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가 타계한 뒤 지난 열흘 동안 4개의 추모글을 쓰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국내에 데리다 전문가가 드물다보니 저같은 문외한이 이렇게 고생을 하는군요. 오늘 마지막 글을 써보내면서 일단 한숨은 돌렸는데, 급하게 여러 편의 글을 쓰다보니 글이 제대로 된 건지도 모르겠고 중첩되는 내용들도 좀 있고 해서, 후련한 게 아니라 꺼림칙합니다. 한 가지 교훈을 얻은 게 있다면, 짧은 시간 내에 같은 주제로 여러편의 글을 쓰지 말자는 것이라고 할까 ... -_-;;;

그 글들 중에서 비교적 평이하고 분량도 많은 것을 하나 더 올립니다. 지난 번에 가을산님이 데리다 번역본들에 관한 질문을 하셨는데, 마지막 절이 좀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은 조만간 보충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형이상학의 해체에서 타자들에 대한 환대로: 데리다의 철학적 삶


지난 10월 8일 파리에서 췌장암으로 타계한 데리다는 외국에서의 명성에 비한다면 국내에는 거의 알려진 게 없는 철학자다. 실제로 데리다는 그가 타계한 직후 발표된 성명서에서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그는 프랑스가 배출한 동시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고 애도의 뜻을 표했을 만큼 세계적인 명성을 누린 인물이지만, 국내에는 그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始祖)이자 매우 난해한 책들을 쓴 철학자라는 것, 그리고 ‘해체주의’라는 매우 특이한 철학 사조를 창안했으며, 차연(差延, différance)이라는 불가해한 개념을 사용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알려진 바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연일 국내의 신문들이 쏟아내는 추모 기사들, 때로는 상생(相生)의 철학자로, 때로는 ‘반골 철학자’로, 또 때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로’ 그를 치켜세우는 기사들은 오히려 어리둥절하고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그는 누구인가? 그가 누구이길래 지성과 사상에 인색한 국내의 신문들이 이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과연 그들에게 그를 추모할 권리가 있는 것일까?


현전의 형이상학의 해체

 

데리다는 난해한 사상가라는 평판을 받아 왔다. 그리고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나 [기록과 차이]([글쓰기와 차이]라는 얼마간 그릇된 제목으로 번역되곤 하는) 같은 그의 몇몇 작품들은 상당히 난해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의 저작들이 60여개의 언어로 번역되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혀왔다는 사실은 그의 사상과 글쓰기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켜왔음을 입증해준다. 무엇이 사람들을 그처럼 매혹시켰을까?

  이는 무엇보다 그의 철학의 전복적인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초기) 데리다에게 서양의 철학사는 현전(現前)의 형이상학의 역사다. 생생한 현재 속에서 사태의 의미가 충만하게 의식에 드러날 때, 또는 적어도 그 가능성이 원칙적으로 전제될 때, 비로소 진리로서의 로고스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 또는 로고스를 다른 사람들과 온전하게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매체, 곧 음성이야말로 참다운 매체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현전의 형이상학의 원리를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반박하는 대신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그것은 자신의 타자, 자신의 근원적 한계를 전제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데, 이 타자는 바로 에크리튀르(écriture), 곧 기록이다. 실제로 서양 형이상학은 플라톤에서 루소, 소쉬르에서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생생한 현재, 주체들끼리 주고받는 음성적 대화를 특권화하면서 기록을 하찮은 것으로 매도해왔지만, 데리다에 따르면 기록이야말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 기술적 토대다.    

  왜 기록이 그처럼 중요할까? 왜 이 주장이 그처럼 전복적이고 혁신적이었을까?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기원이나 로고스가 기원이나 로고스로서 존재할 수 있으려면, 그것들은 반복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원이나 로고스가 일회적(一回的)인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기록이다. 기록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보존할 수도 반복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기원도 로고스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기록에 의해 비로소 기원이나 로고스가 가능하다면, 현전의 형이상학의 주장과는 달리 기원보다 앞서는 것, 로고스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기록이 된다. 기원, 로고스의 이면에는 카오스의 검은 구멍만이 존재하며, 이 카오스와 로고스의 경계를 세우는 것이 기록인 셈이다.  


