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3월 2일 베를린 슈포르트팔라스트 집회에서 히틀러는 "전 세계의 곡창 지대가 될 수 있는 나라에서 수백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고 외쳤다. 단 한 단어,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단어만으로 히틀러는 소련에서의 떼죽음을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호자인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결부시켜버렸다. 히틀러의 평가를 전적으로 거부 또는 수용하는 일은 쉽지 않았는데, 그의 말이 거짓과 진실의 묘한 복합체였기 때문이다. 소련 정치를 잘 모르는 사람들, 즉 대부분의 사람은 기근에 대한 히틀러의 평가를 받아들이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와 뒤섞여 있던, 좌파 정치에 대한 그의 비난까지 받아들이게 되었다.
- P122

그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을 유지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연합을 피해야했다. 오직 공산주의자만 인류 진보를 이끌 자격이 있으며, 억압받는이들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다른 이들은 모두 시기꾼이자 사회주의 파시스트‘였다. 그들은 나치를 포함해 자신보다 오른쪽에 있는 모든 당과 연합할 것으로 여겨졌다. 독일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주적은나치가 아니라 사회민주당이었다.
- P123

하지만 나치 독일의  정치적 난민을 포함한 많은 이는 이를 소련의 승리이자, 소련이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지한다는 증거로 봤다. 프랑스에서 인민 전선은가장 뛰어난 유럽의 지식인조차 소련을 비판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 P132

스탈린의 정치적 재능 중 하나는 외세의 위협을 국내 정책 실패의전적인 원인인 것처럼 제시하고, 자기 자신은 어느 것에도 책임이 없는 듯 행동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정책 실패에 따른 비난을 받지않았고, 자신이 선택한 내부의 적을 외세의 앞잡이로 규정할 수 있었다.  - P137

지도부 숙청과 주요 기관 장악이 끝나자, 스탈린과 히틀러는 모두1937년과 1938년에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숙청을 실시했다. 그러나부농 박멸 작전은 대공포 시대의 전부가 아니었다. 이것은 계급 전쟁으로 간주되거나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소련은 계급으로서의 적을죽이면서, 동시에 민족으로서의 적도 죽이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이 되자,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체제는 인종차별과반유대주의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하지만 국가 내부의 적에 대한사살 작전을 시작한 곳은 스탈린의 소련이었다.
- P161

1933년 기아 시기에 고안된 ‘폴란드 군사 조직은 우크라이나에 존재하는 환상의 조직으로 계속 존재했고, 이후에는 소련 전역에서 진행된 폴란드에 대한 민족 테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변모했다.  - P168

인민 전선 시대에, 소련의 대외적 영향력은 관용적인 이미지가 핵심이었다. 파시즘과 국가사회주의가 부상하던 유럽과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린치가 성행하던 남부인들이 있던 미국에게, 모스크바가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었던 주된 근거는 일체의 차별을 철폐한다문화 국가‘라는 이미지였다. 예를 들어 1936년 제작되어 인기를 끈소련 영화 「서커스의 여주인공은 미국에서 흑인으로 태어나 소련에서 인종차별을 피할 피란처를 찾은 곡예단원이었다.‘
- P171

이 3차 혁명은 사실상 반혁명이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실패를 내포하고 있었다. 15년 남짓 동안 소련은 살아남은 시민들에게 많은 일을 해냈다. 예를 들어 대공포 시대가 징짐에 달했을 때 국가 연금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혁명 원칙의 근간을 이루던 일부 본질적 가정은 폐기되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주장은이제 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계급이 아닌 명목상의 개인적 정체성이나 문화적 연관성 때문에 유죄가 되었다. - P195

나치 독일의 공개적 폭력 행위는 소련에 도움이 되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인민 전선 지지자들은 유럽이 민족 간 폭력 행의에 빠지지 않도록 소련이 보호해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련은 훨씬규모가 큰 민족 학살 작전에 돌입한 상태였다.  - P198

