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전의 시기에 그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굉장한 사치품이다.
일단 재료 자체가 모두 고가의 사치품들이어서 사실상 미술은 지배층의 기호에 맞춰 그들을 위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기 시작하면 상공업의 발달로 서민층 중에서도 경제적 여유를 가지는 사람이 나타나고 이는 이들 서민층의 문화적 욕구 향상으로 이어지며 이른바 서민문화라는게 등장하기 시작한다.
유럽에서 상공업이 일찍 발달했던 네덜란드에서 정물화가 등장하는 것이나, 일본에서 대량생산이 가능한 우키요에가 양산 되는 것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도 17-18세기에 이르면 서민층의 문화적 욕구 충족을 위한 그림 이른바 민화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예술적 욕구라는 것은 말은 거창하지만 실상은 별거 아니다.
지금 내가 나의 인테리어 욕구와 좋아하는 그림을 매일 보고 싶다는 심리적 욕구로 이미테이션이라도 그림 한점 벽에 걸어두고 싶은 것 그것일 따름이다.
조선시대 사람들도 자식이 결혼하는데 이왕이면 멋진 병풍그림으로 미래를 축복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테고, 다행히 장수한 부모의 회갑연을 좀 더 멋지게 꾸며주며 계속 건강을 기원하고 싶은 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멋진 8폭 병풍을 마련하고 싶지만 사실상 이것도 쉽지는 않아 대부분의 병품 그림들은 마을이나 집안에서 공동으로 돈을 모아 화가를 고용해 그리게 하고 마을 전체가 필요할 때마다 빌려쓰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든 이런 유행으로 인해 민화라는 장르가 탄생하고, 화가들이 많아지고 새로운 예술의 분야가 등장한 것이니 이것만으로도 좋을 일이다.
다만 조선 시대는 화가를 교육하는 기관이 국가기관인 도화서 이외에는 없었고, 실제 도화서에 들어간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였으니 민화를 그리는 화가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화가인 경우가 없었다.
그저 주변에서 그림 좀 그린다 하는 사람 정도랄까?
일본이나 서양처럼 사설 도제 시스템이 발달한 것도 아니어서 민화의 예술적 수준은 사실상 조야하다고 할까?
그나마도 이것이 오랜 시간의 축적을 거치면서 좀 더 나아갔다면 뭔가 획기적인 변환점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기에는 민화의 발달과 축적 기간이 너무 짧기도 했던 듯하다.
그러므로 민화를 만날 때에는 다른 전문 화가의 그림을 보는 방법과는 다른 방법을 취하는 것이 좋다.
민화는 실용적인 그림이다.
백성들은 단순히 아름다움만을 두고 그림을 살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가지지 못했고,
그러니 그림의 목적이 분명해야 하고, 그런 가운데 기왕이면 그림도 잘 그렷으면 좋은, 그러니까 목적과 실용성이 우선시 되는 그림인 것이다.
그러므로 민화를 만날 때는 그림속에 담겨있는 옛 사람들의 마음을 느껴보고, 그 다음에 화가가 나름대로 펼친 발상이나 기교를 찾아보는 것이 좋다.
단순히 예술성만으로 따진다면 살아남을 수 있는 민화가 얼마되지 않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다양한 종류의 민화들을 소재에 따라 분류하고 그림들에 담겨있는 당대 사람들의 생각을 추측하고 따라가는 형식을 취한다.
십장생도나 노송도 괴석도에 담긴 불로장생의 염원, 온갖 꽃그림에 담겨있는 출세와 다산, 복된 삶에 대한 기원, 석류나 과일그림에 담겨있는 다산에 대한 기원, 기러기 원앙에 담겨있는 부부간 금슬에 대한 기원같은 것을 읽는 것이다. (다만 이 책에서는 원앙에 대해서 부부애의 상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실 원앙이 부부애의 상징으로 여겨진 것은 맞다. 하지만 원래 중국에서는 원앙은 자식을 의미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뜻이 달라진 경우다. 솔직히 원앙은 암컷이 새끼를 낳으면 수컷을 그대로 집을 나가 다른 암컷을 찾아가고 암컷혼자 새끼를 기르는 진짜 빌어먹을 새인데 도대체 왜 이놈이 부부의 금슬의 상징이 되었는지 너무 궁금한데 이 책에서는 그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고 그저 관습적으로 원앙의 부부애를 얘기해서 좀 아쉬웠다. 심지어 원앙이 암컷의 각자 날개 한개씩으로만 쌍을 이뤄 난다는 물리학적으로 말도 안되는 얘기도 거르지 않고 서술하고 있어 많이 아쉬움......)
그리고 민화의 분류 중 산수화나 기록화의 경우는 민화의 범주로 넣기에는 좀 애매하지 않나 싶었다.
특히 기록화의 경우는 도화서나 국가기관들의 명으로 인해 그려지는 경우가 많아 소수의 몇몇 작품을 가지고 민화의 범주로 넣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이런 형태의 정리도 사실 쉽지 않은게 민화라는 장르 자체가 메이저 장르가 아니고 연구자도 그렇게 많지 않으며 이것을 제대로 모아서 전시한 곳도 몇몇 지방 개인 박물관에 불과해 얼마나 어려웠을지가 짐작이 된다. 책을 보다 보면 설명은 있는데 도판이 없는 경우가 몇 군데 있어 아마 촬영허가나 수록허가를 받지 못한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도판들이 눈에 익은 것들이었지만 그래도 몇몇 도판들은 또 처음보는데 작가의 마음이 드러나는 것들이 있어 찍어봣다.