유령론: 타자들에 대한 환대로서의 정의

 

그러나 이렇게 해서 기원과 로고스가 현전의 형이상학 내에서, 서양의 문명 내에서 그것들이 지니던 지위를 상실하게 되면, 결국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데리다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그의 해체 작업에 의해 현전의 형이상학, 더 나아가 기존의 서양 문명의 질서가 위협받고 있다는, 삶의 질서가 와해될지 모른다는 사람들의 두려움이 깔려 있다.    

  하지만 데리다의 진의는 여기에 있지 않다. 그는 우리가 현전의 형이상학처럼 기원과 로고스를 근원적인 진리로 가정하게 되면, 더 이상 역사도, 정의도 존재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모든 것이 기원, 로고스에 담겨 있는 이상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거나 발명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며, 서양 문명의 원리, 로고스의 명령에 충실한 것을 정의로 간주하는 이상, 서양의 문명과 다른 타자들에 자신을 개방하고 그들을 존중하는 일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리다가 90년대 이후 [마르크스의 유령들] 같은 저작에서 유령론에 입각하여 자신의 윤리ㆍ정치사상을 전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고 현존하는 것도 부재하는 것도 아닌 유령들이라는 형상은 기원의 부재라는 해체의 원리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에게,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는 이들에게 불의를 바로 잡고 정의를 실행할 것을 명령하는 타자들의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이주노동자들, 인종차별과 종교적 박해의 피해자들, 사형수들 및 그 외 많은 “약자들”에서 이러한 유령들의 구체적인 현실태를 발견하며, 이러한 타자들의 부름, 정의에 대한 호소에 응답하고 환대하는 일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윤리적ㆍ정치적 책임이라고 역설한다. 따라서 데리다가 90년대 이후 사회적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개입한 것은 그의 철학사상의 전개과정과 매우 합치하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형이상학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원리가 해체된 이후 중요한 것은 우리와 다른 타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 어떻게 타자들을 절대적으로 환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를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

 

그렇다면 데리다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로 간주하거나 생뚱맞게 상생의 철학자로 치켜세우는 일은 그의 철학이나 실천과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가 이처럼 엉뚱한 오해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저작들 중 제대로 번역된 책들이 매우 드물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80여권에 이르는 그의 저서들 중 10 종 이상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번역본들은 (심지어 프랑스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비전문가들에 의해 번역되어, 데리다 특유의 현란한 언어유희나 섬세한 논의를 전달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삶이란 저작들의 삶과 다르지 않은데, 우리에게 데리다는 처음부터 생명을 박탈당한 유령, 환영이었던 셈이다.

  빼어났지만 그만큼 치열했던 삶을 마감함으로써 데리다는 실제로 유령, 망령이 되어 그의 저작들, 그의 기록들 안에서만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그에게서 허망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원을 쫒는 대신, 데리다가 그랬듯이, 우리도 그의 기록들 안에 깃들어 있는 타자의 부름에 귀기울일 때가 되지 않았을까?

 

 데리다의 작품들

 

 데리다는 80여권의 저서 및 아직 책으로 묶이지 않은 수백편의 논문들 및 인터뷰 등을 남겼을 만큼 다작(多作)의 철학자다. 국내에 번역된 책도『입장들』(솔, 1991)『마르크스의 유령들』(한빛, 1996),『다른 곶』(동문선, 1995),『에코그라피』(민음사, 2002)『시네 퐁주』(민음사, 1998),『불량배들』(휴머니스트, 2003),『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동문선, 2004),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테러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4) 등 10여종이 훨씬 넘고, 그에 관한 해설서도 여러 권 나와 있다.

  하지만 데리다의 책들은 번역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가 비전공자들이 마구잡이로 번역하곤 해서 대부분의 데리다 저서들이 심각한 오역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 중에서 번역도 괜찮고 읽을 만한 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는 상당히 난해한 데다가 번역에도 약간 문제가 있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긴 하지만, 데리다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책들 중 하나로 꼽을 만한 작품이다. 『입장들』은 초기 데리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좋은 책이며, 『에코그라피』는 90년대 이후 데리다의 작업을 개관하기에 적합한 책이다. 그리고 『다른 곶』『법의 힘』『테러 시대의 철학』은 유럽 공동체, 법과 정의, 테러와 민주주의, 주권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배경으로 데리다의 정치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책들이다. 