이렇게 블러드랜드의 역사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폴란드의절반을 소련에 내줌으로써, 히틀러는 폴란드 박멸 작전에서 몹시 잔혹하게 자행된 스탈린의 테러가 폴란드 본토에서 재현되게 했다. 스탈린 덕분에 히틀러는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에서 자신의 첫 번째 대량 살상 정책을 실행할 수 있었다.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공동 침공이후 21개월 동안, 독일인과 소련인들은 각각 폴란드의 절반을 지배하면서 비슷한 이유로 비슷한 숫자의 폴란드 민간인들을 죽였다.
두 국가의 살육 담당 기관은 제3의 영토에 집중했다. 스탈린처럼,
히틀러도 자신의 첫 번째 주요 민족 사살 작전의 대상으로 폴란드인을 선택했다.
- P208

폴란드 정복이 마무리되자, 독일과 소련은 서로의 관계를 재확인하려고 또 다른 만남을 가졌다. 바르샤바가 독일의 손에 떨어진 1939년9월 28일, 두 동맹국은 양쪽의 국경 확정과 우정 확인을 골자로 한새로운 조약에 서명했다. 서로의 영향권에 약간씩 변화를 준 그 내용을 살펴보면, 바르샤바는 독일에, 리투아니아는 소련에 속한 땅이 되었다. - P226

폴란드의 모든 것은 그 땅에서 사라지고, "게르만족의 지배"로 대체되어야 했다. 히틀러가 쓴 대로, 독일은 "반드시 이 용납할 수 없는인종적 성분들을 봉쇄해 다시는 그들의 피가 더러워지지 않도록 하거나, 아니면 지체 없이 이를 없애 깨끗한 땅을 그 동지들에게 넘겨줘야 한다. 1938년 10월 초 히틀러는 하인리히 힘러에게 새로운 책무를 맡겼다. 이미 나치 친위대와 독일 경찰의 수장이었던 힘러는 이제
"게르만족의 지배를 확고히 할 제국 정치위원"으로서 인종 문제를 총괄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고, 그가 맡은 임무는 바로 독일에 병합된폴란드 지역의 토착민들을 쓸어버린 뒤 그 자리를 독일인으로 채워넣는 것이었다.
- P233

서유럽에서 이 기간은 명목상의 전시, 이른바 "가짜 전쟁으로 일컬어졌다. 이렇다 할 군사적 움직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프랑스와 영국은 1939년 9월부터 독일과 전쟁 중이었지만 그해 가을과 겨울은 물론이고 이듬해 봄 폴란드가 무릎을 꿇고, 파괴당하고, 독일과소련이 그 땅을 나누어 가질 때까지 그리고 폴란드인 수만 명이 목숨을 잃고 수십만 명이 살던 곳에서 강제로 쫓겨날 때까지도 서부 전선에서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독일과 그의 동맹 소련은 얼마든지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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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대량학살 하면 보통 홀로코스트가 떠오르며, 홀로코스트는빠르게 진행된 살인 공정‘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런 이미지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명쾌하다. 독일과 소련의 살육 현장에서, 그 살육 방법은 오히려 원시적인 것이었다. 1933년에서 1945년까지 블러드랜드에서 살육된 1400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 중 절반 이상은 식량을비급받지 못해 죽었다. 20세기 중반, 유럽인들은 같은 유럽인을 무지무지하게 많이 굶겨 죽였다. 홀로코스트 다음가는 두 가지 최대 대량학살, 1930년대에 스탈린이 시행한 의도적 굶주림과 1940년대 초히틀러의 소련 전쟁포로 굶기기는 이런 식의 학살이었다. 그건 사실 계획상으로는 더 큰 규모였다. "기아 계획"에서 나치는 1941년과1942년에 걸친 겨울에 수천만 명의 슬라브인과 유대인을 굶겨 죽이려 했다.
- P15

