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녀

그날 옷섶에서
가만히 내어주신 선물
싸고 싸고 또 싸서
보드러이 감추어 두셨던
옥비녀!

파릇 산 듯 눈부신 그 빛
졸음낀 눈이 총명스레 밝아집니다.
말없는 이 비녀
어느 날 내 머리에 꽃으리까?

-모윤숙의 시 '옥비녀'에서

비녀

여자들의 머리에 쪽을 고정시키는 물건이다.
왼쪽그림 : 옥잠, 칠보죽잠, 석류잠, 산호잠 / 오른쪽 그림 : 봉잠, 은죽잠

비녀는 한국의 옛여인들에게는 가장 소중한 애장품의 하나였다. 부인의 땋은머리를 쪽찌어 풀어지지 않도록 쪽에 가로질러 꽂는 장신구로 쓰임이 주용도이나, 장식성도 겸했으므로 여인의 생활반경에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필수적인 악세서리였다.

재료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은 금, 은, 백동, 놋, 진주, 비취, 산호와 같은 귀중품에서 나무, 죽, 뿔, 뼈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러므로 전자와 같은 재료의 비녀는 마치 반지, 목걸이, 귀걸이, 노리개 등과 같은 비중의 재화적 가치를 지녔음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사사로이 쓸 돈이 흡족치 못했던 여인네들이 급전이 필요한 때에 이것이 한몫을 해냈을 것임은 쉽게 추측이 간다.

비녀가 패물로서의 가치를 지닐수록 자연스레 남녀간 애정의 표시로 자주 이용되었을 법하다. 전시(前示)한 시에서 보듯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주는 선물로 옥비녀를 선택했던 것은 하나의 관습이었다. 오랜 출타에서 돌아온 지아비가 조강지처 지어미에게 또는 사내가 몰래 정분을 나눈 여인에게 정표로 준 것도 이것이었다.

비녀는 또 옛 여인들이 향유했던 몇가지 안 되는 화장구 중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규방의 장지문 앞에서 면경을 든 부인을 상상해보라. 오늘날과 같이 피부 다듬기의 기초화장이나 특정 부분을 강조하는 부분화장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있어서는 깨끗한 세수와 정갈한 머리손질이 화장의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다.

빗치개

빗치개는 원래 빗살 틈의 때를 빼는 도구이지만, 가리마를 타거나 밀기름을 바르는 데도 쓰였다. 빗치개는 뒤꽂이로도 사용되었다.

비녀의 생김새는 대개 한쪽이 일(一)자형으로 밋밋하고, 반대편은 뭉툭지게 하여 쪽머리에서 빠지지 않도록 배려했다. 흔히 이 꼭지 쪽에 여러모양의 장식을 꾸몄는데 장식이 많은 비녀를 <꾸민잠>, 별로 모양을 내지 않은 걸 <민비녀>라 부른다. 서민 부녀자는 민비녀를 썼고, 중류층 이상의 계층에선 꾸민잠을 상용했는바, 비녀를 종류별로 나눌 때는 이 꾸밈의 형태에 따라 분류되기도 한다.

비교적 정형화된 몇가지 모양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봉잠(鳳簪) : 봉황의 모습을 새긴 비녀. 2. 용잠(龍簪) : 용 머리의 형상을 새긴 비녀. 3. 화월잠(花月簪) : 꽃과 달의 모양을 꾸며 새긴 비녀. 4. 매죽잠(梅竹簪) : 매화나 대의 잎 모양으로 새긴 비녀. 5. 국잠(菊簪) : 국화잎 모양을 새긴 비녀. 6. 석류잠(石榴簪) : 비녀 꼭지에 금이나 은으로 석류 꽃송이를 새긴 비녀. 7. 각잠(刻簪) : 비녀 몸체를 모지게 만든 비녀.

이밖에도 호도잠, 서북잠, 흑각잠 등이 있으나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쓰였던 것은 형태가 가장 단순한 오두잠이란 비녀였다.

누군가는 비녀야말로 부녀자에게 있어서 정조의 자물쇠요 그 빗장이라고 갈파했다. 비녀가 안온하게 자리잡아 있을 양이면 행실이 한치 흐트러질 턱이 없고 동시에 정절에 흠이 갔을 리 없다는 뜻이겠다. 또 비녀 꽂은 자리가 어지럽다면 문빗장이 열렸음의 증좌이려니 그로써 난행을 짐작해볼 수도 있잖겠는가?

옛 속담에 <행사 후에 비녀 빼어갈 놈>이란 말도 우연히 생긴 게 아니겠다. 짐짓 불량스럽고 의리, 인정 없는 사내를 일컫는 속담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그 근저에는 역시 정절과 비녀가 동의선상에 놓여졌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우리 한국인에게 있어서 비녀는 어디까지나 단정한 품행, 고아한 정실의 상징이다. 그리고 은비녀, 옥비녀도 울긋불긋한 중국 비단옷의 장식물로선 어울리지 않고 흰 명주 또는 모시 치마 저고리 위에 받쳐졌을 때에야 제 격조를 지닌다. 명징한 아미로부터 가리마를 넘어서 쪽찐 비녀로 감도는 능선에서 우리 옛 여인들의 절제된 미, 서슬 푸르기까지 한 아름다움을 가늠할 수 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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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3-28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문화를 찾아서.
님의 유익하고 재미있고 은은한 향내마저 감도는 글,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저녁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