  데리다 해설서 중에서는 다음과 같은 책들을 권하고 싶다. 크리스토퍼 노리스의 『데리다』(시공사, 1999)는 데리다 사상 전반을 균형있게 소개하고 있는 개론서이며, 에른스트 벨러의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책세상, 2003)는 니체, 하이데거 철학과 데리다의 철학을 비교하면서 데리다 철학의 특징을 간명하게 잘 제시해주고 있다. 국내 연구자들의 작업 중에서는 김상환 교수의 『해체론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1996) 및 이성원 엮음, 『데리다 읽기』(문학과 지성사, 1997)을 추천할 만하다. 좀더 쉬운 입문서를 원하는 독자들은 제프 콜린스의 『데리다』(김영사, 2003)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릴케 현상 2004-10-21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상환 교수의 『해체론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1996)는 읽었어요~하하하(우쭐, 해도 되는 건가?)
혹시『시네 퐁주』(민음사, 1998)는 번역에 문제가 많나요?(문제가 많으면 좋겠다-_-) 제가 퐁주를 좋아해서 예전에 읽어보려고 시도했다가 장렬히 전사한 적이 있어서...

에레혼 2004-10-21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데리다를 추모할 권리는 하나도 없지만...ㅠㅠ
그래도 데리다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오래 전부터 그의 저명한 이름만 알고 정작 그를 만나지 못했던 아쉬움과 추모의 마음을 가졌었지요

이 글, 찬찬이 읽고 님이 추천한 입문서부터 하나씩 접근해 보고 싶습니다
제 방에 가져가서 천천히 읽어 봐도 될까요?

balmas님, 첫인사를 이렇게 드리네요

2004-10-21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을산 2004-10-21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퍼가기 미안해서....

3910033

어느새 1만이 넘으셨네요.


biosculp 2004-10-21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인데요. 철학을 전공한분인 강유원님의 사이트에서 이런글을 쓰셨더군요.

언젠가 데리다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쓴 학생이 있었다.
초록 발표회가 끝나고 선생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데리다를 학적 연구의 주제로 삼을 수 있을까. 요즘
프랑스에서 나온 것들은 일견 에쎄이 수준 아닌가."

"프랑스가 수필의 전통이 깊지 않습니까"

"하긴 빠스칼부터..."

"에쎄이"를 연구해서 논문을 쓰는 이들을 보면
꽤 오래 전의 이 대화가 떠오르곤 한다.

이 분은 헤겔로 학위하셨던데 독일과 프랑스의 학풍이 다른것인지. 독일철학자들을 전공하신분들은 요즘 프랑스철학자들에게 사시눈을 뜨는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balmas 2004-10-21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biosculp님, 제가 그런 말에 대해 굳이 논평을 해야합니까?^^
'철학 동네'에 있다 보면 그 정도 이야기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데,
대개 술자리에서 안주삼아 하는 이야기들이니 거기에 정색 하고 나서서
뭐라고 대꾸한다는 게 그렇죠.
더욱이 제가 직접 듣거나 본 이야기도 아니고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다가
강유원 씨는 이름은 여러번 들어봤지만 글은 별로 읽어보지 못해서
가타부타 함부로 말하기가 무엇하군요.
말씀하는 걸 보니 강유원 씨는 헤겔로 박사논문을 쓰고
아마 프랑스 철학사까지 꿰뚫고 계신 분 같은데,
직접 가셔서 궁금한 점을 여쭤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balmas 2004-10-2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주인에게만 말씀하신 분께는, 좋은 점을 지적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데리다에게 관한 제 (독자적인) 견해를 물으셨는데, 아직 데리다에 관해 이렇다 할 만한
견해를 밝힐 수 있을 만큼 데리다를 잘 알고 있는 처지도 아닌 데다가,
데리다는 일단 좀더 정확히 소개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해서, 그나마 갖고 있는
약간의 견해도 아껴두고 있는 형편이랍니다.
우선 읽을 만한 주요 저서들이 네댓 권은 되어야 데리다에 관해 이렇다저렇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지금으로서는 그런 생각입니다.
어쨌든 님 덕분에, 앞으로 데리다에 대한 제 견해를 세워봐야겠다는 자극을 받았네요.^^
앞으로도 좋은 말씀 좀 많이 해주세요.

