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잠긴 아버지
한승원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승원 작가는 한국 문단의 어르신 같은 존재이지만 나는 사실 그의 이름만 들어봤을 뿐 글을 읽어보진 못했다. 내게는 오히려 그의 딸 한강 작가가 더욱 친숙하다.
한승원 작가는 올해 77세가 되셨다는데 희수를 잘 넘기라는 아들 딸들의 효의지로 이 책을 펴내게 됐다고 한다. 원로작가들이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이 멋있기도 하지만 확실히 삶에 대해 깊은 안목을 가지게 되는 만큼 더욱 좋은 작품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독자로서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은 비극의 땅 유치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주눅이 든 채 자투리 인간으로 살아온 `아버지가 남로당원` 이었던 한 남자의 삶을 그린다. 실제 작가의 고향인 전남 장흥의 유치면 일대는 한국전쟁이후 `모스크바`라고 불리던 곳으로 북으로 가지 못한 남로당원들이 이 골짜기를 접수하고 토벌대와 빨치산 투쟁을 벌였던 곳이라고 한다. 그곳에 십년전 장흥댐이 생기면서 물에 잠겼다.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아버지 김오현이 시인 아들 김칠남과 함께 고향을 방문하며 아들에게 들려주는 자신의 삶 이야기가 소설의 기본 서사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김칠남은 시를 쓸때는 낭만적인 감성의 식물성 아나키스트가 되고 소설을 쓸때는 이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고 조명하는 도깨비적인 동물성 아나키스트가 된다. 희망버스의 승객이 되기도 하고 촛불 시위를 하다가 물대포를 맞아보기도 하고, 강정마을에서 농성도 해 보았고, 세월호가 가라 앉은 다음 진도의 항구와 서울광장에서 밤을 새워보기도 했다.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이지만 밟혀 죽거나 깨질 줄 알면서도 인간으로 대접받으며 살고 싶다는 자존감때문에 울부짖으며 덤비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김오현은 남로당 골수분자 김동수의 아들로 토벌대에게 할머니와 어머니 네 형들이 모두 몰살당하고 할아버지가 원수들에게 무릎꿇고 빌어서 살려낸 유일한 핏줄이었다.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김씨 집안을 일으키는 것이 일생의 업이 되었고 살림살이를 거덜내고 서울로 올라와 도시 최하층민으로 살면서 자식들을 기르는 동안 그는 자연히 세상에 주눅이 들고 자식들에게도 무조건 죽은 듯이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물처럼 아래로만 흐를 뿐 절대로 거스르지 마라, 관에 대들어보아야 대드는 놈만 다친다, 대대로 흘러온 이 나라 역사가 그렇다는 것이다.


김칠남은 강정마을에 가서 바다를 바라보며 아버지 김오현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 보기로 결심한다. 자기의 감성이 아니라 아버지의 감성, 아버지의 언어로 쓰기로. 그러나 고향 산천을 대할 면목이 없어서 절대로 고향엔 가지 않겠다는 아버지를 김칠남은 이렇게 설득한다.

# ˝아버지, 저는 날아다니는 새나 피는 들꽃이나 하늘의 별이나 달이나, 이런저런 사람들의 가슴속에 들어 있는 슬픔이나 기쁨을 시로 읊어내는 시인이잖아요˝ 하고 나서 ˝저는 아버지의 가슴에 맺혀 있는 것들을 제가 다 가지고 싶어요.˝ 하며 어리광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하는 문학이란 것은 역사의 갈피갈피에 묻혀 있는 어둠을 환한 빛으로 승화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어요.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우리 선조들을 제가 빛 속으로 끌어올려드리고 싶어요˝ (18쪽)

아버지는 오랜 고민끝에 도리질을 하시며 가시길 거부하시다가 그로부터 삼년 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한 해 뒤 봄에 문득 ˝그래, 한번 가보자. 고향에˝ 하신다.

소설에서 `물`의 이미지와 모스크바라고 불리던 고향 마을 유치가 물에 `잠기게` 된 것은 상징하는 바가 있다. 그리고 작가는 세월호 이야기를 계속 언급하고 일깨움으로서 시대의 큰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김칠남이 아버지에게서 듣는 이야기들은 그의 말처럼 아버지가 그에게 물려주는 유형무형의 유산이 되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세상에서 제일 부자다. 독자는 그 값진 경험을 함께 하며 아버지를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고 슬픈 역사를 이해하게 된다.


아버지 김오현이 절망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살아온 것, 치열한 이념갈등과 대립의 세상에서 자기를 지키고 건사해 온 지혜는 바로 할아버지가 들려주신 이 한마디였다.

˝장마철의 곰팡이를 이기는 것은 가뭄이고, 가뭄을 이기는 것은 번개와 우레고, 번개와 우레를 이기는 것은 햇볕이고, 그 햇볕을 이기는 것은 꽃그늘이고, 꽃그늘을 이기는 것은 밤이고, 밤을 이기는 것은 잠이고, 잠을 이기는 것은 아침이고, 아침을 이기는 것은 지심이고, 천심이라는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5-12-23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물성 아나키스트와 동물성 아나키스트의 조화...새길 만 합니다.
빵을 부풀리는데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저 쓰이는 이스트로 만족해서는 안 되겠지요...

살리미 2015-12-23 06:51   좋아요 0 | URL
네, 소설 첫부분에 김칠남을 묘사하면서 나오는데 되새겨볼 수록 좋은 말 같더라고요^^ 첫부분부터 강렬한 인상이 든 소설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