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 두루마기

남자들의 웃옷은 저고리, 조끼, 마고자가 주종을 이룬다. 저고리는 모든 한복이 다 그렇듯 여름에는 통기가 잘 되고 겨울에는 보온이 되는걸 기본으로 한다. 계절에 따라 옷감을 달리해서 춘추용으로는 항라, 삼팔, 노방, 부사견, 옥양목을, 여름용으로는 모시, 항라, 생삼팔, 춘사, 안동포, 초포 등을, 겨울용은 방초, 명주, 옥양목이 주재료가 된다.

남아 광목 솜 바지 저고리

저고리는 상체를 감싸는 천에다 동정과 고름을 장식한 옷이다. 더운 철에는 홑감이지만 추운 때에는 솜을 받쳐서 지었으므로 한결 푸근하고 넉넉했다. 조끼는 남자들의 한복 차림에서 악세서리적 구실을 해주는 데 불과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실은 호주머니가 여럿 달려 있음으로 인해 소지품을 보관하는데 기여한다. 물론 저고리 앞섶이 헤어져서 헛헛할 우려가 있기에 단추가 많이 달린 조끼를 착용함으로써 단정을 기하는 이점도 간과할 수 없는 점이긴 하다.

조끼 위에 덧껴입는 마고자는 단순한 남성 복장에 호사함을 더해주고 추위를 막는 방한의 효과가 있다. 물색 고운 옷감에다 금이나 옥으로 된 큰 단추를 달아 한껏 멋을 낼 수 있었으므로 예전부터 널리 일반에 보급되어왔고 특히 노인들에겐 평상복으로 애용되었다. 바지는 온돌방 구조에서 앉아 생활하는 데에 썩 안성맞춤인 의복이다.

한복의 바지는 입기에 풍성하고 통이 넓은 게 특징이다. 풍덩하게 넓은 허리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접어 여미고 그 위에 허리띠로 동여맸으며, 가랑이 아랫도리도 역시 통을 접어붙여서 대님으로 졸라 매었다.

바지는 그지없이 편하다. 여름날에 서민들은 쇠코잠방이라는 통 좁은 바지를 입기도 했으나 겨울철에는 솜을 두어 지은 핫바지를 입는데, 좀 비속한 비유어이긴 하지만 너무나 쉽고 편한 것을 가리켜 <핫바지에 똥싸기>란 말이 생겨난 것만 보아도 알 일이다.

한복은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 나라의 기후, 풍토, 습관과 또 이 터전에서 살아온 선조들에 의해 가다듬어져왔기 때문에 미관상으로나 위생적인 측면에서 가장 아름답고 안정감을 갖게 되며 품위가 돋보임도 사실이다.

그런 한편, 남자의 바지저고리가 이처럼 입성이 푸근하고 편안하여 한국인의 성정이 누긋하고 게으르며 무사안일에 빠지도록 한 것은 아닐까. 그것이 원만하고 평화롭게 하는 점은 취할만하겠으나 도무지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게 흠이다.

옷고름을 조붓이 매고 허리끈과 대님으로 조인 풍채는 절도를 표방하는 한편, 쉬 풀어져내려 옷차림이 산만해지기 쉬운 것은 낭만과 무절제의 악덕을 체질화하게 했음직하다.

우리의 남성 복장에서 체모를 살려주고 훤칠한 미감을 발휘케 하는 것은 바지저고리 위에 덧입은 두루마기일 것이다. 조선조까지만 해도 원래 남자의 겉옷은 다양하여 도포, 창의, 중치막, 중의 등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전술한 바대로 갑신년 개혁때 장식이 단순하고 간편한 두루마기 하나로 통일되기에 이르렀다.

흑색 삼베로 만든 두루마기

흑색 삼배로 만든 두루마기이다. 형태는 두루마기와 같고 소매가 넓은 것이 특색이다. 홑으로 되어 있어서 등바대가 붙어있다.

어쩌면 두루마기는 우리가 한민족임을 지키고 그 긍지를 누리는 상징물일 수도 있다. 가슴에 끈을 동여맨 도포는 양반의 위엄과 권세의 한 표상일 것이나 두루마기는 서양문물에 대한 우리 전통의 보루, 일제 문화에 대항한 우리 자존의 방패였다. 일제 36년간에는 양복이 널리 보급되었으나 일제를 배격하는 반항정신과 민족정신의 현양으로써 우리 국민이 두루마기를 외출복으로 착용했던 점은 음미에 충분히 값한다

한복이 남아있는 한 우리 민족은 푸근한 인심, 여유로운 행동거지, 그리고 마음의 안락과 평화를 그려낼 수가 있었다. 바지저고리와 두루마기가 사라진 다음 사람들은 더욱 현실적 이익 추구에 급급해지며 영악스러워졌다. 옷이 풍속의 반영임과 동시에 옷에 따라 인심도 반응한다. 각박한 세태를 살면서 어찌 저 정관적(靜觀的)인 한복의 형태, 누긋한 입성, 바느질과 푸새, 다림질로 차림새에 정성을 쏟았던 세월에 향수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