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듬이질

깊은 밤의 정적을 깨며 또닥또닥 이어지는 소리, 혹은 희미한 등잔불에 비쳐 마주앉아 다듬이질하는 두 여인의 그림자가 창호지 문살에 실루엣을 그리는 정경은 누구나의 추억에도 물무늬로 남아있다. <추야장 긴긴 밤에 기러기 울어 예는데, 은은한 다듬이소리는 그 무슨 정인고>의 정서야말로 한국인의 생활이 그려내는 멋이다.

다듬이질 하는 여인

생활체제나 가옥구조가 극도로 인력과 노동을 요구했던 시대에 한국의 여인네들은 하루 낮 동안 내내 집안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절구에다 보리를 빻고, 부엌에 들어가 쌀을 안치고 반찬을 장만한다. 상을 들여보내고 설거지하는 것도 몫, 집안을 대강 청소한 후 산더미같은 빨랫감을 이고 개울로 나간다. 그외에도 길쌈이며 밭일로 해가 짧다. 저녁이 이슥해져 몸이 푸솜같이 되었을 때 다듬잇돌을 건넌방으로 들여놓고 고부간에, 동서간에, 시누올케간에 마주앉아 다듬잇방망이를 두드린다.

한국의 대다수 서민 여인네들은 이런 소태나는 삶을 살아왔다. 목구멍에선 화근내가 받치고 굵은 땀방울이 목덜미를 적셔도 불평을 몰랐다. 그래도 마음속에 한가닥 앙금이 남아 있었다면 무명이나 삼베를 두드리면서 요샛말로 스트레스가 해소되기도 했겠다. 하지만 고운 모시나 명주를 다듬이질할 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칫 졸아서 헛치기라도 할라치면 구멍이 송송 뚫려 못 쓰게 만들기도 할테니까.

똑같은 다듬이질도 형편 따라 경우 따라 다름을 다음의 시가 설명해준다.

이웃집 다듬이소리/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잦아가네/ 무던히 졸리기도 하련만/ 닭이 울어도 그대로 그치지 않네

의좋은 동서끼리/ 오는 날의 집안일을 재미있게 이야기하며/ 남편들의 겨울옷 정성껏 짓는다면/ 몸이 가쁜들 오죽이나 마음이 기쁘랴마는/ 혹시나 어려운 살림살이/ 저 입은 옷은 헤어졌거나 헐벗거나/ 하기싫은 품팔이, 남의 비단옷을/ 밤새껏 다듬지나 아니 하는가

_____양주동의 '다듬이 소리'에서

가난한 집에선 남의 빨래를 해주고 옷을 지어주는 품팔이가 일반화되었던 시대의 통증을 환기시키는 시편이다. 그럼에도 여인들에게 있어 다듬이질은 그 중 신명나는 노동에 속한다.

한참 동안 몰두하면 무아지경에 빠지고 어깨춤이라도 출 듯 없던 힘이 절로 솟구친다. 협동심과 조화감의 결정이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갈등과 격의가 있었던 여인의 관계에서 이 시간은 이를 해소하고 간격을 좁히는 계기가 된다. 반드럽게 된 다듬잇감이 차곡차곡 쌓인 걸 보고는 어찌 서로 미소를 깨물지 않고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까보냐.

다듬잇돌은 주로 돌을 장방형으로 깍아 윗면을 매끄럽게 간 것이다. 여인이 혼자서 빠듯이 들고날 수 있는 무게라야 안성맞춤이다. 한 손에 쥐고 두드리기에 알맞도록 나무로 다듬은 방망이 네 개와 곁들여서 대개는 집집마다 마루 안쪽에 붙여놓았다. 피곤에 전 남정네가 마루에 몸을 누일때는 베개삼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에 족하지만 입이 비뚤어진다 하여 가까스로 삼간다.

다듬이질은 우리 고유의 풍정이다. 쪽찐 머리에 모시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인의 다듬이질 모습은 그지없이 아름답다. 저 다문 입술, 두어가닥 삐져나온 귀밑머리칼......아, 그런데도 무정한 지아비는 목침을 돌쳐 누우며 이맛살을 찌푸린다. <동지섣달에 베잠방이를 입을망정 다듬이 소리는 듣기 싫다>는 조다.

어느 마을이나 이 집 저 집에서 또닥또닥 들리던 다듬이 소리, 어느 집일까 하고 귀기울여봐도 가까운 듯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고 보살피려는 여인의 갸륵한 정성이 꿈결에도 적셔졌던 그 소리가 잠적하면서 한국인은 멋 하나를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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