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계획에 없던 책을 대출해 오는 경우가 있다. 내가 찾던 책이 꽂혀있던 칸에 새 책이 보일 때다. 나는 새 책의 빳빳한 질감을 좋아하기 때문에 장르가 나랑 너무 안맞는 책만 아니면 빌려오게 된다. 이 책은 그렇게 만났다.

작가는 NHK아나운서 출신으로 일본의 작가, 평론가, 수필가라고 한다. 출생년도를 보니 울엄마랑 동갑. 올해 팔순이시네. <사는게 뭐라고>를 이어 또다시 일본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구나.

작가는 가족들과 별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권위적이지만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아버지, 평생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식에게만 집착하는 삶을 살았던 어머니와 일찌감치 아버지와 대립각을 세우고 집을 나가 할머니 댁에서 살았던 오빠가 그녀의 가족이다. 그녀 역시 가족과는 심정적으로도 거리를 두고 살았고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다. 그런 저자가 점점 가족에게만 집착하는 일본의 현실을 보며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하면서 현대에 가족의 의미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에세이 형식의 글이다.

그리 새삼스럽지 않고 너무 당연한 말들의 연속이다. 이미 이런 담론은 꽤 있어온 것 같아서 비밀독서단의 신기주작가가 한 이야기를 인용하여 표현하자면 이런게 ˝쌀로 밥짓는 이야기˝다. (쌀로 밥을 짓는다는데 뭐가 놀라운가? 모래가 밥이 된다면 몰라도 ㅎㅎ)


자식을 품에서 일찍 떠나보내야 한다, 교육이란 부모가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세계에서 갈고 닦으며 쟁취하는 것이다, 서로에게 기대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마음껏 기대하라, 언제까지나 옛날의 가족개념이 이어질 수는 없다, 진정한 가족은 핏줄로 이어진 가족을 뛰어넘는 곳에 존재한다, 가족을 안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이다 등등.
살아오면서 가족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전혀 없었던 저자는 가족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에 대해 반감을 느끼면서 진정한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돌아보자고 하는데 틀린 말은 하나도 없지만 그렇게 새로운 담론도 아니라는 말. 그래서 끝까지 읽다보면 그리 길지도 않은 책임데 좀 지루하다.


한국의 수능 풍속을 이야기 하는 대목이 있어서 소개해보자면

# 이웃나라 한국에는 수능이라는 제도가 있다는데 수험생이 시험 시간에 늦을 것 같으면 경찰차가 출동한다고 하고, 합격하면 가족과 이웃, 친구들이 헹가레까지 친다고 한다. 상황이 이런데 과연 압박감을 느끼지 않는 학생이 있을까.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짊어지니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마음의 평안을 제일로 쳐야 할 가족이 오히려 나서서 야단들이다. 입시에 무사히 성공해 곧장 엘리트 코스로 들어서기보다는, 한 번 두 번 실패를 겪어봐야 타인을 배려할 줄 알고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어른으로 성장할 텐데 말이다. (46쪽)

부모의 과도한 기대, 가족의 압박이 개인에게 얼마나 스트레스가 되는지를 말하는 글에서 인용된 예이다. 물론 너무나 당연하고 맞는 말이다. 화목한 가정이라는 환상에 빠지지 말고 개개인의 인격을 세우라는 얘기. 그러면 꼭 핏줄로 이어진 가족에만 집착하지 않고 가까이 있는 이웃과 친구들까지 가족의 개념으로 묶을 수 있다. 가족의 문제가 발생하면 나를 돌아보라. 나를 알고 내 가족을 알면 불화가 생겨도 조율할 수 있고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각 가정마다 문제 없는 가정이 없고, 가정 폭력이나 아동 학대같은 가족에게서 야기 되는 문제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누군가의 가족이란 이유가 그 사람의 삶을 족쇄처럼 묶어놓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가족이라는 병이 그저 나를 돌아보고 화목한 가정이라는 환상을 깨라는 조언이나 한다면 곤란할 듯하다. 그 이상의 대안이 있어야 할텐데 이 책엔 그런 대안은 없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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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0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0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0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5-12-20 16: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찜해놓은지 오래 되었는데 아직 읽지는 못하고 있는 책이랍니다.
`가족`이 병에 대한 치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오던 막연한 생각을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부수고 있으니까요. 읽기도 전에 저도 공감하는데 도대체 가족이 병이 되는 것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좀 더 듣고 싶어서요.
가족은 나의 자존심이자 상처라는, 다른 저자의 어떤 책도 생각나네요.