어떤 기술을 썼든 간에 그 학살은 개인적인 살인이었다. 굶주리고있는 사람들은 종종 그들을 굶주리게 만든, 감시탑에 있는 장본인들의 눈에 보였다. 총살당하는 이들은 아주 근거리에서, 셋 중 둘은 소총의 가늠쇠 너머로, 셋 중 한 명은 머리에 권총이 겨눠진 채로 보였다. 중독사하게 될 사람들은 색출되고, 기차에 태워지며, 가스실로 밀려 들어갔다. 그들은 소유한 재물을 빼앗기고, 다음에 입은 옷을 빼앗기더니, 여성들은 머리카락마저 잃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다르게죽었다. 그들 한명 한 명이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었기에.
- P16

나중에 히틀러는 독일 수상으로서 소련과 더불어 폴란드를 분할하는 조약을 맺게 된다. 이 단계를 밟으며, 그는 많은 독일인이 가졌던 극단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폴란드의 국경선은 부당하며, 그 국민은 국민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  - P38

1930년 우크라이나의 수확량은 1931년에는 달성할 수 없는 기준을 세웠다. 집단 농업이 개인 농업만큼 효율적이라 하더라도 불가능한 수준이었는데, 현실은 그렇게 효율적이지도 않았다. 1930년의 대풍작은 공산당이 1931년의 징발량을 설정할 때의 기준선을 제공했다. 모스크바는 우크라이나가 제공할 수 있는 양보다 훨씬 더 많은양을 기대했다. - P76

누구 못지않게 정치를 사적으로 풀었던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기근또한 사적인 차원에서 접근했다. 그가 먼저 보인 충동적 행동이면서그 뒤로도 바꾸지 않았던 방침은 우크라이나 농민의 굶주림을 우크라이나 공산당 당원의 배신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집단화 정책이 비난받을 가능성은 허용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실행 과정에, 지역 지도자에게 있어야 했고 절대로 집단화라는 개념 자체에 있어서는 안 됐다. 1932년 상반기에 자신의 변혁을 밀어붙이면서, 스탈린이 골몰한 문제는 국민의 고통이 아니었다. 집단화 정책의이미지가 손상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는 굶주리는 우크라이나농민이 조국인 공화국에서 이반하고 있으며 "징징거림으로서 다른소련 시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 P79

스탈린은 현실을 완전히뒤집어서, 굶주림을 무기로 쓰는 쪽은 자신이 아닌 농민들이라고 상상했다. 카가노비치는 스탈린에게 우크라이나인들을 "무고한 희생자"
라고 말하는 것은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추악한 은폐 공작에 불과하다고 다시금 확인해주었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염려를 표현했다. 우크라이나는 "요새"가 되어야 했다.
두 사람은 징발 정책을 고수하고, 곡물을 최대한 빨리 수출하는 것만이 합리적인 대책이라며 뜻을 모았다. 이제 스탈린은 굶주림과 우크라이나 공산주의자들이 보이는 불성실함 사이의 관계도를 완성했고,
이에 최소한 자기 자신은 만족하는 듯했다. 굶주림은 파괴 행위의 결과였고, 지역 당원들은 파괴 공작원이었으며, 기만적인 당 고위 간부들은 폴란드의 간첩질을 하느라 부하 직원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 P82

스탈린의 주장에 따르면, 소련령 우크라이나에서의 스탈린 정책에대한 저항이란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보이지도 않는 별스러운 행위였다. 저항은 더 이상 사회주의의 적들에게 열려 있지 않았는데, 이제그것은 ‘조용하며 거의 신성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날의 부농은 "온화하고 친절하며, 거의 성인 같은 친구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 죄가 없어 보이는 사람도 죄인으로 봐야 했다. 배고픔으로 서서히 죽어가던 농민은 겉모습과는 달리, 자본주의 열강을 위해 소련 평판 저하 작전을 수행하는 파괴 공작원이어야 했다. 굶주림은 곧 저항이었고, 저항은 사회주의의 승리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징조였다. 이것은 스탈린이 모스크바에서 한 공상에 그치지 않았다.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가 1932년 후반 사망자가 대거 발생한 지역을여행하던 중 실행토록 한 이념적 노선이었다.
- P88

