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동안 도미니카의 역사를 함께 공부하느라 꽤 시간이 걸렸다. 아투에이에서 시작해서 마리아 몬테즈까지 지구의 반대쪽에서 분주하게 벌어졌던 역사를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이 미안해졌다. 우리의 경우도 그러했듯이 원치않은 침략과 원치않은 생소한 문화들의 유입은 그 안의 사람들의 정신을 공허하게 하고, 황폐하게 하고 불안하게 한다. 당장 세상이 끝나도 무엇도 이상할 게 없는 나날은 정신적 공황을 낳는다. 그럼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환상적이고 마술적이다. 그러니 중남미 붐소설의 탄생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점일 수도 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그렇지만, 정치적인 부자유는 다만 '정치'적인 부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 전반, 그러니까 울고 웃는 것, 먹고 자는 것, 자신과 타인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 그래서 사랑하는 것, 사랑해야 하는 것. 모든 부분이 정치다. 
트루히요의 어처구니 없는 독재와 도미니카에서의 삶, 그리고 디아스포라. 어디에도 발을 푹 담굴 수 없는 이민자의 삶. 이런 세상이야말로 SF 이고, 판타지이고, 롤플레잉 게임인 것을, 어찌 오스카만을 탓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많은 실패의 경험들과 내쳐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오스카의 짧은 삶이 진정으로 놀라운 삶이었다고 감탄할 수 밖에 없다.   

 

 우리글의 문장이 읽고 싶어 한국소설을 들었다. 첫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한 문장 한문장을 곱씹듯이 되새김하며 읽었다. 이를테면 시작부터 이런 것들.  
'거대한 흰 짐승이 바다로부터 솟아올라 축축하고 미세한 털로 뒤덮인 발을 성큼성큼 내딛듯 안개는 그렇게 육지로 진군해왔다.' 
역시 한국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그저 이야기로만 끝날 수가 없다. 이야기와는 거의 별개로 단어가 하나의 문장이 되어 군무를 춘다. 그 미세한 리듬과 떨림을 피부로 느끼며 읽어야 하기 때문에 한국소설은 쉽게 읽히는 듯 해도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래도 <도가니>는 이야기가 좀더 강할까 싶어 들었던 책이었는데, <무진기행>의 안개 냄새가 진득하게 남아 그마저도 쉽지가 않다.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표지판을 기시감을 느끼며 또 만나는 일은, 그리 유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속이 상하고 참담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편지에 희망을 걸어 본다. 수많은 연두와 유리들이 힘내서 살고 있을 세상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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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9-10-14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이런 글에 추천이 없을까요!!!!일빠로 추천 답니다.ㅎㅎ저도 며칠전에 오스카 와오의,,,,를 주문은 했는데 아직 읽진 못했어요~. 덕분에 감탄하면서 읽을 기대를 하니 좋은걸요~.^^

애쉬 2009-10-14 12:57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나비님. 나비님 덕에 늘 신이 난답니다. ^^
오스카 와오에 대한 나비님의 이야기도 듣고 싶네요.

비로그인 2009-10-14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들은 제 마음을 읽고, 제가 들여다 보는 순간 책들도 저를 들여다 보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어쩔 땐, 어떤 책을 읽는지가 곧 내가 어떤 상황인지를 알게 해주는 경우도 있었지요. 이 책들은 애쉬님께 어떤 책들일까요.

애쉬 2009-10-16 10:54   좋아요 0 | URL
저는 오히려 제 환경과 기분에 따라 책들을 너무 다르게 읽어 탈이라고 생각하곤 했는데요, 쥬드님 말씀처럼, 정말 책들이 빤히 저를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책장에 꽂힌 책들 중에서 이 책을 꺼내드는 순간, 아마도 그 순간부터가 저를 보여주는 순간이겠지요.
 
[문학] 세상이 잘못됐다고? 배명훈의 <타워>

이 글을 리뷰가 아닌 페이퍼로 쓰는 이유는, 리뷰에 쓰고 싶었던 많은 말들이,  
이미 다른 이들의 리뷰에 가득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글,  

<타워>를 읽다보면 그를 '장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거나 그저 '대안'으로 치부하기에 곤란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활기 넘치고 신선한 아이디어들, 나이브한 감이 없지 않으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 혹은 대안을 향한 탐구. 하여 그가 추구하는 '재미'라는 것이 그저 허무맹랑한 사변이나 궤변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절묘하다고 얘기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뻔한 여러 상황 설정들을 웃으며 즐겁게 볼 수 있었던 건, 위에서 말한대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 때문이었다. 한해 두해 지나갈수록 재확인하게 되는 삶의 가치는 역시 인간.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있는 세상, 인간으로서 해야하는 일들, 인간이라면 마땅히 느껴야 하는 감정.
이런 마음가짐을 느끼게 하는 작가라면, 늘 기다릴만하다. 위성 사진 위 무수히 많은 좌표들을 하나씩 뒤져서라도 찾아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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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9-09-23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책 읽어 보고 싶은걸요!!

