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참 기분좋은 일이다. 게다가 취향까지 비슷하다면!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으면서 나는 시종 '어머,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쩜, 나도 이 책 참 좋았는데' '우왕~ 나도 이 영화 너무 좋았어^^'를 남발하며 마치 곁에 있던 좋은 친구를 이제서야 알아 본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들었다. 손석희 앵커의 추천사처럼 " 문유석 판사 생각의 대부분과 그의 성향의 상당 부분이 나와 겹친다는 데에 경이로움까지 느끼면서" 이 책을 읽었는데, 아니 그렇다면, 우린(손석희 앵커까지 포함해서 내맘대로 ㅋ) 취향공동체였어? 역시 뭔가 끌리는게 있더라니!!
손석희 앵커가 그랬듯이 이렇게 취향이나 생각이 비슷하다면 "훗날 내게 기회가 오더라도 이런 책은 쓸 필요가 없게 된다"......는 무슨, 이렇게 내 생각을 정리해서 훌륭한 글솜씨로 잘 다듬어준 그가 고맙기는 하지만 왜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는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였다. 알기 쉽고 깔끔하게 자기 생각을 적어내려간 그의 글에서는 개인주의자이지만 타인을 끌어안을 줄 아는 따뜻한 면모가 돋보였다. 이런 사람들은 의외로 세상에 많을텐데, 그렇다면 세상은 그리 비관적인 곳만은 아닐텐데, 좀더 낙관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가야겠다는 여유로움이 생기기도 한다. 대한민국 사회의 불편한 진실이 가득하지만 그래도 연말에 읽기에 아주 훈훈한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다시 돌아보게 된 책과 영화들을 정리해본다.
# 1. 영화 <위플래시>를 보고 쓴 글에서 그는 자기계발의 함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도 그 영화를 보고 엄청난 전율을 느꼈지만 그 영화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서 '아직 내 노력이 부족하다. 미친듯이 노력을 해야만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식의 멘트에는 소름이 돋았는데 그가 꼭 그 지점을 지적해 준 것이다. 우리는 한 개인이 성공을 위해 바친 노력과 열정을 칭찬할 수는 있지만 성공에 대한 열망으로 광기로 치닫는 것을 보며 그렇게 해야만 성공이 오는 것이라고 치장할 필요는 없다. 훌륭한 점과 비판받아야 할 점은 냉정하게 분리해야 하는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대체로 성공에는 재능과 노력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금수저 물고 태어나 과분한 기회를 누리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는 영화 <폭스캐쳐>를 예로 드는데 이 영화도 올해 내가 열광했던 작품 중 하나다. 엄청난 재벌이지만 부모로부터 상속된 부와 명예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는 열등감과 오만함으로 비뚤어진 병든 인간일 뿐이고 그런 인간에게 주어진 과도한 권력은 결국 비극을 낳는 것이다.
# 2.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도 자주 소개되는데 선물 받아서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꼭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행복을 가장 자주 느끼는 원천은 바로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것, 즉 큰 행복 한 방보다 소소한 기쁨이 끊임없이 이어지는것이 유리하다는 것이 아주 맘에 든다. 실제로 책 소개를 읽어보니 아주 재밌을 것 같아서 더이상 책장에 묵혀두지 말고 빨리 읽어봐야겠다.
# 3. 조국 교수의 이 책을 얘기하며 시작한 [88학번]이라는 글은 나의 대학시절을 떠올리며 마치 응답하라를 보고 있는 것같은 즐거움을 주었다. 저자는 82학번인 조국 교수를 서클 세미나 자리에서 딱 한번 보았는데 '왠 홍콩 영화배우가 서울법대에 와 있는 걸까'하는 시공간의 왜곡현상을 느꼈다고 한다. ㅎㅎ
지금 돌아보면 내가 대학을 다니던 그 시기는 정말 거대한 사회변화의 시기였다. 당연히 피끓는 청춘이 강의실에 앉아만 있을 수는 없는 시대였고, 80년 광주와 박노해의 노동시들을 읽으면서 교과서에 나오는 세상과 현실 세상과의 괴리를 뼈저리게 느끼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학가를 지배하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개인주의자적 성향이 강해서 나는 한 발은 동아리에 담가서 소위 '학습'을 열심히 하기도 했고 민중가요를 부르며 시위를 주동하는 문선대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몰래몰래 자본에 충실한 부르주아적 삶(나이트 클럽에 열심히 다녔다는 말 ㅋㅋ)을 즐기기도 해서 선배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었다. 이 글은 그런 사람이 나만이 아니었다는 걸 느끼게 해 주었고 어쩌면 우리 대부분이 그렇게 살았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 4. 저자가 언급한 이 책은 나에게도 무서운 책이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고 처음 요즘 젊은이들의 대학 문화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런데 문유석은 장예찬의 [그들은 20대의 정치화에 관심이 없다]라는 글과 일본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책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함께 소개했는데 나는 비로소 완전히 요즘 젊은이들을 이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과도한 입시경쟁, 취업경쟁에 내몰려야 했던 젊은이들은 노력의 결과가 정당한 평가를 받기를 바란다. 그러다보니 배타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것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성적 소수자 인권, 이주 노동자 인권, 환경 보호, 사회적 기업 등 다양한 공익적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도 많다는 것이다. 저성장시대에 맞춰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현실에 만족하는 젊은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나는 현실이 이런데 늘 즐겁기만한 내 아들을 보면서 걱정스런 맘이 들곤 했었는데 이 글을 읽으며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결국 지난 시대의 기준으로 들이댄 '세대론'으로 현재를 완벽하게 설명하려 드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고 이십대를 괴물로 보는 것도 , 모든 것에 달관한 세대로 보는 것도 성급한 것이라는 거다. 변한 건 세대가 아니라 시대다! 인간은 누구나 주어진 여건하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적응해가는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지금도 불행하고 비참한 처지에 있는 젊은이들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문유석이 말하는 개인주의자의 태도다.