하지만 스탈린은 소련에 대한 외부 세계의 관심을 끌지 않고도 수백만 명을 살릴 수 있었다. 식량 수출을 몇 달만 중단하고, 300만 톤에 달하는) 곡물 비축분을 풀거나, 하다못해 농민이 지역곡물 저장고를 이용할 수 있게만 하면 됐다. 1932년 11월이 되어서야실시한, 이런 단순한 조치만으로도 사망자 수를 몇백만 명에서 수십만 명 수준으로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팔땅만 끼고 있었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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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도시는 전근대적인 공간과 근대적인 공간, 그리고 한국인과 일본인의 거주 지역이 구분된 식민지 이중도시 (colonial dual city)‘였다. 도시 곳곳에는 산업화된 한국 음식, 일본 음식, 중국 음식, 서양 음식을 판매하는 공간이 자리 잡았다.
- P59

메뉴 중에서 인기가 많았던 음식은 설렁탕이었다. 하지만 일부 양반 출신들과 근대적 취향을 가진 모던보이 (modern boy)와 모던걸(modern girl)은 설렁탕을 먹고 싶어도 직접 음식점에 가서 먹는 것을 꺼렸다.
양반 출신들은 여전히 계층과 남녀 구분을 따졌고,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자신들도 식민지 국민이면서 하층민을 경멸의 대상으로 여겨 설렁탕집 출입을 삼갔다. 서울의 설렁탕집 주인 중에는 이런 ‘별난‘ 고객을 위해 배달 서비스를 하기도 했다.  - P60

일본에도 중국 음식점이 많이 있지만 그곳에서 우동을 팔지는 않는다. 중국 대륙과 타이완의 중국 음식점에도 우동이란 메뉴는 없다. 그런데 왜 한국의 중국 음식점에만 우동이란 음식이 있을까? 그 이유는 식민지 시기 중국 음식점에서 국수류의 음식을 일본식 표현으로 우동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 P71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음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대부분은 제국의 음식이 일방적으로 식민지에 전파되었다는 주장을 많이 펼쳤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음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 중에는 제국과 식민지의 지배관계가 해체된 후에 오히려 식민지의 음식이 제국으로 이71동하는 사례가 있음을 증명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커리가 그러하고,
일본의 야키니쿠와 가라시멘타이코가 그러하다.
- P99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이 멸치를 식재료로 여기지 않은 반면, 일본인은 말린 멸치를 국물 요리의 육수를 만드는 데 주로 사용했다. 김복인은 일본인의 멸치 사용법을 가지고 와서 조선인도 소고기 대신에 찌개나 국에 넣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지금이야 말린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먹거나 기름에 볶거나 육수를 내어 먹지만, 이런 멸치 식용 방식은해방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해방 이후 멸치 어획량은 날로 증가했지만 일본 수출 길이 원활하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 언론에서 멸치의 영양과 맛과 요리법을 소개하면서 멸치 소비를 장려했다. 멸치는 1970년대 이후 한국 음식의 중요한 식재료가 되었다.
- P115

한반도의 식생활 역사에서 1937년부터 1953년은 중일전쟁 - 태평양전쟁 · 한국전쟁으로 인해 식량 부족 문제가 가장 심각했던 때였다. 이시기에 정권을 장악했던 조선총독부, 미국과 소련의 군정, 그리고 남북한의 정부는 식량 부족 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없었다. 오히려 통치자들은 식량 공급을 안정시키기 위해 앞선 정권들이 행했던 조치들을그대로 따르는 선택을 자주 했다. 조선총독부가 시행했던 절미운동,
혼식과 분식 장려운동, 대용식운동 같은 정책은 미군정기, 대한민국의이승만과 박정희 통치 시기에도 계속되었다.
- P141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는 공짜가 아니었다.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와 협정을 체결할 때, 도입 농산물의 판매액을 한국 통화로 적립하고, 그중 일부는 한국에 있는 미국 원조기관의 비용으로 충당하며, 나머지는한미 간의 합의에 따라 한국의 경제개발과 군사력 지원에 사용하기로약속했다. 미국의 밀 생산 농민들은 페기할 뻔한 남아도는 밀을 한국같은 저개발 국가에 판매하여 수익을 올렸고, 미국 정부는 원조 명분을내세워 한국 정부와 군사적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구축했다.
- P146

