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1570년 70평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죽음을 예비하는 당신의 자세는 담담한 가운데 여유롭기 까지 했다는데 기록을 보니 다음과 같다. 1.남들에게 빌려온 책을 돌려주다. 2.예를 갖춘 성대한 장례를 치루지 말 것이며, 큰 비석을 세우지 말고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도산에 물러나 만년을 숨어산 진성이씨의 묘라고 적고 가족관계와 뜻하고 행동한 것과 벼슬한 것을 간략하게 적을 것. 3.여러 유생을 만나보고, 미리 관을 만들도록 하고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 관리를 맡겼다. 이황선생의 사적을 기록한 명문은 기대승이 짓고 글씨는 금보가 썼다고 한다. 묘소앞에는 한 쌍의 동자석이 마주 보고 망주가 벌려 서 있었다. 나는 좌우에 시립하고 선 문인석옆에서 한 컷의 사진을 찍었다. 문인석은 조복에 홀을 들고 선 모습이었는데 굳건한 의지와 도저한 정신의 깊이를 가진 선비의 표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안내인은 굳이 선생의 살아 생전 뜻과는 달리 상석과 비석돌과 여러 석물을 치장하게된 사유를 남은 사람들의 뜻으로 돌렸는데 살아 생전 벼슬의 품계에 따른 장사법과 격이 있음인데 그 누가 입을 대랴 싶었다.
퇴계종택을 찾아가는 일은 이번 선비문화수련원 부설 전통예절교육원 탐방 일정의 마지막 여정이었다. 조금 높다 싶은 대문을 들어서며 보니 대문 위쪽은 그대로 홍살문이었다. '열녀 통덕랑 행 사온서 직장 이안도 처 공인 안동권씨지려' 현판이 판각되어 있었다. 노 종손의 13대 조모라는데 젊은 나이에 청상이 되어 네 따님만 둔 터라 후사를 위해 셋째집에서 양자를 들여 양자 나이 열 셋에 며느리를 보았다고 한다. 며느리를 보고 고인의 제자들과 신행온 사람들에게 '삼일 입조' 하는 걸 보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고 한다. 삼일 되는 날 열쇠를 반에 받쳐 며느리에게 건네주고 향물에 목욕재계 하고 소복 갈아 입고 초석자리 펴고 대야에 물 한 바가지 떠놓고 피 토하고 돌아 가셨다 한다. 나라에서 특별히 정려를 내리셨다는데, 대를 이어 가문을 지키고자 한 그 서리발 같은 마음을 떠올려 보느니 대단하면서도 가슴이 아려오는 것은 또 무슨 연유인가. 한 여인으로서 보다는 가문과 집안을 지키고 발전시켜야 된다는 그 시대적 상황에 가위 눌린 한 지어미의 지고지순한 전통적 삶살이가, 내 애써 헤아려 짐작컨데 잔잔한 감동과 안쓰러움으로 함께 밀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홍살문을 지나 추월한수정(秋月寒水庭)앞에서 듣는 종손의 말씀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종손의 연세는 백을 바라본다는 뜻의 망백(望百, 91세)을 한참 지나 백수(白壽, 99세를 이르는 말)였는데 그 정정한 정신과 가문에 대한 책임감인듯 퇴계종택에 얽힌 이야기를 한 마디라도 더 설명하려고 애쓰시는 모습이 예사로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어서 깊은 감동과 울림으로 전해져 오곤 했다. 추월한수정은 풀어 쓰자면 '가을 달과 추운 물이 함께하는 정자'를 이르는듯 한데 퇴계선생의 말년에 스스로 만족하며 유유자적한 생각을 보는듯한 느낌이었다. 종손께서는 전국의 유림 250 종가의 협조로 추월한수정(秋月寒水庭)을 짓게 된 점을 거듭 강조 하셨는데, 돌아와 자료를 찾아 보니 1715년 창설재 권두경(蒼雪齋 權斗經)이 도산서원원장이 되어 종손 이수겸李守謙과 논의하여 영남사림의 모금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도산서원이 도산서당의 기념 건물이라 한다면 '추월한수정'은 퇴계종택 기념 건물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퇴계종택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건물은 퇴계선생태실(退溪先生胎室)이었는데 나는 일부러 태실에 들어가 지극히 짧은 동안이었지만 나름대로의 상상과 여러 궁리로 잠시 머리가 분주하기만 했다. 