balmas 2004-10-21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자명한 산책님과 라일락와인님, 가을산님께 답글다는 걸 잊어버렸군요.
자명한 산책님, 저도 [시네 퐁주] 번역본은 조금 읽어보다가 말았는데, 번역이 별로
좋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더군요. 이 책 자체가 언어유희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서
워낙 이해하기가 까다로운 책입니다. 좀 위안이 되셨나요?^^
라일락와인님은 처음 뵙는군요.
퍼가신다면 저야 고마울 따름이죠, 뭐.^^
앞으로 종종 뵙기를 ...
가을산님, 글쎄 어느덧 조회수가 10000회를 넘어버렸네요. 1만회에서 이벤트를 하나 할까
했는데, 요즘 경황이 없다 보니, 좀 미뤄야 될 것 같네요.
어쨌든 캡처도 해주시고 고맙습니다.^^

2004-10-22 0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나나 2004-10-22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은 글이었지만 내공이 느껴지는 좋은 글입니다. balmas님께서 나중에 꼭 좋은 데리다 연구서를 하나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강유원 선생님이라는 분의 이야기는 그분의 뛰어난 학식은 이미 들어 잘 알고 있지만 그래서 더욱 더 황당하네요. 그분과 대화를 직접 나누어 보지 않아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balmas님의 데리다 해설은 초기 저작 부터 후기의 윤리 정치적 저작까지 다 포괄적으로 그 핵심을 설명해주고 있어 앞으로의 balmas님의 작업에 큰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좋은 번역 글 부탁드립니다.

2004-10-22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4-10-22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어계신 분이 또 한 분 오셨군요.^^
[글쓰기와 차이](동문선)은 [불량배들]보다는 낫지만 같은 동문선에서 얼마 전에 나온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보다는 못한 수준입니다. 답답하겠지만 원서나 영역본 같은 책을 놓고 같이 읽는다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목소리와 현상]은, 한 달여 전에 [단상들]에서 한번 말한 적이 있지만, 프랑스에 유학중인 제 후배가 지금 번역하고 있습니다. 초판 번역은 다 끝나서 지금 교열을 보고 있는 중이니까 내년 중에는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Deconstruction in a Nutshell]은 읽기 쉽게 써놓은 책이지만, 논변이 좀 단순하고 느슨한 편이죠. 그러니 이런 책을 굳이 번역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야 우리도 충분히 쓸 수 있을 텐데 말이죠.
데리다에 관한 해설서를 번역한다면, 그 책보다 훨씬 좋은 책들이 더 많으니까 그런 것들을 번역해야죠. 제 생각에는 Geoffrey Bennington과 Derrida가 공저한 [Jacques Derrida]야말로, 이런 류의 책들 가운데는 가장 먼저 번역되어야 할 책이 아닌가 합니다. 어쨌든 데리다 해설서는 당분간은 지금 나온 몇 권의 책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보다는 데리다의 대표적인 저작들이 먼저 번역되(고 개정되어)야 할 듯합니다.

나나나님은 처음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가쉐 교수에게 배우고 계신다구요? 가쉐 교수에게는 모든 데리다 연구자들이 큰 빚을 지고 있죠. 언젠가 사진으로 봤더니, 백발의 수염이 덥수룩한 게 도인같은 풍모를 풍겨서 좀 놀란 적이 있습니다. 가쉐 교수처럼 세련된 글을 쓰는 양반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 줄이야 ...^^
격려의 말씀은, 앞으로 번역을 좀더 잘하라는 채찍질로 알겠습니다. 아야!
ㅋㅋ

딸기 2004-10-24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이 글 허락도 없이 제가 운영하는 홈페이지(http://www.ttalgi21.com)에 퍼갔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데리다의 ㄷ의 한 획도 모르는 제가 '테러시대의 철학'을 서평이랍시고 써서 발마스님께 보인 걸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자판을 두드리는 저의 손을 덜덜거리게 만드는군요.

balmas 2004-10-24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허, 허락도 안받고 옮기시면 안되는데 ...

딸기 2004-10-24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안 되는 거였나요?
그럼... 원고료를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엔화 결제도 가능합니까? 아니면... 여기 카드...
...크리스마스 때 카드 보내드릴께요...

허락없이 퍼가놓고 농담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퍼가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얘기해주세요. 지울께요.

balmas 2004-10-24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아, 퍼가시면 저야 감사할 따름이죠.^^
그렇지만, 굳이 원고료를 주시겠다면 사양하진 않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