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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강의 - 혼돈의 시대에 장자를 읽다
전호근 지음 / 동녘 / 2015년 1월
평점 :
대망의 <장자강의> 오늘로 모두 마무리!
<장자강의>는 장자의 <내편>을 모두 읽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책이다. 그 중 4편까지는 지난번에 정리를 했고,
제1편 소요유 http://blog.aladin.co.kr/auroramom/8008232
제2편 제물론 http://blog.aladin.co.kr/auroramom/8013095
제3편 양생주
제4편 인간세 http://blog.aladin.co.kr/auroramom/8037948
오늘은 덕충부, 대종사, 응제왕 편을 정리한다.
장자의 다섯째편 덕충부(德充符)는 어떤 사람의 내면에 덕이 충만하다는 부호 라는 뜻이다. 도와 덕을 이야기할때 도는 밖에 있는 것이고 덕은 그 도가 어떤 사람의 내면에 체득된 것을 말한다. 도를 체득해서 내면화한 사람은 내면의 덕에 부합하는 형상을 갖춘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다.
장자는 덕이 충만한 사람을 어떤 모습으로 그려냈을까? 이 덕충부편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형벌을 받아 다리가 잘렸거나 절름발이이거나 곱사등이, 언청이, 항아리만큼 커다란 혹을 가진 사람을이다. 우리가 보기에 비정상이거나 장애를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 장자는 그런 우리의 시선을 뒤집는다. 과연 누가 누구더러 비정상이라 하는가!
장자는 자신의 글 속에서 세속 인간들의 육체적 조건에 대한 집착을 깨고 참다운 덕은 내면에 있음을 밝히기 위해 세속의 사람들이 가장 추하다고 생각하는 인물들에게 도를 말하게 한다. 덕이 충만해있으면 외형의 결핍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 덕충부 편의 핵심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외형의 결핍 때문에 내면의 충만한 덕을 보지 못한다.
장자를 읽으며 재밌는 부분은 장자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인데 대부분 실존인물이 아니라 장자가 지어낸 사람들로 이름 자체에서 엄청난 풍자를 내포한다. 나중에 장자를 읽어보시는 분들은 꼭 이름의 의미를 되새기며 읽어보시길!
제6편 대종사 (大宗師)편에서 대종이라는 말은 원래 제사와 관련된 용어이나 장자에서는 도를 비유하는 말로 볼 수 있다. 즉 대종사는 모든 가치의 뿌리인 대종, 즉 도를 지닌 사람이다. 삶과 죽음, 인의와 예악을 모두 잊고 가난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대종사다.
제7편 응제왕 (應帝王)은 제왕의 물음에 응답한다는 뜻인데, 당나라의 주석가 최선이나 송나라의 주석가들 모두 응제왕을 '응당 제왕이 되어야 할 사람'이라고 풀이한다고 한다. 저자는 앞의 견해가 더 무리 없는 해석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이것 역시 실제 있었던 일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우언이다.
어떻게 천하를 다스릴 것인가? 다스리려고 하지 않으면 된다. 사물을 세상의 질서를 기준으로 차별적으로 대하지 않으면 천하가 저절로 다스려질 것이라는 것이다.
#지인의 마음 씀씀이는 거울과 같은지라 보내지도 아니하고 맞이하지도 아니하며, 비추기만 하고 간직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만물을 감당하면서도 다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498쪽)
至人之用心은 若鏡이라 不將不迎하며 應而不藏하나니 故로 能勝物而不傷하나니라.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기만 할 뿐 자기 기준을 내세워 상대를 깎아 내리거나 왜곡하지 않는 거울같은 지인의 마음씀씀이를 배워야겠다.
그리고 마지막 결말인 혼돈의 죽음 이야기는 너무나 큰 울림을 주었다. 장자의 우언중 붕새와 포정해우, 호접몽에 버금갈만큼 유명한 혼돈 설화이다.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다.
#남해의 임금은 숙이고 북해의 임금은 홀이고 중앙의 임금은 혼돈이다. 숙과 홀이 때로 혼돈의 땅에서 함께 만났는데, 혼돈이 그들을 매우 잘 대접하자, 숙과 홀이 혼돈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상의하여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쉬는데, 이 혼돈만은 없으니, 시험삼아 구멍을 뚫어주자.' 하고는 하루에 구멍 한 개 씩을 뚫었더니 칠 일 만에 혼돈이 죽었다. (502쪽)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저자의 해설을 보는데 마치 추리소설의 단서를 하나씩 풀어가는 재미가 있었다. 자세한 설명은 궁금하시라고 패쓰!! ㅋㅋ
혼돈의 비극은 우리가 다른 삶을 사는 존재를 이해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말해준다. 이해하려는 자체가 상대를 지배하려는 폭력이 될 수 있다. 혼돈이 죽는 비극은 근대 세계가 다른 세계를 만났을 때 빈번하게 일어났다.
장자는 다양한 삶을 이야기 하면서 그런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장자 내편의 결말에 해당하는 이 혼돈설화에서 장자는 우리가 타자를 대할 때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타자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타자를 배려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숙과 홀처럼 혼돈에게 구멍을 뚫어주게되고 혼돈이라는 정체성을 상실한 혼돈은 죽게 되는 것이다.
장자 내편은 붕새의 비상으로 시작해서 혼돈의 죽음으로 끝난다. 붕새가 절대 자유를 희구하는 장자의 상징이었다면 혼돈의 죽음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이 대목을 읽으면서 마치 반전 영화의 슬픈 결말을 보듯 충격을 받았다.
이로써 장자 내편의 이야기는 모두 마무리되었다. 저자도 계속해서 밝히지만 장자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읽혔고 같은 시대라도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관점으로도 읽혔다. 그러니 이것도 수많은 장자 읽기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장자의 깊은 뜻을 누가 알겠는가. 다만 내게 와 닿는 방식으로 그의 생각을 짐작해 볼 뿐이다. 이 책을 마무리하며 또 다른 장자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집에 있는 강신주의 책부터 읽어볼 생각이다. 그리고 저자의 근간 <맹자 강의>도 기다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