념’이 던진 파문
스이타 사건 피고인들의 재판정 돌발행동이 일본 사법부의 독립성을 깨우다

스이타 사건의 피고인 111명은 소요죄와 공무집행방해죄로 검찰에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대개가 재일 조선인이었다. 변호인단은 “헌법 옹호를 위해 행진하던 시위대를 경찰이 부당하게 습격한 사건”이라고 반박했다.

1953년 7월29일 제29차 공판. 조선인 피고인 강순옥은 재판정에서 “7월27일 합의된 휴전을 축하하며 전쟁 때 스러진 희생자를 위해 묵념하자”고 제안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피고인들은 일제히 묵념을 했다. 검사는 제지를 요청했지만, 재판을 진행하던 사사키 데쓰조오 판사는 묵념을 중지시키지 않았다.

이 사건은 일본 법조계에 파문을 던졌다. 재판정에서의 단순한 묵념 사건은 ‘사법부의 독립성’에 대한 논쟁으로 번졌다. 오사카 검찰은 재판부가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며 즉각 항의했고, 중의원 법무위원회까지 나서 ‘적절한 조처’를 요구했다. 재판관 탄핵소추위원회는 8월11일 오사카 고등법원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사사키 판사는 “재판의 독립성을 해치는 행위”라고 조사를 거부했다. 오사카 지방법원 판사들도 자료 제출을 거부했기 때문에 조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피고인 전원이 무죄 판결을 받음에 따라 사건은 일단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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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6-08-29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을 잘못 보고 순간 깜짝 놀랐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