그러나 1960년대 공장제 식품과 1970년대 히트상품 중 대부분은일본의 공장제 식품을 모방한 것이었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의 외교관계가 회복되기 이전에는 한국의 많은 식품회사가 비합법적인 방법으로일본 식품을 모방했다. 한일수교 이후에는 합법적으로 일본의 제조 기술을 사들여와 한국 시장에 제품을 내놓았다. 1960~1970년대 한국의식품회사는 일본이 미국에서 가져온 공장제 식품을 다시 도입하여 또다른 한국식 식품으로 변형해 식품 시장의 규모를 키웠다. 냉전으로 인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국가 사이의 정치·경제·군사적 경계가 나뉜상태에서 한국의 공장제 식품은 미국→일본 → 한국‘으로 연결된 구도안에서 변신했다.
- P149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간편하게 먹는 식품의 개발은 제1차 세계대전때부터 이루어졌지만, 한국의 K-레이션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으로시작되었다. 같은 시기에 한국 음식의 인스턴트화가 진행되어 1967년8월 삼양식품은 베트남에 라면 10만 개를 수출했다. 베트남에는 군인40들 외에도 한진 · 대한통운·현대건설 같은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었다.
삼양라면을 비롯한 한국의 인스턴트식품은 이 회사의 직원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음식이었다. 이처럼 베트남전쟁이라는 참혹한 사건 이면에한국 정부의 외화 수입 증대, 한국 기업들의 성장, 그리고 공장제 한국식품의 확대라는 아이러니한 장면이 담겨 있다.
- P167

미국식 패스트푸드 기업의 국내 진출은 한국 소비자들의 넉넉해진 주머니를 노린 외국 업체들의 노림수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전두환 군사정권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기도 했다. 한국 정부가 세계인이 모이는체육행사에서 낙후된 한국 음식점이 공개되는 것을 꺼려해 미국식 패스트푸드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소비자들은 이 패스트푸드점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미국식 문화를 소비했다.
- P196

 오늘날 세계 곡물시장은 금융자본이 주도하며 곡물과 식품을 선구매하여 유통을 장악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세게 가 시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기농운동, 슬로푸드운동, 지역 농산물 소비운동 같은 사회운동은 초국가적 곡물 - 식품 유통 대기업을 막아내는 데는 역부족이다.
- P245

식민지 타이완의 열대 과일 바나나가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 유입되는 이 흐름은 식민지가 제국에 포섭되어 ‘제국화 되는 한과정이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제국과 식민지 사이의 열대 과일 유통은 세계화의 전조였다.
- P250

세계 식품체제에 편입된 농산물 씨앗의 치열한 경쟁에서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다. 세계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농산물 씨앗의 재산권 확보는 식량 주권과 식랑 안보 그 자체이다. 중저가 한정식 음식점의 필수 메뉴인 샐러드에 들어가는 양상추, 잡채 재료로 사용되는 피망.
숙회로 나오는 브로콜리, 이 채소들의 씨앗이 누구 것인지 알아야 하는이유다.
- P263

세계화는 냉전의 장벽을 넘어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능하게해주었다. 외국에서 처음 먹어본 이국적인 향신료는 입맛에 맞지 않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귀국 후에도 그 향신료의 맛을 잊지 못해 그런 음식을 파는 곳을 찾아다니거나 만들어보려고 애쓴다. 심지어 외국 여행의 경험이 없는 사람도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맛에 대한 간접 경험을 하고 먹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식품회사나 외식업체는 이런 소비자들의 새로운 욕구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상품화한다. 청양고추, 미국식 핫소스, 마라는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인적 세계화가만들어낸 ‘지구화된 맛‘ 이다.
- P281

