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 - 정신의 서늘함과 품격을 찾아서

 도산서원으로 가기 전날 밤 나는 잠을 설쳤다. 안동으로 출발하기 전 일천 이동후선생님께서는 '와, 소풍 전날은 설레지 않니껴?' 하시며 인사말을 건네셨는데, 옛 사람의 정신의 깊이와 자취를 엿본다는 은근한 기대와 설레임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하긴 누구라 없이 길을 나선다는 것은 늘 만남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만남은 또 우리로 하여금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한 계기가 되고도 충분히 남을 터였다.
 주차장에 내려 도산서원 홍보관에서 영상자료를 시청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른쪽 강물을 굽어보며 걸었다. 구비구비 이미 흘러간 세월의 흔적은 자취 없어도 옛 사람이 일구고 간 정신의 깊이는 도도한 장강(長江)만 같아서 왜 그리 가슴엔 금빛 물결 은 물결 출렁거리며 하염없이 깊어만 가던 것이랴!

굽이치는 물결
천년인들 다할 날 있으랴?
물길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웅장한 자태를 다투느니,
인생은 물에 떠내려 가는 장승과도 같이
어느덧 흘러가는 것.
누가 있어 저 흐름 속에서
저리도 튼튼한 다리로 설 수 있을 것인가?
퇴계로 돌아오며 '경암'이라 일컫던 바위를 두고 읊은 이황의 시를 떠올리며 시사단(詩士檀)을 옆구리에 끼고 가다 도산서원 앞마당에 서자 나는 어느듯 풍경의 일부가 된 느낌이었다.  
한 아름이 넘는 두 그루의 버드나무를 보면 굳이 안내자의 긴 설명을 듣지 않고 묻지 않아도 홀로 알겠다. 숱한 사람들이 보듬어 안거나 겉터 앉으며 애정을 괴이고 정을 나누어 이미 친숙하고 다정한 의미로 안겨오는 그리움 같은 것을......

  한복 맵시가 유난히 잘 어울리던 저 이름모를 여인은 그 무슨 생각에 저 홀로 골똘한 모습인가. 이황은 '도산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을 노래함'이라는 글속에 '샘의 물이 맑고 달았다'라고 적었는데 그 이도 나처럼 저 70년대의 성역화 작업으로 각본에도 없는 우물을 만들어 놓아 빼았긴, 진정 목 축일 한 모금의 샘물이 그리웁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도산서당으로 오르던 길 마음만 괜시리 허둥거렸다.
퇴계 당신께서 매형이라 인격을 부여하며 다정하게 부르던 매화꽃은 져버린지 오래였고, 내 눈길은 여러 건물에 걸린 현판 글귀의 뜻을 속으로 가늠하고 헤아리기에 바빴다.

'정우당'앞 연못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퇴계는 군자의 꽃인 연을 심어 정우당(靜友塘)이라 한 이유를 밝혀 놓았다. 진나라 도연명은 국화를 즐기고 당나라 이백 이래 많은 세인들은 모란을 부귀를 상징하는 꽃이라 하여 좋아 하는데, 당신께서는 연꽃이 진흙속에 살면서도 오염되지 않고 잔물결에 씻기면서도 요염하지 않으며 속은 비고 줄기가 곧아 남에게 의지하지 않으며, 그 향기가 멀수록 맑아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지고 놀 수는 없어 군자라 칭하며 기꺼이 벗으로 삼았음을 진작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 연꽃을 굽어보고 있노라니 연꽃 사이로 숨은 몇 마리 개구리들이 꼼지락 거리고 있어 개구리 저도 당신의 그 큰 뜻을 배우고 싶어 시늉하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에 나아가는 문이라는 의미로 읽힌 '진도문'을 들어서자 좌 우에 두 채의 광명실이 있었다. 광명실은 장서실인데 주자의 시 '만권서적(萬券書籍) 혜아광명(惠我光明)과 '역경'에서 취하였다는데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란 말도 있듯이 세상에 태어나 옛 성현의 발뒤꿈치도 밟지 못할지언정 천 권의 서적은 훑어볼 각오를 세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습해(濕害)를 방지하기 위해 누각식으로 지어진 장서실에 쓴 당신의 친필 현판을 뒤로 하고 나아가면 '도산서원'과 '전교당'이라 쓴 현판이 보이는데 '전교당'이나 '진도문' 글씨는 일필휘지로 거침이 없다. 이에 반해 '도산서원'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는데 마르고 고장꼬장하고 일견 고결해 보이기 까지 한 것은 조선시대 제일 뛰어난 명필이 썼다고 하는데서 오는 선입견 탓일까.

