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은 옷가지나 일용의 자질구레한 물건을 담아두기 위해 나무로 만든 궤짝(상자)을 뜻한다. 농이 옷 간수를 주목적으로 하여 방 한켠에 좌정시킨 치장용 가구인 데 비해 함은 특정한 물건을 간직하기 위해 여러 형태로 꾸민 애완물의 성격을 띠고 있다.

가장 많이 쓰는 혼인 예장함(禮狀函)은 혼서, 채단을 넣기 편리하게끔 직사각의 형태를 지닌 편이다. 이밖에 노리개나 보석 따위를 넣어두는 함은 아주 작고 가벼워도 무난하다. 관복함은 함 바닥에 관복을 개켜 넣고 뚜껑 쪽으로 사모를 넣기 좋도록 가운데가 불룩 솟아나게 했으며, 딴머리함은 8각으로 각을 지게, 또 족두리함 같은 것은 6각으로 높다랗게 만들어 아래쪽으로 서랍을 만들어 넣기도 했다.

함은 귀중품을 보관하는 상자의 일종으로 내실용은 대부분 칠을 하거나 자개로 만든다. 이 함은 길체가 긴것이 특징이다.

함은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어왔으나 오늘날에 이르면서 그 활용도는 주로 예장함만으로 좁혀든 것 같다. 시대와 풍속의 변천에 따라 여타의 내용물은 사라져갔으므로 지금은 오로지 <납폐>의 용구로만 남게 되었다.

납폐는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시대의 엄격한 혼인절차의 한 단계를 의미하는 말이다. 육례의 그 여섯가지 예의절차는 이런 것이었다.

1. 납채(納采) :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혼인을 구하는 의례, 흔히 매파라 불리는 중매쟁이를 통해 서찰을 보내면 신부집에선 허혼례의 답장을 보냈다.

2. 문명(問名) : 양가의 뜻이 동했다 하더라도 궁합이 안 맞아 틀어질 수도 있으므로 신랑집에서 신부될 처녀의 생년월일을 묻는 절차.

3. 납길(納吉) : 문명후에 좋다는 조짐을 얻으면 이를 신부집에 알려주는 일.

4. 납폐(納幣) : 정혼(定婚)의 징표로서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채단과 혼서의 예물을 보냄. 이 예물을 담은 상자를 예장함이라 한다.

5. 청기(請期) : 신랑집에서 혼인 날짜를 정하여 신부집에 지장의 유무를 묻게 된다. 신부집에서 날을 정한 연길(涓吉)답장을 보내게 마련이다.

6. 친영(親迎) :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신부를 직접 맞아들임. 또는 그 의식을 말하니 즉 혼례식에 다름아니다.

혼례용 기러기와 지함

예장함에는 대개 혼서와 함께 채단으로는 신부의 치마저고리 한 벌감으로 푸른색과 붉은색의 비단을 넣는 게 관례였다. 또 처녀를 곱게 길러낸 신부댁의 노고에 미진함이 있었던지 인정의 표시로 예물의 물목을 적은 내역서가 넣어지기도 했다.

<재물이 곁들여진 혼인은 오랑캐들이나 하는 풍습>이라 타기했으므로 혼수가 열 가지 안넘게 조신한 미풍양속을 지켜왔다.

혼서(혹은禮狀)는 대개 가로 50센티미터, 세로 36센티미터 정도의 한지에다 집안의 어른 되는 혼주가 격식에 따라 정중하게 신부를 맞아들이는 인사치레의 글귀를 적은 서찰이다.

이런 물품을 담은 예장함은 대개 <함진아비>라 불리는 머슴이나 이웃 상인(常人)을 빌어 혼인 전날 밤에 신부집으로 보내졌다.

그러므로 함은 한국인에게 편의로서의 <상자>이상의 가치를 표상한다. 물론 질 좋은 나무로 여덟 군데 모서리가 반듯한 궤, 칠이 잘 되고 장식이 반듯한 엄격하고 딱딱한 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격조를 지닌다. 규격제품인 가방의 무성의한 속(俗)티도 없고, 또 물질만능, 편리한 운반용구와 같은 물신의 이미지가 깃들지 않는다.

함의 외양처럼 그렇게 격식을 갖추고 정성을 주고받았던 한국인의 마음이 더욱 돋보인다. 보자기면 어떻고 골풀상자면 어땠으랴만 그래도 사람의 인연과 운명을 담아 보내는 그릇으로 이만쯤의 외화(外華)는 결코 경제의 잣대로 가늠되어선 안 될 일이다. 아취 넘치는 예장함이 남아 있는 한 우리겨레가 오랑캐도 <상것>도 아닌 본데 있음을 자긍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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