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맨살에 맨드라미 꽃모종을 심을 때]-이기철

나는 네 정결한 살 한 줌을 베어내고 거기다 맨드라미
꽃모종을 심고 싶다
그러나 그때마다 너는 두꺼운 철문이었고 무너지지 않는
성벽이었다. 성벽의 이쪽에서 내가 끌어당기는 예순 날의
끈 끝에는 너의 갈색 스타킹이 달려 나온다.
찔레꽃 향기 같은 너의 살냄새와 흰 블라우스 속에 감춘
너의 작고 앙칼진 속 마음이 군데군데 루즈 빛깔로 묻어 있는
너의 한 칸 방 벽지 조각도 더러는 달려 나온다.

문을 열어라. 나는 너의 금욕과 함께 서른 개의 밤을,
동대구에서 추풍령으로 달리던 죽은 기차의 경적을 더불고
안락의자 두 개 놓인 너의 작은 방으로 가겠다.
문을 열어라. 그리고 너의 가장 깊은 바다에 닿을 수 있는
나에게 너의 비밀번호와 열쇠꾸러미를 빌려다오.
희고 포근한
담요 깔린 너의 부드러운 금기의 안방문으로 나는 가야 한다.
너는 그때 너의 굳게 잠긴 지퍼를 열고 숨겨 두었던 즐거움
한 가닥을 내 손바닥에 놓아 다오.

나의 수삼일의 불면과 열흘의 기도와 금식들이 천국보다
지옥의 만찬에 초대받을지라도 나 아닌 것은 모두 식물적인 것들 뿐이라면
즐거움은 더하겠다.
우리가 만나는 삼덕동이나 만촌동 길목은 언제나 무지개빛이고
겨울 눈발이고 풀벌레 잠드는 오월의 장미 잎새다. 문을 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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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겠다.
누군가의 맨 살 물컹 베어내고 맨드라미 꽃모종 심고 싶은 이가 있다는 것이.
때로 누군들 꿈꾸지 않았으랴 지옥의 만찬이라도 좋았을 한 철을.
삼덕동이나 만촌동 혹은 이름없는 골목길 그 어느 곳 쯤에
머물던 발길, 아니 그 헤메임의 몇 몇 날이
이제는 흔적도 없이 자취없는 나날되었으니...
오래된 시를 읽다 보면
추억이여, 그리움이여
세월은 늙고 하나, 둘 그리운 것들만 저홀로 깊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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