살리미 2015-12-20 16:52   좋아요 3 | URL
저자가 일단 가족에 대해 상처가 있는 사람이다보니 `가족`에 매여서 자기 자신이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냐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가족의 기대가 내게 스트레스가 되는 것도 사실이고, 내 맘에 안드는 가족 구성원일지라도 평생 끌어안고 가야 하는 짐이 될 수도 있긴 하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다보면 결국 가족이라는 게 환상이 아니라 현대인의에게 꼭 필요한 기본 가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 물론 `가족`의 정의가 현대에는 많이 달라져야 한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저자도 혈연으로 묶인 가족들에게만 집착하는 경우를 경고한 것이고요.)남들이 보기에 건강한 가족을 만들려고 환상에 빠져 현실을 왜곡하거나 집착하는 건 잘못이지만 그래도 결국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회에서 내게 위안을 주는건 혈연이든 아니든간에 어떤 형태로든 내 곁에 있는 `가족`이니까요.

해피북 2015-12-20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늘 마스다 미리의 책을 읽다가 좀 의외스런 글을 읽게 되었어요. 마스다 미리가 도쿄에서 살아보기 위해서 집을 떠나기로 결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늘 자신을 응원해주는 아버지가 이번에도 잘 다녀오라고 쿨하게 이야기해주시니까 마스다 미리가 이렇게 생각하는거예요. `아버지라는 좋은 이미지를 위해서 저렇게 말씀하시는거`라고요. 저는 사실 그 부분을 읽으며 좀 충격 받았어요. 부모라는 입장에서 또 아버지라는 입장에서 큰 딸에게 거는 기대를 강요하기 보다도 늘 괜찮다. 잘하고 있다 응원해주는데도 어떤 이미지일것 이라 생각하는. 그러니까 아버지의 마음은 저렇지 않은데 일부러 저런 모습을 보이는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아서 충격스럽더라고요. 왜 부모님의 마음을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사노요코가 말한 것처럼 한국 사람들은 너무 `인정`에 약하다는 말에 답이 있는걸까요?

살리미 2015-12-20 20:21   좋아요 1 | URL
글쎄요. 자세한 건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일본인의 특성이 반영된 생각이 아닐까요? 사실 일본인들은 자기의 본심을 가족들간에도 잘 털어놓지 않고 사회적인 이미지에 맞게 살아가려는 면이 강하잖아요. 그러면서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고요.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이야기가 일본에서는 충격적일지 몰라도 우리는 그닥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우린 사실 참다 참다 터지는 일본인들보다는 속마음을 그때 그때 많이 털어놓고 사는 편이잖아요. 일본인이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하는 이유도 거기 있는듯 하고요. 마스다 미리도 아버지가 본심은 섭섭하시면서 자식앞에서 내색하지 못하고, 잘 다녀오라고 `멋진 아버지`강박처럼 표현한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해피북님 이야기 듣고보니 저도 이 책 저자의 마음이 더 이해가 가네요.
아! 그리고 이 책 읽으며 저도 마스다 미리가 생각난 부분이 있었는데요~ 일본에선 남편을 주인이라고 표현한다는 걸 마스다 미리 책을 보다가 알았거든요. 이 책의 저자도 자기 남편을 꼭 `반려`라고 얘기하는데 인터뷰 같은데서 자기들이 알아서 `주인`으로 바꿔 놓으면 화를 내면서 다시 `반려`라고 해달라고 한다는 대목이 있었어요. 일본 사람들 아직도 별생각없이 주인이란 말을 쓰는걸 보면 여권신장은 우리가 한 수 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해피북 2015-12-20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맞아요 오로라님^^ `본심은 섭섭하시면서 자식앞에서 내색하지 못하고, 잘 다녀오라고 `멋진 아버지`강박처럼 표현한건` 이라는 말씀처럼 그런 표현이 있었어요. 저는 일본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 못해서 일본인 특성을 몰랐는데 오로라님 덕분에 그런면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문화와 정서가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참에 다른 면들도 알게 되었네요 ㅎㅎ 그리고 저는 남편을 `주인`이라 표현한다는 걸 노하라 히로코의 책 `이혼해도 될까요?를 읽으며 알게 되었는데요. 아마도 제가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쯤 말로써 많은걸 꼬집고 다니느라 정신없었을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으흐흐흐흐~ ㅋㅋ

살리미 2015-12-20 20:40   좋아요 0 | URL
네 ㅎㅎ 해피북님이 절대 가만계시지 않았을거에요.
저는 그새 또 마스다 미리의 책 찾아보고 있었어요. 제가 감동했던 부분이요. ㅋㅋ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마지막 그림에 옆집 아줌마가 날아간 빨래를 주워주시면서 ˝이 옷, 그집 주인양반 거 아니우?˝ 하자 미나코가 ˝아, 맞아요. 우리집, 우리집 남편거예요.˝ 하는 부분이요! ㅎㅎ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라 생각이 났어요.

해피북 2015-12-20 20:49   좋아요 1 | URL
으흐흐~ 저도 방금 책을 들춰보고 왔어요. 덕분에 잊혀졌던 미나코의 고민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도 했고요. 역시 집에 책이 있다는건.. 장소도 많이 차지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요 이렇게 생각날때 바로 꺼내 펼치며 넘기는 이 맛이 최고인거 같아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즐거운 주말 저녁 보내시고 꿀밤 되세요 오호호호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