"인간은 함께 식사하는 동물이다. 20 여러 사람과 함께 음식점에 가는이유는 서로 인간적 유대관계를 맺거나 지속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함께 식사‘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인류이기를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가정에서는 더욱 자주 함께 식사를 해야 한다.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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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
알렉산드라 해리스 지음, 김정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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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으로 한 사람의 일생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싶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을 알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책을 읽는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보면서 소설과는 달리 이 사람을 삶을 좀 더 알고싶다는 생각을 강렬하게 하게 된다.

<자기만의 방>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때론 투사처럼 보이고 때론 살아가는 모든 것에 연민을 느끼는 섬세한 여성으로 보이기도 하며, 여성의 역사를 얘기하는 곳에서는 치밀한 학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 사람의 이런 다면성이야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 아름다운 인간에 대해서 좀 더 내밀한 것까지 알고싶다는 욕구를 끊을 수가 없다. 

단 그녀의 소설이나 에세이는 읽기가  쉽지 않으므로, 그녀의 삶에 대한 글은  일단은 좀 쉽게 알아먹을 수 있게 워밍업부터 시작하고픈 마음이 막 솟구치는데 이 책이 딱 그 지점에 위치한다. 


버지니아 울프를 한마디로 대표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을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버지니아 울프는 <쓰는 사람>이라고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정말 너무나 성실하게 글을 썼고, 바로 그 글을 쓰는데서 삶의 의미와 존재이유를 찾았던 사람이다.

존재 이유를 가진 사람은 염세적일 수 없다. 더더군다나 성실하게 자신의 존재 이유를 채워나가는 사람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녀는 정말 열심히 쓴다.

소설을 쓰고, 일기를 쓰고, 에세이를 쓰고, 서평을 쓰고.....

그녀가 남긴 글의 양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쓰는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녀는 쓰기 위해 열심히 읽는 사람이었으며, 론볼이라는 스포츠를 평생 즐긴 사람이기도 하고, 산책을 즐기며 자신을 둘러싼 사회를 명민하게 관찰하는 사람이었고, 당대의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촉각을 세우며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고 발언하는 사람이었다. 

동시에 자기 집에 출판사를 만들고 직접 책을 출판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편지를 쓰고,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삶의 마지막까지 보살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를 염세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단 하나 그녀의 신경쇠약이었는데, 그것은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아마도 조울증이었던 듯 싶다. 

얼마전에 읽었던 책에 의하면 조울증은 우울증과는 다른 신체 질환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병하는, 당시에는 제대로 원인이나 치료방법도 없어서 그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울증의 시기를 무조건 버텨내야만 했던 질병의 고통속에서도 그녀는 어떻게든 삶을 이어나가고 쓰고자 했다.


단지 그의 죽음이 '자살'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삶 전체를 애수와 염세주의로 얘기하는 것은 너무 부당하지 않은가? 그녀의 병을 알면서 나는 그녀의 자살도 삶에 대한 절망이나 세상에 대한 염세주의로 생각해서는 안되는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쓰는 사람으로서의 삶이 더 이상 진행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완결짓고자 하는 욕망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지금 태어났다면 그래서 조울증에 대한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면 우리는 아주 나이 든 노년의 울프가 쓴 더 원숙해진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녀의 자살을 나는 절망으로 읽기 보다는 자신의 삶의 마지막 마침표를 스스로 찍음으로써 자신의 <쓰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가장 인간적인 방법으로 마감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통해 바라본 버지니아 울프의 삶은 아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 - 그래서 이런 글을 쓸 수 있었구나-과 그녀는 왜 이런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계속 가지고 살았을까 하는 의문들이 이율배반적으로 뒤섞이게 만든다.

역시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녀의 그 이율배반들까지 이해하게 될 때 온전히 그녀를 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그건 불가능하리라...