애쉬 2009-09-24 09:40   좋아요 0 | URL
깜짝 놀랐어요. 나비님 사진인 줄 알고. ^^
즐겁게, 따뜻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예요.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 - 소희와 JB 사람을 만나다 - 터키편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09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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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 내 삶은 조금 변했다. 조.금. 이라고밖에 쓸 수 없는 것은, 아직도 개인적인 내 시간에 대한 욕심을 거의 포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고, 감사한 시어머니 덕에 육아에 관한 대부분의 의무를 행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처럼 아이를 위해 희생하며 살지도 않은 내가, 삶이 조금 변했다고 얘기하는 게 스스로도 민망스럽다. 앞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점에서 더욱 민망스럽다.  

그래도 달라졌다. 물리적인 생활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태도, 사람들을 보는 태도, 세상을 보는 태도, 삶을 보는 태도가 달라졌다. 오소희, 그녀가 말했듯이,  이전엔 남과 다른 것을 사랑했지만, 이제는 남과 같은 것에도 진심으로 눈물이 나올 때가 있다.(272) 이제 겨우 10개월된 아이를 가진 초보엄마일 뿐이니 경이롭다는 말까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문득 놀라울 때가 있다. 아이를 통해 바라본 세상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이 놀랍고 아름다운 세상을 얼마나 보여주고 싶은지. 중빈이가 "엄마, 오늘 정말 재미있었어." 하고 말할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벅찼을지 알고도 남겠다.  

한 사람이 아니라 1.5인분의 사람이 되어 산다는 것은 분명 기쁘고 벅찬 일이지만, 또 얼마나 버겁고 두려운 일인가. 아이의 해맑은 눈을 볼 때마다 앞으로 이 아이가 만나게 될 세상은 때론(아니, 대부분은) 비인간적이고 삭막한 곳이라는 걱정이 떨쳐지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무사히, 온전히 자라난 것이 새삼 놀라울 만큼 아이의 앞날이 걱정되고 또 걱정된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이 모든 두려움을 책임지고 가라는 뜻이었을텐데, 나는 참 별다른 준비도 없이 아이를 맞았구나 하는 자책까지 덧붙여. 
그러나 이 모든 수심들도 엄마가 되는 통과의례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어느새 넘겨진 책장에서 선배엄마인 그녀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또 내가 어떻게 자랐는가를, 얼마나 많은 미소와 따스한 손길과 보살핌 속에 성장하여 오늘날 이렇게 존재하게 된 것인가를 감사히 반추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이전에 내가 반추했던 것들이 상처와 얼룩에 대한 기억이었다면, 이후에 나는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면서 내가 받은 사랑의 기억을 떠올리고 비로소 화해와 치유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274) 

물론, 나는 이 정도로 자라지 못했다. 만족할만큼 무조건적인 사랑을 아이에게 보내지도 못했고, 화해와 치유의 시간을 오롯이 갖기엔 아직도 번잡스러운 구석이 많다. 하지만, 나도 10개월이 막 지난 아들과 함께 흙을 만지고 개미를 만지고 돌맹이를 만지고 싶다. 아이를 그네에 태우고 별님과 인사하고 싶고, 털썩 잔디에 앉아 놀고 싶다. 그래서 아이가 느끼게 해주고 싶다.  꽃잎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고양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밥이 얼마나 맛있는지. 나눔이 얼마나 행복한 건지. 
그러니 중빈에게 한 그녀의 말은 내가 내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들아, 세상에는 유희가 생략된 유년을 보내야 하는 아이들도 있단다. 따스함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단다. 네게는 세 살부터 시작된 이런 여행이, 한평생을 다해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사치가 되는 사람들이 많이많이 있단다. 나는 네가 그런 사람들을 부단히 많이 보아서, 끝없는 속도전에서 비롯되는 초조와 이기심으로 차갑게 마음이 식어버렸을 때마다 스스로 발광하는 태양처럼, 스스로 네 마음을 뜨뜻하게 덥힐 수 있기를 바란다. 가진 것을 느끼고, 가진 것에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으로부터 나누고, 함께함으로써 더 많이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융숭 깊은 사람으로 자라주렴. 네가 살아 있는 한 온 세상이 너의 것이다. 몸과 마음을 담그고 느끼거라. 그 안에 네가 안아줄, 너를 안아줄 모든 것이 다 한데 어우러져 있단다.(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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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9-06-30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반가와 우선 추천 먼저~.ㅎㅎ
지금 나가야 해서 리뷰는 담에 읽을께요~.^^;; 잘 지내시지요?^^