까치 호랑이 그림은 많고 여러가지 설도 많은데 이 그림은 특이하게 목잘린 공작과 호랑이 그리고 토끼다.
토끼는 흔희 호랑이의 심부름꾼으로 많이 나오는데 이 그림의 호랑이는 위협적이기는 커녕 길 물어보는 지나가는 불쌍한 호랑이처럼 생겼다. 뛰어가다 뒤를 돌아보는 토끼의 표정도 심드렁해서 작가가 어떤 의도로 이런 모습을 연출했을 지 자못 궁금해진다. 뭐든지 당대의 정치 사회상과 연결하기 좋아하는 나의 병으로 파악한다면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백성들이 보던 관리의 모습이 저 호랑이가 아닐까 뭐 그런 생각도 해본다.

앞의 그림과 다른 권위적이고 젠체하는 호랑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증거를 발견했다. 심지어 호랑이 담배 시중은 토끼가.....
그런데 호랑이가 백수의 왕이라기 보다는 꼭 늙은 탐관오리 같아 보이는건 내 눈에만 그런건가?

호랑이 가죽을 그린 <호피도>이다.
7폭의 병풍을 호피무늬로 채운 구성의 대담함과 과감하게 세부무늬를 생략한 감각이 굉장히 현대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쪽은 순전히 내 취향.
그림도 현대미술을 더 좋아하고 도자기도 백자나 청자보다는 분청사기를 가장 좋아한다. 이유는 분청사기의 대담한 무늬들의 감각이 굉장히 현대적이기 때문.

민화에서는 사슴도 자주 등장하는데 이 그림속 사슴은 구애하는 숫사슴, 너는 내 취향 아니야 하는 암사슴정도 될까?
사슴의 표정이 좋아서 사진으로 담아왔다.

이 서재의 모습을 그림 책가도는 민화 중에서도 명품이고 유명한 그림이다.
어쨌든 책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그림은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서재의 그림을 그리는 심리는 결국 자랑질이다.
내가 이사하고 새로 꾸민 서재를 알라딘 서재에 올려놓고 자랑질 하는 마음과 똑같은....
인간의 이 과시욕은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본성이랄까?

그런가 하면 서재를 장식한 호피도 자랑하고 싶고 서재도 자랑하고 싶은 욕심많은 누군가는 이렇게 호피도를 그리면서 호피를 장막처럼 펼쳐 그 안의 서재를 보여주며 자신의 지적인 면도 과시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속물적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인간이 뭐 별거 있겠는가?
우리 모두 이렇게 조금씩은 다 속물적으로 살아가고 있을테니 말이다.

초충도는 실물에 가깝게 가는 붓으로 섬세하게 그려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그리기 어려운 그림이다.
민화 중에서 이렇게 섬세하게 아름답게 그린 초충도는 처음이었다.
고만고만한 민화들 속에서 이런 명품을 발견하면 눈이 확 뜨인다.
조선 후기의 경제적 성장이 좀 더 지속되고 세도정치의 폐해가 그리 크지 않았다면 화가들의 연결망이 만들어졌을 것이고 그렇다면 민화 역시 기술적 예술적 발전을 한층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워지는 대목이 이런 그림을 발견할 때이다.

이건 재밌어서 촬영한 그림
목숨 수자와 복복자를 여러가지 형태로 만든 문자도
조선시대의 이모티콘이라고 할까?
이 책은 민화에 대해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최적화 되어 있다.
쉽게 민화의 의미와 종류, 그리고 다양한 도판들을 볼 수 있고, 설명이 쉬워 입문자용으로 좋은 책이다.
좀 더 민화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하면 다음 책을 추천한다.
아래 책 중 뒤쪽의 2권 강우방 선생님의 <민화>와 <한권으로 보는 한국의 민화 101장면>은 나도 못본 책인데 공부안하는 사이 또 이렇게 연구서들이 나와 있었다.
한동안 우키요에의 세계에서 헤맸으니 민화의 세계로 들어가볼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