나 자신조차도 나를 다 알지 못하고, 그 때 내가 왜 그랬지? 나는 왜 이런 생각을 못 버리지 하면서 살아가는게 인간이니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로 알려져있다.

나 역시 처음 그녀의 이름을 안 것은 이 시를 통해서인데, 이 시속에서 풍기는 그녀의 이미지는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목마와 숙녀>는 많은 사람이 버지니아 울프의 이름을 알게 했지만, 그녀에 대해 잘못된 이미지 - 낭만적인 소녀감성, 염세주의자, 불행한 삶에 침몰당한 여성작가 이런 식의-를 심어주는데도 너무 큰 공헌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의 이름을 부를 때 함부로 부르지 말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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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지 2021-04-15 08: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쓰는 사람으로 존재한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 차분하게 기술한 리뷰를 읽으며 이 책을 접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오늘 하루도 웃어서 행복한 시간 보내길 바랍니다.

바람돌이 2021-04-15 14:51   좋아요 1 | URL
저처럼 버지니아 울프를 막 읽기 시작했다면 먼저 그녀의 삶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성지님도 오늘 하루 웃으며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새파랑 2021-04-15 08: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목마와 숙녀 첨들어 봐서 찾아봤어요. 바람돌이 님이 그렇게 표현하신 이유를 알겠더라는~! 저는 버지니아 울프 책을 몇권 안읽어봤는데, 읽고 싶어지네요^^

바람돌이 2021-04-15 14:56   좋아요 1 | URL
어머 여기서 또 새파랑님이 젊다는 게 보이네요. ^^ 저처럼 연식이 오래된 이들 중 중고등학교 때 책 꽤나 읽는다 하면 저 시가 아주 유명했거든요. ㅎㅎ 저도 몇권 안 읽었어요. 버 지니아 울프 책 2권, 관련 책 요것까지 2권이 다입니다. 이 책은 저처럼 입문하는 사람한테 딱 좋은 것 같아요. ^^ ,

scott 2021-04-15 11: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생각에 동감 !!
[낭만적인 소녀감성, 염세주의자, 불행한 삶에 침몰당한 여성작가]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건
영문학자들(버지니아 울프를 전공한)의 잘못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고딩때 올랜도로 울프 여사 책을 처음 읽고 난후 대학에 들어가서
영문학 전공하는 친구가 울프 올랜도 강독 수업 있다고 알려줘서 한한기 수강(청강)한적이 있는데 분열된 자아 동성애 ,,,이런쪽으로만 집중했어요.
이후 울프 여상가 남긴 일기 기타 지인들과 주고 받았던 편지들을 읽어보니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정말 성실하고 근면하게 글쓰기에 집중하며
스포츠 활동을 활발히 하며 변화하는 사회를 면밀하게 관찰하며 혼돈의 세계 속에 여성이 어떤 목소리를 내야할지 줄기차게 자기 목소리를 냈던 인물입니다.
병에 시달리고 정신병으로 몰아간건 후대인들의 편협한 시각이라는것

적절한 시기에 치료를 받았어야 하는데 어린시절에 방치 당하고 학대 당한,,,
울프 여사가 남기고 간 작품들이 현시대에 더더욱 활발하게 읽고 재조명 해야 할것 같습니다.

바람돌이 2021-04-16 00:15   좋아요 1 | URL
그쵸 그쵸 scott님
울프는 정말 성실한 생활인 작가. 그녀의 병이나 동성애는 진짜 그녀 삶의 일부일뿐 그녀 삶 전체와 작품의 결정적인 조건은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근데 scott님은 고등학생 시절에 벌써 울프를 읽었다니 우와 오늘도 존경합니다. ^^

2021-04-16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6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9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20 0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1-04-18 01: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버지니아 울프가 글을 써서 조금 괜찮아지기도 했겠지만, 나중에는 그게 좋아지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더군요 힘들어도 자기 삶을 살려고 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이었다면 치료를 받기도 했을 텐데... 자기 마음도 모르고 다른 사람 마음은 더 모르겠지요 저도 요새 좀 그런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희선

