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 갔더란다!

때로 세상사 답답하고 심심하여 무덤덤한 마음을 갖고자 애써도 시름겨워 어쩌지 뫃할 때 훌쩍 떠나 보는 것도 영 의미없는 짓거리는 아닌듯 하답니다. 내 딱히 어쩌자는 마련도 없이 봄바람날 나이도 훌쩍 지났건만 내닫은 발길이 다달은 곳은 경주박물관이었습니다.

지난 수 년간 크고 작은 몇 차례의 경주박물관 기획 전시 기사에 잠시 솔깃한 마음뿐 한 번도 실천에 옮겨 길을 나서지 뫃한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오늘은 대구박물관 도슨트팀의 일원으로 월례행사로 계획된 박물관순례라는 좋은 핑계거리도 있었지만 콧구멍에 바람 한번 넣어 나쁠 것 없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작용한 탓이었습니다.

이야아- 저, 저, 저 노오란 꽃 숭어리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밖으로 나서자 마자 발을 헛놓게 할 만큼 그토록 환하고 명랑하고 쾌할하게 안겨오는 축제 같은 향기에 취해 잠시 황홀할 지경이었습니다.

내 기억속, 그 언제던가 제주도 삼방산밑이나 섭지코지 가던 길과 성산 일출봉에서 무더기 무더기 피어나 나를 자꾸 흔들어대던 유채꽃 향기도 떠오르며 함께간 일행을 조금씩 달뜨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박물관 뒷뜰엔 곱게 빻은 은가루 같은 햇살로 짠 봄쉐타 털실의 올이 스물스물 풀리는 듯 했습니다. 적당히 따뜻하고 포근한 기운속에서 만나는 숭복사지 비석받침은 당당하고 힘차보였습니다.

통일신라 시대의 비석받침인데 등에는 두 겹의 귀갑문(龜甲文)을 새기고 짧은 목에는 귀한 구슬목거리를 한 채 머리는 용(龍) 형상을 한 것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석물은 아닌 것이 분명했습니다.
여기 저기 경주 일원의 폐사지와 남산에서 옮겨온 석물들은 볼 때 마다 푸근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사람을 끌어 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까이 가고자 하고 기꺼이 마음 주어 애틋한 눈길로 마주해 보면 돌에도 피가 돈다는 말이 영 그릇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파란 츄리닝을 입고 때이른 봄소풍을 나온듯, 그것도 아니라면 야외 수업으로 동무들과 함께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통통 튀고 까르르 발치에 깔리는 것이 보기에 참 좋았습니다.

문득 먼 데서 연식정구를 할 때 나는 탁, 타닥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고 일없고 까닭없이
마냥 훈훈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가슴에 피어나는 듯도 했습니다.

팻말에 새겨둔 설명에 따르면 오른쪽 불상은 월성군 양북면 장항리에서 옮겨온 석조여래입상으로서 여러 조각으로 부서진 것을 상반신만 복원한 듯 했습니다. 촘촘히 새긴 나발(螺髮)의 머리위 커다란 육계를 하고 원만한 얼굴(상호)인데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파여 있고 시원스런 눈썹을 하고 있었습니다.

중앙에 보이는 남산에서 발견되었다는 부처머리는 몸체는 사라졌지만 미루어 짐작컨데 상당히 큰 불상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우아한 곡선으로 그어진 눈썹이나 꾹 다문 입과 두툼한 아랫입술과 길쭉한 얼굴 모습이 예사로운 모습은 아닌듯 해 오래 그 앞에 눈길을 주곤 했습니다.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박물관 뒷마당에 모아 놓은 석등 받침에서 느끼는 소감은 말로 다 이르고 표현해낼 재간이 나에게는 없는 듯 했습니다. 이리저리 얽키고 설킨 사연과 그리움과 추억과 아쉬움으로 다가오는 왼갖 궁리와 속짐작으로 마음은 허둥거리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또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생각 갈래 만 갈래 내 살아온 날들이 밀물처럼 출렁거리며 다가오는 듯도 했습니다.

무엇인가, 이제 와 저게 다 무엇인가!
저 폐사지나 이름 모를 절터에서 옮겨져 와 이제는 다소곳 숨죽인 채 아무렇게나 봄햇살 아래 빛바래기 하고 선 돌들이 주는 느낌이 따뜻해 잠시 누구에겐지 모르게 고개 숙여 감사하고픈 마음 조차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그래, 그래......
이 사월 초순의 봄날은 얼마나 크나큰 축복이고 그리움인가.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그립고 안타깝고 아쉽고 무모하던 젊은 날의 뒤안길 돌아 이제는 다만 넉넉하고 화해하는 몸짓으로 살아 가리라. 정녕 우리네 세상 살아가는 일도 저와 같아서 이제는 다만 감사하고 기뻐하고 다소 함께 나눌 수 있는 이 몇 곁에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럽고 소망스런 삶이냐! 하는 마음도 슬그머니 끼어드는 것이었습니다.