애쉬 2009-06-30 19:10   좋아요 0 | URL
어머나, 댓글이 금방 붙어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나비님,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감사드리구요, 더운데 건강 조심하세요~
 

생각지 못한 곳에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일이 종종 있다.  
나선형의 계단이 눈 앞에 빙 둘러쳐져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듯한.  
<긴 여행의 목표>의 시릴의 말대로, 미래의 시간을 기억 못할 리가 없다, 는 명제의 증명처럼.

그런 세계가 미하엘 엔데의 글 속에서 현실감을 갖기 시작한다. 
절벽 속에 숨어있는 대저택, 4면이 모두 똑같은 기이한 집처럼
시각적 감각을 통해 공간이 존재감을 갖고, 나아가 현실이 된다.  
별스러울 것도 없는 일상의 부분들이 새로운 세계로 이어지는 열쇠로 변하는 순간,
그 놀라운 감동의 경험을, 미하엘 엔데가 들려주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잠들기 전 주문처럼 쥐고 잔다.
잠들기 전 읽는 이 책은, 꿈 속에서 나를 그 새로운 세계로 반드시 데려다 줄 것이다. 
어젯밤 꾸었던 순백의 눈덮힌 세상의 꿈처럼, 그렇게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주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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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여의 비담임 시간을 보내고, 나는 올해 다시 고3 담임이 되었다. 
고3이라는 시기를 좋아하는 탓도 있고,  
아이들과의 시간을 즐겨하는 탓도 있지만,
오랜만의 담임은 꿀처럼 달다. 
물론 7시 30분부터 10시까지 꼬박 학교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피곤하긴 하지만...
예전에 고3 담임을 하면서 <밤의 피크닉>을 읽었던 기억이 늘 가슴에 남아서인지,
나는 아이들이 반짝반짝 거리는 모습이 참 좋다. 
게다가 이번엔 구성원이 너무 좋아서, (2003년 이래로 이렇게 괜찮은 아이들만 똘똘 모아진 반은 처음)
정말이지 교실에 들어가는 그 순간이 참으로 즐겁다. 
아이들과 함께 돌려쓰는 교실일기를 막 쓰다 나온 참이어서 그런지,
기분이 몰랑몰랑하구나.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눈만 마주치면 방실방실거리는 아이가 내 아이라 참 행복하다.  
기어가는 건 달인의 경지이고, 지금은 잡고 일어서려고 애쓰는 중이다.

매일매일이 행복한데, 사실 좀 피곤하긴 하다.^^ 
시간이 늘 부족해서. 

 그간 가노 료이치의 <제물의 야회>도 읽었고,
어슐러 르귄의 <로캐넌의 세계>도 읽긴 했는데,  
마음을 가다듬고 컴퓨터에 앉아
리뷰를 쓸 시간을 찾지 못해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리뷰는 못 쓰고 넘어간다.
리뷰는 못쓰게 되어 그 책들에게 미안하고,
책을 읽은 시간의 나에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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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9-04-28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기어가는 달인의 경지에 잡고 일어서려 한다니!!!!정말 세월이 빨라요~.^^
그런데 학교에서 그렇게 오래 계시면 아가는 어떻게 해요?????ㅠㅠ
물론 잘 보살펴 주시는 분이 계시겠지만,,,,
암튼 근황과 책들,,,거기에 음악 이야기도 있으려나 했는데,,,^^;;;;
시간이 없더라도 잘 지내시고 아이도 건강하고,,,기쁘네요~.

애쉬 2009-04-28 11:36   좋아요 0 | URL
월령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는 것 같긴 해요. ^^
아이는 저녁 시간이나 야자시간에 짬을 내서 보고 와요. 다행히 시댁이 집 바로 옆이고, 직장도 가까워서요, 훌쩍 다녀오면 되거든요.
저는 복을 많이 받아서, 시어머니가 너무 좋으세요. 제가 도움을 많이 받죠.

음악은 늘... 망설이게 되네요.
듣는 음악과 보는 음악이 또 달라서 유튜브도 딱히 성에 차질 않더라구요.
계속 궁리 중이예요.
저도 음악을 못 올리니, 페이퍼 쓰는 게 예전같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