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대량학살 하면 보통 홀로코스트가 떠오르며, 홀로코스트는빠르게 진행된 살인 공정‘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런 이미지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명쾌하다. 독일과 소련의 살육 현장에서, 그 살육 방법은 오히려 원시적인 것이었다. 1933년에서 1945년까지 블러드랜드에서 살육된 1400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 중 절반 이상은 식량을비급받지 못해 죽었다. 20세기 중반, 유럽인들은 같은 유럽인을 무지무지하게 많이 굶겨 죽였다. 홀로코스트 다음가는 두 가지 최대 대량학살, 1930년대에 스탈린이 시행한 의도적 굶주림과 1940년대 초히틀러의 소련 전쟁포로 굶기기는 이런 식의 학살이었다. 그건 사실 계획상으로는 더 큰 규모였다. "기아 계획"에서 나치는 1941년과1942년에 걸친 겨울에 수천만 명의 슬라브인과 유대인을 굶겨 죽이려 했다.
- P15

어떤 기술을 썼든 간에 그 학살은 개인적인 살인이었다. 굶주리고있는 사람들은 종종 그들을 굶주리게 만든, 감시탑에 있는 장본인들의 눈에 보였다. 총살당하는 이들은 아주 근거리에서, 셋 중 둘은 소총의 가늠쇠 너머로, 셋 중 한 명은 머리에 권총이 겨눠진 채로 보였다. 중독사하게 될 사람들은 색출되고, 기차에 태워지며, 가스실로 밀려 들어갔다. 그들은 소유한 재물을 빼앗기고, 다음에 입은 옷을 빼앗기더니, 여성들은 머리카락마저 잃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다르게죽었다. 그들 한명 한 명이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었기에.
- P16

나중에 히틀러는 독일 수상으로서 소련과 더불어 폴란드를 분할하는 조약을 맺게 된다. 이 단계를 밟으며, 그는 많은 독일인이 가졌던 극단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폴란드의 국경선은 부당하며, 그 국민은 국민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  - P38

1930년 우크라이나의 수확량은 1931년에는 달성할 수 없는 기준을 세웠다. 집단 농업이 개인 농업만큼 효율적이라 하더라도 불가능한 수준이었는데, 현실은 그렇게 효율적이지도 않았다. 1930년의 대풍작은 공산당이 1931년의 징발량을 설정할 때의 기준선을 제공했다. 모스크바는 우크라이나가 제공할 수 있는 양보다 훨씬 더 많은양을 기대했다. - P76

누구 못지않게 정치를 사적으로 풀었던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기근또한 사적인 차원에서 접근했다. 그가 먼저 보인 충동적 행동이면서그 뒤로도 바꾸지 않았던 방침은 우크라이나 농민의 굶주림을 우크라이나 공산당 당원의 배신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집단화 정책이 비난받을 가능성은 허용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실행 과정에, 지역 지도자에게 있어야 했고 절대로 집단화라는 개념 자체에 있어서는 안 됐다. 1932년 상반기에 자신의 변혁을 밀어붙이면서, 스탈린이 골몰한 문제는 국민의 고통이 아니었다. 집단화 정책의이미지가 손상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는 굶주리는 우크라이나농민이 조국인 공화국에서 이반하고 있으며 "징징거림으로서 다른소련 시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 P79

스탈린은 현실을 완전히뒤집어서, 굶주림을 무기로 쓰는 쪽은 자신이 아닌 농민들이라고 상상했다. 카가노비치는 스탈린에게 우크라이나인들을 "무고한 희생자"
라고 말하는 것은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추악한 은폐 공작에 불과하다고 다시금 확인해주었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염려를 표현했다. 우크라이나는 "요새"가 되어야 했다.
두 사람은 징발 정책을 고수하고, 곡물을 최대한 빨리 수출하는 것만이 합리적인 대책이라며 뜻을 모았다. 이제 스탈린은 굶주림과 우크라이나 공산주의자들이 보이는 불성실함 사이의 관계도를 완성했고,
이에 최소한 자기 자신은 만족하는 듯했다. 굶주림은 파괴 행위의 결과였고, 지역 당원들은 파괴 공작원이었으며, 기만적인 당 고위 간부들은 폴란드의 간첩질을 하느라 부하 직원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 P82

스탈린의 주장에 따르면, 소련령 우크라이나에서의 스탈린 정책에대한 저항이란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보이지도 않는 별스러운 행위였다. 저항은 더 이상 사회주의의 적들에게 열려 있지 않았는데, 이제그것은 ‘조용하며 거의 신성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날의 부농은 "온화하고 친절하며, 거의 성인 같은 친구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 죄가 없어 보이는 사람도 죄인으로 봐야 했다. 배고픔으로 서서히 죽어가던 농민은 겉모습과는 달리, 자본주의 열강을 위해 소련 평판 저하 작전을 수행하는 파괴 공작원이어야 했다. 굶주림은 곧 저항이었고, 저항은 사회주의의 승리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징조였다. 이것은 스탈린이 모스크바에서 한 공상에 그치지 않았다.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가 1932년 후반 사망자가 대거 발생한 지역을여행하던 중 실행토록 한 이념적 노선이었다.
- P88

하지만 스탈린은 소련에 대한 외부 세계의 관심을 끌지 않고도 수백만 명을 살릴 수 있었다. 식량 수출을 몇 달만 중단하고, 300만 톤에 달하는) 곡물 비축분을 풀거나, 하다못해 농민이 지역곡물 저장고를 이용할 수 있게만 하면 됐다. 1932년 11월이 되어서야실시한, 이런 단순한 조치만으로도 사망자 수를 몇백만 명에서 수십만 명 수준으로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팔땅만 끼고 있었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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