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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강의 - 혼돈의 시대에 장자를 읽다
전호근 지음 / 동녘 / 2015년 1월
평점 :
장자 <내편>중 제 2편 제물론 齊物論은 장자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편이면서 동시에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할만큼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일단 제물론의 뜻풀이부터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제물론'을 '제물지론' 즉 제물의 주장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이들의 풀이에 따르면 '제물'은 만물을 차별없이 가지런하게 여긴다는 의미다. 한편 '제물론'을 '물론物論'을 齊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경우인데 온갖 주장을 가지런히 통일시킨다고 보는 입장이다. 저자는 장자의 사상 전반에 입각하여 '제물론'을 이해한다면 아무래도 만물의 주장을 가지런하고 대등하게 바라본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앞의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고 한다.
제물은 차별없는 시선으로 바라볼 때만 드러나는 만물의 제 모습이다. 장자는 도가 기왓장이나 돌 부스러기에도, 지푸라기에도, 똥과 오줌에도 있다고 한다. 지고의 가치인 도가 실은 가장 낮은 곳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만물을 차별없이 가지런히 본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의 입장에서 다른 존재를 어떤 것은 이롭고 어떤 것은 해롭다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가르는데 반대한다. 이렇게 만물을 대등한 존재로 받아들일 때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한다.
1장은 남곽자기와 안성자유의 대화로 시작하는데, 장자답게 이름하나 짓는데도 그 비유가 탁월하다. 남곽자기는 도를 아는 인물인데,'곽郭의 남쪽에 사는 자기'라는 뜻이다. 고대에는 성안에는 귀족이 살고 곽 안에는 평민이 살았다. 그중에서도 남쪽엔 가장 세력이 약한 최하층민, 곧 천민이 사는 곳이었다. 장자의 생각에 도는 성곽 남쪽 천민들이 거주하는 곳에 있다. 그래서 도인으로 남곽자기를 등장시킨 것이다. 반면 안성자유는 성안에서 편안히 살아가는 자유라는 귀족이다. 장자는 1장부터 귀족인 안성자유가 천민인 남곽자기에게 도를 묻는 설정을 사용함으로써 일반적인 신분관계의 역설을 보여준다. 1장에서 장자는 모든 존재가 평등한 제물의 세계를 들려준다.
하지만 현실세상엔 차별이 만연하다. 왜그럴까? 장자는 언어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름짓는것.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물을 분류하는데 이 분류는 대단히 폭력적이다. 2장에서는 옛 성인 요와 순의 이야기를 통해 시비와 차별의 세계를 넘어서라고 말하고 있다. 도는 대단한 추상 개념이 아니라 흔히 만나는 사물을 제대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 장자는 사물을 이런 저런 방식으로 나누기 시작하면 그런 사람의 눈에는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3장에서 장자는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이라는게 사실 아무 근거가 없다는 것을 밝히고 4장에서는 까치선생 (瞿鵲子)과 오동나무 선생(長梧子)의 우화를 이야기한다. 까치선생은 경망스럽게 말을 옮기는 사람을 뜻하고 오동나무선생은 도를 깨달은 인물로 묘사되는데, 슬쩍 공자를 비판하는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어떤 권위에 의존해서 옳고 그름을 가리려고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일시적이고 변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더라도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는 없는 걸까? 장자의 해결책은 바로 자연의 도를 따라 만물을 조화하는 것이다. 자연의 도를 따르면 세상의 시비와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5장의 주인공은 그림자와 그림자의 그림자다! 그림자는 실체의 입장에서 보면 허망한 존재다. 그런데 그 그림자의 그림자는 얼마나 더 허망한 존재인가. 6장에 나오는 호접몽에서 꿈 속의 꿈을 말하는 것과 같다. 실체라고 생각했던 그림자가 사실은 실물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실체라고 생각하는 실물, 곧 우리의 몸뚱이 또한 또 다른 실체의 허상이 아니겠느냐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6장의 나비의 꿈으로 이어진다.
장자가 이렇게 비유와 우화를 사용하다보니 굉장히 문학적으로 읽히는데 사실 공자 맹자와는 다른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란다. 공맹처럼 하고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잡혀가지 않으면 좋은데, 장자는 자칫 잡혀가기 쉬운 처지였기 때문에 보호 장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오늘날 인터넷에 다양한 풍자들이 넘쳐나는 이유도 그렇지 않겠나 싶어서 장자의 처지에 또한 공감이 간다. ㅎㅎ
# 어젯밤 장주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팔랑팔랑 가볍게 나는 나비였는데 스스로 즐겁고 뜻에 꼭 맞았는지라 장주인 것을 알지 못했다. 이윽고 화들짝 깨어보니 갑자기 장주였다. 알 수 없구나. 장주의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의 꿈에 장주가 된 것인가. 장주와 나비는 분명한 구별이 있을 테지만 이처럼 장주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주가 되는 것. 이것을 물화 物化라고 한다.
물화의 개념은 내가 주체고 상대가 객체란 인식을 넘어서는 개념으로 나와 상대가 온전히 같아진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나의 소멸을 의미한다. 나를 버려야 상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주체와 대상의 역할이 전도되는 것으로 현실의 질서와 가치관을 뒤집는 것으로 이해 할 수도 있다.
나비가 되어 날아다녔다는 것은 자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소요유편에서 붕새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것과 함께 읽으면 재미있다. 거대한 붕새의 어마어마한 날개짓과 나비의 가벼운 날개짓을 함께 느껴보라고 저자는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