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3월 2일 베를린 슈포르트팔라스트 집회에서 히틀러는 "전 세계의 곡창 지대가 될 수 있는 나라에서 수백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고 외쳤다. 단 한 단어,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단어만으로 히틀러는 소련에서의 떼죽음을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호자인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결부시켜버렸다. 히틀러의 평가를 전적으로 거부 또는 수용하는 일은 쉽지 않았는데, 그의 말이 거짓과 진실의 묘한 복합체였기 때문이다. 소련 정치를 잘 모르는 사람들, 즉 대부분의 사람은 기근에 대한 히틀러의 평가를 받아들이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와 뒤섞여 있던, 좌파 정치에 대한 그의 비난까지 받아들이게 되었다.
- P122

그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을 유지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연합을 피해야했다. 오직 공산주의자만 인류 진보를 이끌 자격이 있으며, 억압받는이들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다른 이들은 모두 시기꾼이자 사회주의 파시스트‘였다. 그들은 나치를 포함해 자신보다 오른쪽에 있는 모든 당과 연합할 것으로 여겨졌다. 독일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주적은나치가 아니라 사회민주당이었다.
- P123

하지만 나치 독일의  정치적 난민을 포함한 많은 이는 이를 소련의 승리이자, 소련이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지한다는 증거로 봤다. 프랑스에서 인민 전선은가장 뛰어난 유럽의 지식인조차 소련을 비판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 P132

스탈린의 정치적 재능 중 하나는 외세의 위협을 국내 정책 실패의전적인 원인인 것처럼 제시하고, 자기 자신은 어느 것에도 책임이 없는 듯 행동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정책 실패에 따른 비난을 받지않았고, 자신이 선택한 내부의 적을 외세의 앞잡이로 규정할 수 있었다.  - P137

지도부 숙청과 주요 기관 장악이 끝나자, 스탈린과 히틀러는 모두1937년과 1938년에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숙청을 실시했다. 그러나부농 박멸 작전은 대공포 시대의 전부가 아니었다. 이것은 계급 전쟁으로 간주되거나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소련은 계급으로서의 적을죽이면서, 동시에 민족으로서의 적도 죽이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이 되자,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체제는 인종차별과반유대주의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하지만 국가 내부의 적에 대한사살 작전을 시작한 곳은 스탈린의 소련이었다.
- P161

1933년 기아 시기에 고안된 ‘폴란드 군사 조직은 우크라이나에 존재하는 환상의 조직으로 계속 존재했고, 이후에는 소련 전역에서 진행된 폴란드에 대한 민족 테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변모했다.  - P168

인민 전선 시대에, 소련의 대외적 영향력은 관용적인 이미지가 핵심이었다. 파시즘과 국가사회주의가 부상하던 유럽과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린치가 성행하던 남부인들이 있던 미국에게, 모스크바가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었던 주된 근거는 일체의 차별을 철폐한다문화 국가‘라는 이미지였다. 예를 들어 1936년 제작되어 인기를 끈소련 영화 「서커스의 여주인공은 미국에서 흑인으로 태어나 소련에서 인종차별을 피할 피란처를 찾은 곡예단원이었다.‘
- P171

이 3차 혁명은 사실상 반혁명이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실패를 내포하고 있었다. 15년 남짓 동안 소련은 살아남은 시민들에게 많은 일을 해냈다. 예를 들어 대공포 시대가 징짐에 달했을 때 국가 연금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혁명 원칙의 근간을 이루던 일부 본질적 가정은 폐기되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주장은이제 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계급이 아닌 명목상의 개인적 정체성이나 문화적 연관성 때문에 유죄가 되었다. - P195

나치 독일의 공개적 폭력 행위는 소련에 도움이 되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인민 전선 지지자들은 유럽이 민족 간 폭력 행의에 빠지지 않도록 소련이 보호해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련은 훨씬규모가 큰 민족 학살 작전에 돌입한 상태였다.  - P198

이렇게 블러드랜드의 역사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폴란드의절반을 소련에 내줌으로써, 히틀러는 폴란드 박멸 작전에서 몹시 잔혹하게 자행된 스탈린의 테러가 폴란드 본토에서 재현되게 했다. 스탈린 덕분에 히틀러는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에서 자신의 첫 번째 대량 살상 정책을 실행할 수 있었다.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공동 침공이후 21개월 동안, 독일인과 소련인들은 각각 폴란드의 절반을 지배하면서 비슷한 이유로 비슷한 숫자의 폴란드 민간인들을 죽였다.
두 국가의 살육 담당 기관은 제3의 영토에 집중했다. 스탈린처럼,
히틀러도 자신의 첫 번째 주요 민족 사살 작전의 대상으로 폴란드인을 선택했다.
- P208

폴란드 정복이 마무리되자, 독일과 소련은 서로의 관계를 재확인하려고 또 다른 만남을 가졌다. 바르샤바가 독일의 손에 떨어진 1939년9월 28일, 두 동맹국은 양쪽의 국경 확정과 우정 확인을 골자로 한새로운 조약에 서명했다. 서로의 영향권에 약간씩 변화를 준 그 내용을 살펴보면, 바르샤바는 독일에, 리투아니아는 소련에 속한 땅이 되었다. - P226

폴란드의 모든 것은 그 땅에서 사라지고, "게르만족의 지배"로 대체되어야 했다. 히틀러가 쓴 대로, 독일은 "반드시 이 용납할 수 없는인종적 성분들을 봉쇄해 다시는 그들의 피가 더러워지지 않도록 하거나, 아니면 지체 없이 이를 없애 깨끗한 땅을 그 동지들에게 넘겨줘야 한다. 1938년 10월 초 히틀러는 하인리히 힘러에게 새로운 책무를 맡겼다. 이미 나치 친위대와 독일 경찰의 수장이었던 힘러는 이제
"게르만족의 지배를 확고히 할 제국 정치위원"으로서 인종 문제를 총괄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고, 그가 맡은 임무는 바로 독일에 병합된폴란드 지역의 토착민들을 쓸어버린 뒤 그 자리를 독일인으로 채워넣는 것이었다.
- P233

서유럽에서 이 기간은 명목상의 전시, 이른바 "가짜 전쟁으로 일컬어졌다. 이렇다 할 군사적 움직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프랑스와 영국은 1939년 9월부터 독일과 전쟁 중이었지만 그해 가을과 겨울은 물론이고 이듬해 봄 폴란드가 무릎을 꿇고, 파괴당하고, 독일과소련이 그 땅을 나누어 가질 때까지 그리고 폴란드인 수만 명이 목숨을 잃고 수십만 명이 살던 곳에서 강제로 쫓겨날 때까지도 서부 전선에서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독일과 그의 동맹 소련은 얼마든지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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