전교당 뒤쪽에 자리한 상덕사(尙德祠)는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퇴계의 위판과 그의 고족제자 월천(月川) 조목(趙穆)을 모신 사당이다. 나와 함께간 일행은 '상읍례' '알묘레' 체험을 통해 큰 영광을 입었거니 큰 선비의 발자취를 조금은 더듬어 따르고 배우고픈 소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신과 관련된 유물을 보러 올라온 길을 옆으로 비껴 내려 가던 중 부드러운 곡선의 기와 처마 하나 비례와 구성미가 돋보이던 담장 하나에도 그 얼마나 정감이 가던 것이랴. 급하게 찍어온 사진을 보고 있자니 '농운정사'라는 제목의 시가 떠오른다.
항상 도홍경의 시에 나오는
언덕 위 구름의 흥취 사랑하였다네.
스스로 즐길 수는 있어도
그대에게 가져다 줄 수는 없지.
늙으막에 집을 짓고 그 가운데 누웠으니
한가로운 느낌 절반쯤은
들사슴이 나누어가네
  우리는 왜 애써 배우려 안간힘 하는가. 사람다운 사람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즐겨 익히고 닦고 실천하려 함이 아니었던가.
농운정사에는 '시습제'와 '광란헌' 두 개의 현판이 있었다.
저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양주동선생의 글 가운데 논어 학이편에 그런 글귀가 나옴을 처음 알았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아아, 그 말씀의 인연을 좇아 이렇게 뒤늦게야 전통예절을 익히려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까지 내 발길이 닿지 않았던가.
시습재와 마주보고 있는 '관란헌(觀瀾軒)은 '물결 흘러가는 것을 감상하는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일찌기 공구(孔丘;공자)는 "흘러가는 것은 모두 이와 같구나! 밤 낮을 가리지 않는구나!"라고 하며 탄식했다는데 물 흘러감과 인생의 흘러감을 두고 공부를 이루지 못했음을 탄식하는 뜻이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해보는 것이다.

'옥진각'에는 당신과 관련된 유물이 있었다.
일년초인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인 '청려장'이나 '혼천의' 팔걸이 역할을 했을 '안석'은 그렇다 치고 내 눈길을 끈 것은 단연 매화(梅花)문양이들어간 의자였다.
퇴계는 도산서당에 매화를 심어 두고 '절우사(節友社)라 이름 짖고 "내 이제 매형(梅兄)까지도 아울러서 풍상계(風霜契)를 만드니/절개와 맑은 향기 흠뻑 알겠네" 라며 매화를 두고 '절조가 배어난 사람'과 '고결한 기품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상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 서기라고 표기된 '조그만 책상'을 들 수 있겠는데 절에서 쓰던 양 귀가 올라간 서안과 경상의 중간 형태의 것으로서 옻칠이 벗겨지고 세월탓으로 군데 군데 튼 흔적이 역력했지만 그것은 또 그런대로 아름답고 보배스러웠다. 그토록 작고 날렵해 보이는 책상에 앉아 학문을 닦고 진리의 밭을 묵묵히 쪼았을 당신의, 신산하고 고단한 학문의 길 가운데서도 김성일, 유성룡을 비롯해 수많은 훌륭한 제자를 키우는 보람 또한 컸을 것임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도산서당을 나와 이육사문학관에서 나는 또 매화 향기를 보았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광야'라는 시에서 이육사는 매화 향기를 그리며 조국 광복의 꿈을 꾸었다. 참으로 어둡고 암울한 일제 치하에서 지사로서 또한 문사로서 높은 경지를 보여준 그의 시는 오늘을 살아가는 내 가슴에 매운 회초리 되어 죽비소리처럼 울려 오고 있었다.
 이육사문학관을 나와 함께간 일행은 퇴계 묘소에 오래 머물었다. 따지고 보면 내 전생에 무슨 한 가닥 따뜻하고 긴 인연의 끈이 있어 퇴계 이황선생 당신의 묘소에 참배하는 기쁨을 맛보았던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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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게시판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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