비교해 보건데 월성 손씨의 양동마을에 있는 회재 이언적선생이 태어난 태실이 그러하듯 여기에도 약간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태실은 안채의 안마당 쪽으로 조금 튀어 나온 모습이었는데 생각 보다는 아주 좁아 두 세 사람이 누우면 꽉 찰만한 공간만을 갖추고 있었다. 이번 도산서원 탐방길에 함께 나선 여러분의 여자선생님들은 태실에서 나올 생각을 안하는 듯 했는데 한 이십년만 더 젊었어도(?) 하면서 나처럼 퇴계선생태실의 기(氣)를 받아 혹 엉뚱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니지 기실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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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앞의 아담하고 단정한 굴뚝을 보고 나서 안채와 사랑채의 뒷켠에서 오래 내 눈길을 끈 것은 가지런하게 늘어선 고가의 장독대였다. 어디 없이 고가를 방문할 때 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이 곳에도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지는 못하는 형편 같았다. 잿물로 유약을 한 제대로 된 옹기는 별로 없고 광명단 유약으로 적당히 눈가림한 현대식 항아리들이 빼곡하게 늘어선 탓이었다. 대청위 시렁위에 올려져 있던 조잡한 소반들도 마찬가지였다. 종손이 종가를 지키며 누대에 걸쳐 살아왔다면 고식의 궤나 장롱이나 옛 목물들이 아직 남아 있어 실생활에 쓰이기도 하였으련만, 얼핏 몰래 살펴본 바 옛 가구들은 골동품 취급 상인들이 진작에 다 가져가고 현대식 가구로 다 바뀌어 버렸던 것이다. |  그러나 그 누구를 탓하고 나무랄 수 있으랴. 옛 가구들이 더러 눈요기감으로 보여질 수 있었으면 하는 내 얄팍하고 이기적인 생각을 지지눌러 죽이고 반성을 했다. 따지고 보면 나부터 벌써 현대적인 모든 문명과 편리함에 젖어 나태한 정신으로 이 시대를 살아 가는 것이 아니던가. 그랬다. 이번 내 선비문화를 찾아간 탐방길은 일견 아쉬웁고도, 매운 회초리로 맞은듯한 정신의 고귀함과 옛 선비정신을 다시금 되새겨 보는 한 계기가 되었다.
돌아오는 버스칸에서 오래동안 사주, 풍수,예절 등을 공부하였다는 송반 조장 송은석님은 퇴계선생의 무덤자리가 좋았음과 퇴계선생태실의 좋은 기를 받고 감을 설명했다. 또 내 뒷자리의 여선생님 한 분은 청마 유치환의 시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노라'를 암송하여 내 젊은 날의 낭만과 분별없음과 무모함의 한 때를 추억케 했었다. 그 누구라 한 때 시인이며 소설가 아닌 사람이 있었으랴! 기회가 허락되었다면 난 아마 정운 이영도 여사의 '눈길에서'란 화답시(?)를 읊었으리. 그리고 또 어느 분이시던가.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을 준비해 와 들려주신 분은.
이번 도산서원 탐방에 애쓰신 분들의 수고를 기억하며 우리가 전통문화를 찾아서 가고자 하는 길. 그 길도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처럼 사람 걸은 자취가 적은 그러한 길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어쩌면 먼 훗날 우리는 어디서 한숨을 쉬며 또 이야기 할 지도 딴은 모를 일이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갈라져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것으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