바람돌이 2021-04-18 01:40   좋아요 1 | URL
버지니아 울프의 병과 그녀 자신을 떼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녀의 글을 병과 너무 관련짓는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치 그녀의 정신분열이 그녀의 글을 낳은 것 처럼... 그녀는 단지 몸이 아팠을 뿐, 글을 쓰는 그녀의 정신은 누구보다 건강햇다고 생각합니다. ^^희선님 남은 주말 편안히 보내세요. ^^
 

지금 미국에 가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아. 혁명을 이끌기에도. 게다가, 백인 학교에 가면 백인들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어 하는 걸 배우는 거야. 그럼 돌아와서 백인들이 원하는 나라를 세우겠지. 계속해서 그들에게 봉사하는 나라. 그럼 우리는 영원히 자유를 얻을 수 없어.」 - P331

「우리는 힘을 가진 사람 이야기를 믿는다. 바로 그 사람이이야기를 쓴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역사 공부를 할 때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누구의 이야기를 놓치고 있을까?
이 목소리가 나오게 하기 위해 누구의 목소리가 억눌렸을까?
그 답을 알게 되면 그 이야기도 찾아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더분명한 - 그래도 여전히 불완전하긴 하지만 - 그림을 볼 수있다.」 - P337

젊었을 때 야우는 그들이 왜 사람들에게 애초에 잘못을 저지르지말라고 설교하지 않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해하기 시작했다. 용서는 사실 뒤에 이루어 시는 행위, 즉 나쁜 행동 뒤 미래의 일부였다. 사람들의 눈을 미래로 돌리면 현재에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 P353

악행을 저지르는 건 그게 너든 나든, 어머니든아버지는, 황금해안 사람이든 백인이든, 어부가 물에 그물을던지는 것과 같지. 어부는 고기를 잡으면 자기가 먹을 한두 마리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물에 던지면서 그 고기들이 다시 예전처럼 살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해서 한때 잡혔던 걸 잊을 수는 없는 법이지, 하지만 야우, 그래도 넌 스스로 자유로워져야 한다.」 - P360

「우린 돌아갈 수 없어요, 안 그래요?」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그의 팔을 만졌다. 그녀는 이제야 그가 꿈속 인물이 아니라 진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라도 한 것처럼 그날 밤 그를 만난뒤 가장 진지해 보였다. 우린 애초에 가본 적도 없는 곳으로돌아갈 수가 없어요. 거기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니까. 여기가 우리 거니까.」 그녀는 할렘 전체를, 뉴욕 전체를, 미국 전체를 손에 잡으려는 듯 손을 앞으로 휘둘렀다.
- P379

「넌 옛날에 시위 행진을 했으니 뭔가 좀 했다고 생각하지?
나도 행진했다. 나는 네 아버지와 어린 아기와 함께 앨라배마에서 먼 길을 행진했다. 머나먼 할렘까지. 내 아들은 나와 우리부모님이 본 세상보다 나은 곳에서 살 거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유명한 가수가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로버트는 백인을 위해 탄광에서 일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것도 행진이었다. 카슨.」 - P389

우리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했지. 〈장님은 우리가 볼 수 있다고 해서 우리를 미쳤다고 하지 않는다.」 - P435

자신이 여기 이렇게 자유롭게 살아 있는 것은 당위가 아님을마조리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어느 감방에 처박히지 않은 것은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피나는 노력이나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믿음 덕이 아니라 그저 우연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P437

「이 문은 그들을 실어 갈 배들이 기다리는 해변으로 통합니다.」그들, 그들 항상 그들이었다. 아무도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다. 투어 그룹은 아무도 말이 없었다. - P442

마조리는 그가 서 있는 곳, 불과 물이 만나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고 두 사람은 심연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마커스는 성 안에서 느꼈던 공포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것이 불과 같은 것임을, 지배되고 억제되는 야생의 것임을 알았다. - P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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