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머리

가우듯이 고개를 뒤으로 제끼고 빗는 여인의 이마에 흐르는 물소리가 소북한 등성이를 이룩하며 삼월에 온다. 온전히 이 한때를 귀 기울이고 겸허히 빗을 잡는 손이 이따금 가벼운 원을 그리며 거기 무늬로 퍼지는 곳에 여인의 모은 눈은 무엇을 새기는가. --- 박양균의 시 '머리를 빗는다'에서

쪽진 머리

사람의 신체 중에서 그 일부를 자유자재로 꾸미고 변화를 줄 수 있는 곳이 머리카락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시대에 따라 혹은 제도에 따라 여인의 여러 가지 발제(髮制)가 있어서 근세조선기만 해도 어여머리, 새앙머리, 얹은머리, 트레머리, 땋은머리, 쪽찐머리가 계층별로 유행되어왔다. 그 중에서도 미혼일 때는 머리를 길게 길러 양쪽 귀밑머리를 땋고 다시 한 묶음으로 기다랗게 땋아 댕기를 맨 땋은머리였다가 혼인을 하게 되면 머리를 쪽찐다.

남자가 더벅머리로 땋았다가 혼례를 올리면 상투를 틀어올리는 관습과 일치한다. 여인들은 이때 귀밑머리를 풀어 길게 빗질해서는 뒷목께에서 틀어올려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았다. 이로써 시체말로 여인의 정절을 허물어 뜨릴 때 <귀밑머리를 풀어준다>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앞에 인용한 시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여인의 머리를 빗는 모습은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다.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동백기름을 발라서 참빗으로 곱게 빗은 머리는 이 땅의 여인네들의 단아함, 매서울 만큼 정돈된 멋, 한치 흐트러짐이 없는 모든 금도(襟度)를 표상한다. 더구나 모시옷에는 옥비녀, 비단옷엔 칠보 매죽잠이라도 꽂았을 양이면 화사함이 더하고, 덧붙여 귀이개, 빗치개 따위 뒤꽂이로 매무새를 지으면 야무져 보이기가 이를데 없다.

우리의 고유 머리 모양은 원래 <얹은머리>가 많았던가보다. 머리를 땋아서 앞머리에까지 둥글게 둘러얹은 것인데, 이후 <다리>를 활용하게 되어서 머리타래가 점점 커지고 높아지기에 이르렀다. <다리>는 숱이 적은 여자들이 머리카락에 덧들이는, 꼭지를 맨 딴머리를 말한다. 단원 김홍도나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를 보면 여염집 부녀자들이 거창하게 머리를 땋아올린 모습들을 볼 수가 있다.

이처럼 불편을 무릅쓴 사치가 극심해지자 영조 연간에 이르러 왕명으로 쪽머리로 통일할 것을 포고하여 시행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풍습이란 건 제도만으로 뿌리째 뽑히지는 않는 법이다. 머리 치장에 맛을 들인 여인들은 이후에도 가발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시집을 갈때는 의류나 장롱과 곁들여서 <다리>도 동백기름으로 잘 손질하여 소중하게 간직해 갔던 사정으로도 짐작될만한 일이다.

쪽머리에서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장신구에 족두리가 있다. 부인네들이 의식용으로 쓰던 일종의 관이랄 수 있겠다. 대개 까만 비단으로 만들었는데 아래는 둥글고 위쪽은 여섯 모가 진 데다 옥구슬, 색색의 보석, 수실을 달아 화려하게 꾸몄다. 나라에서 <다리>를 금하고 쪽머리를 하도록 강제했을 때, 검소한 생활을 위해 검은 족두리를 쓸 것을 장려한 뒤로 항간에서 일반화되기도 했었다.그런데 이 또한 호사가 극해지자 말썽이 일기도 해서 차츰 퇴조하여 예복을 갖출 때에만 쓰다가 드디어는 전통혼례때 신부가 착용하는 것으로 정착되고 말았다.

족두리는 장식이 없이 까만 천으로만 된 것을 민족두리, 옥판을 밑에 받치고 산호, 창강석, 밀화(蜜花), 진주구슬을 꿰어 치렁치렁 매단 것을 꾸민족두리라 한다. 사방에 금박을 박고 여러 가지의 패물로 꽃장식한 것을 칠보족두리라 부르기도 해서, 칠보단장을 한 젊은 여인의 고운 얼굴을 두고 <칠보홍안>이란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얹은 머리(왼쪽) / 땋은 머리(오른쪽)

안방 장판이 거울같이 반지르르한 가운데 좌경(座鏡)을 앞에 두고 머리손질을 하던 여인의 모습은 이 나라에서만 볼 수 있었던 표정이었다. 까만 머리카락을 올올이 수건으로 비벼 말리고, 가리마 꼬챙이로 머리카락을 이마로부터 정수리까지 양쪽으로 갈라 붙여 가리마가 선명하게 지도록 한 다음, 참빗으로 거푸거푸 빗질을 한다. 서캐가 있으면 말끔히 털어내어 비로소 칠칠한 윤기가 감돈다. 머리타래를 칭칭 감아 목 위로 바짝 조여서 쪽찐 후 비녀를 살풋 꽂으면 화장치레는 끝난다.

하얀저고리 동정 위에 목덜미는 그대로 백옥이요 상아 빛깔이다. 이제 곧 어룬님이 찾아드실 터이다. 옥양목버선을 신어야지, 단정하게 빗어넘긴 쪽머리가 여닫이창에 비쳐서 금방에 또하나 달덩이가 비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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