뒷쪽에 보이는 삼층 석탑에서 느끼는 감동도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이 석탑은 덕동 댐 공사로 수몰될 경주시 암곡동 고선사지(高仙寺址)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옥개석(屋蓋石)과 탑신석(塔身石)은 여러 개의 부재(部材)를 써서 짜맞추어 놓은 것으로서, 감포가는 길에 우뚝 선 감은사지(感恩寺址) 탑과 거의 같은 시대와 크기와 양식의 탑으로서 통일신라초기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이 고선사지 탑에는 탑신에 문비형(門扉形)이 새겨진 것이 특이 했습니다.

내 어제 주말도 아닌데 모처럼 일상에서 벗어나 거닐었던 경주박물관 뒤뜰의 석물들에는 차마 말 다 하지 뫃하고 꽁꽁 쟁여두고 숨겨둔 많은 사연들이 군데 군데 있는 듯해 어디다 눈길을 먼저 주어야 할 지 몰라 두리번두리번 조금 허둥거렸던 것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돌로 쪼으고 새기고 파내고 주물러 놓은 옛 석물이 주는 빛바래고 익숙하고 어수룩하고 친근하고 편한 느낌속에서 맞는 눈부처의 호사를 나혼자 즐기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한나절이었습니다.

박물관 실내에서 둘러본 신라기와나 통일신라 토기나 각종 금속공예와 불상이나 조각품 등도 좋았지만 다시 경주박물관에 들릴 기회가 있다면 국은(菊隱) 이양선 박사가 수집하여 조건없이 기증한 기증유물 전시실에 오래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쁜 가운데도 대구박물관에 근무한 인연으로 애써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박방룡학예실장님의 설명을 따라 잡느라 세 시간의 일정으론 많은 아쉬움이 남는 경주박물관의 하루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양선박사님으로부터 직접 유물 인수 작업을 하셨다는 박실장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 문화재를 진정으로 아끼고 모아 국가에 환원하신 분의 거룩하고 따뜻하고 귀한 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어 많은 감동이 뒤따랐습니다.
모처럼 나선 경주박물관 나들이는 성덕대왕신종 앞에서 죽비소리처럼 사정없이 쏟아지는 큰 울림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종꼭대기에 용 형태로 된 고리인 종뉴(鍾紐)와 음통(音筒)이 있고 몸체에는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을 새긴 상대(上帶)와 연꽃으로 치장된 네 개의 유곽(乳廓)과 네 구의 천인상(天人像)이 있다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1037자의 명문을 통해 종을 만든 주종대박사(鑄鐘大博士)가 박대나마(朴大奈麻)이고 명문을 김필해(金弼奚)가 지었다는 등 등 귀한 금속문 자료가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겠지만, 천 년 넘는 세월을 무사히 견디고 살아 남아 우리 앞에 이 종이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롭고 신비스럽기 까지한 노릇인지 절로 외경심 조차 드는 것이었습니다.

통일신라시대 35대 경덕왕(景德王,742~765제위)이 돌아가신 부왕 성덕대왕(聖德大王, 702~737제위) 을 위해 구리 12만근으로 만들었다가 실패하여 그 아들 혜공왕(惠恭王 7년(A.D 771년)때 완성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물경 30년 세월에 걸쳐 백성들이 괴로움속에서 벗어나고 진리를 깨닫고 복을 받게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또한 그 공덕으로 성덕대왕이 극락에서 편하게 쉬도록 하고자 하는 기원이 깃든 이 종은 실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신종(神鍾)이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유물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에밀레종이라거나 봉덕사종이라거나 하는 별칭을 갖고있는 이 성덕대왕신종에 얽힌 이야기는 유홍준교수의 답사기나 남천우박사의 '유물의 발견'이란 책에

자세히 나와있거니, 이 자리에서 무슨 설명과 소감을 따로 덧붙이랴 싶습니다.4월 어느 봄날 무작정 따라 나선 내 소풍은 마냥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박물관 정문 건너편에 피어있던 노란 유채꽃 향기로 마구 문지른 가슴은 얼마나 설레이고 가슴 뛰던 기쁨이었던가. 펄펄 봄도다리 같은 미각조차 불러 일으키며 눈으로 맞는 호사가 있어 진정 스치듯 구르는 석재 한조각에도 애정이 깃들고 이끼낀 세월의 흔적 하나에도 허투루 할 수 없는 의미가 새록새록 묻어나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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