# 5. 저자는 이 영화도 빠트리지 않았다. 영화 <카트>! 노동의 대가로 살아가는 사람은 모두 노동자다. 얼마전 민주노총 위원장 한상균이 체포되는 뉴스를 보면서 아직도 노동조합이라면 불온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드라마 <송곳>을 그렇게 감동하며 보았는데도, 노동개악의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니라 당장 자기의 문제가 될 수 있음에도 말이다. 이 영화에는 청소년 알바문제도 나오는데 사실 이 영화를 보고나서야 애들에게 물어보니 알바하는 친구들이 의외로 많다고 했다. 그 아이들 대부분이 제대로된 노동자의 권리를 모르고 있어서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하는데 정작 학교에서는 노동권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학생들 스스로가 팀프로젝트로 [청소년 알바와 노동권]에 대해 공부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아이들에게 좋은 사회교육 교재가 되었다.
# 6. 엄청난 두께로 베고 누우면 딱 좋을 듯한 이 책은 사놓고 아직 못읽고 있었는데 이 책에 인용되어서 읽어봐야겠다 하는 다짐을 또 해본다. 인간이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왔는지를 밝히며 요약하자면 인류의 역사는 원래 내내 끔찍하고 폭력적이었으므로 현재가 그나마 가장 비폭력적이고 평화로운 시기라는 것이다.
핑커는 세계적으로 폭력을 감소시킨 결정적인 힘은 홉스가 말한 리바이어던, 즉 근대국가라고 한다. 이성의 힘, 인류가 밟아온 문명화 과정이 폭력을 감소시킨 동력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눈에 보이는 인간사회의 끔찍한 면만 본다면 비관에 빠질 수 있지만 사실 오랜 역사를 관찰해보면 이산은 스스로 자신의 폭력성을 제어하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향해 놀랍게 진보해왔다. 여기서 문유석은 지금이 가장 폭력적인 시대라고 분노하는 건 착각이라고 지적한 핑커의 논지에 동의하면서도 오히려 그 착각이 인류의 폭력성을 감소시켜온 원동력일 것이라고 한다. 지금이 과거보다는 낫다 하면서 현재에 아무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조금도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느 시대에나 타자의 고통에 가장 예민한 이들, 가장 호들갑스럽게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현실문제들이 개선되어 나갔다는 그의 시선에 동의한다.
# 7. 이 영화를 봤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전 아무 정보없이 보았다가 이게 다큐멘터리라는 사실에 놀랐고 결국은 엄청난 구역질을 해댔던 영화!
인도네시아의 1965년 대량학살 사건을 다룬 영화인데, 당시 정권을 잡은 세력은 공산당을 박멸하기 위해 불법 우익단체 '프레만 free man'과 '판차실라 청년단'에게 무기를 쥐여주며 백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더 놀라운 것은 역사청산이 이루어지지 않고 이 영화를 찍을 당시에도 학살의 주역들이 미국인 감독앞에서 자랑스럽게 자신들의 업적을 증언하고 어떻게 사람들은 효과적으로 죽였는지 재연한다는 것이다. 공산당 섬멸을 위해서라면 기존 윤리나 문명따위는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사인이 떨어지자 이 동네 양아치들은 순식간에 학살자로 변한다. 오랜 시간 힘들여 구축한 문명이라는 구속을 벗겨놓으면 인간이 얼마나 야만적으로 돌변하는지, 학살의 주동자 안와르 콩고와 그 패거리들은 사이코패스라서 무서운 게 아니라 백지 상태의 야수라서 더 무섭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현재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자기 행동의 의미를 성찰할 줄 모르는 무지야말로 가장 위험한 것이고 이 야수를 탄생시킨 것은 바로 그들의 힘을 이용하려는 정치 권력이라는 것!
이 밖에도 많은 책과 영화들이 소개되는데 다 내가 관심있어서 읽어보았거나 읽어보려고 사놓은 책들이었고 그가 봤던 영화들도 나도 재밌게 본 것들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옆집 어딘가에서 아이들에게 줄 떡볶이 봉지를 들고 툭 튀어나올 것 같은 친숙함을 느끼게 해준 문유석 판사. 그와 같은 개인주의자들이 많은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 것이라고 믿는다.
#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발전하고 있고, 어떻게 보면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무엇에 주목하느냐의 문제라면 나는 이왕이면 발전하는 모습에 주목하고 싶다. 냉소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110쪽)
# 한 개인이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만도 전쟁같이 힘든 세상이다.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입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업 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혼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고통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아이가 다시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지키기 위해. 그런 개인들이 서로를 보듬어주고 배려해주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또 그렇기에 얼마나 귀한 일인가.
우리 하나하나는 이 험한 세상에서 자기 아이를 지킬 수 있을만큼 강하지 못하다. 우리는 서로의 아이를 지켜주어야 한다.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279쪽)
이런 그의 생각에 나도 한 수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