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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 - 소희와 JB 사람을 만나다 - 터키편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09년 4월
평점 :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 내 삶은 조금 변했다. 조.금. 이라고밖에 쓸 수 없는 것은, 아직도 개인적인 내 시간에 대한 욕심을 거의 포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고, 감사한 시어머니 덕에 육아에 관한 대부분의 의무를 행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처럼 아이를 위해 희생하며 살지도 않은 내가, 삶이 조금 변했다고 얘기하는 게 스스로도 민망스럽다. 앞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점에서 더욱 민망스럽다.
그래도 달라졌다. 물리적인 생활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태도, 사람들을 보는 태도, 세상을 보는 태도, 삶을 보는 태도가 달라졌다. 오소희, 그녀가 말했듯이, 이전엔 남과 다른 것을 사랑했지만, 이제는 남과 같은 것에도 진심으로 눈물이 나올 때가 있다.(272) 이제 겨우 10개월된 아이를 가진 초보엄마일 뿐이니 경이롭다는 말까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문득 놀라울 때가 있다. 아이를 통해 바라본 세상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이 놀랍고 아름다운 세상을 얼마나 보여주고 싶은지. 중빈이가 "엄마, 오늘 정말 재미있었어." 하고 말할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벅찼을지 알고도 남겠다.
한 사람이 아니라 1.5인분의 사람이 되어 산다는 것은 분명 기쁘고 벅찬 일이지만, 또 얼마나 버겁고 두려운 일인가. 아이의 해맑은 눈을 볼 때마다 앞으로 이 아이가 만나게 될 세상은 때론(아니, 대부분은) 비인간적이고 삭막한 곳이라는 걱정이 떨쳐지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무사히, 온전히 자라난 것이 새삼 놀라울 만큼 아이의 앞날이 걱정되고 또 걱정된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이 모든 두려움을 책임지고 가라는 뜻이었을텐데, 나는 참 별다른 준비도 없이 아이를 맞았구나 하는 자책까지 덧붙여.
그러나 이 모든 수심들도 엄마가 되는 통과의례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어느새 넘겨진 책장에서 선배엄마인 그녀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또 내가 어떻게 자랐는가를, 얼마나 많은 미소와 따스한 손길과 보살핌 속에 성장하여 오늘날 이렇게 존재하게 된 것인가를 감사히 반추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이전에 내가 반추했던 것들이 상처와 얼룩에 대한 기억이었다면, 이후에 나는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면서 내가 받은 사랑의 기억을 떠올리고 비로소 화해와 치유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274)
물론, 나는 이 정도로 자라지 못했다. 만족할만큼 무조건적인 사랑을 아이에게 보내지도 못했고, 화해와 치유의 시간을 오롯이 갖기엔 아직도 번잡스러운 구석이 많다. 하지만, 나도 10개월이 막 지난 아들과 함께 흙을 만지고 개미를 만지고 돌맹이를 만지고 싶다. 아이를 그네에 태우고 별님과 인사하고 싶고, 털썩 잔디에 앉아 놀고 싶다. 그래서 아이가 느끼게 해주고 싶다. 꽃잎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고양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밥이 얼마나 맛있는지. 나눔이 얼마나 행복한 건지.
그러니 중빈에게 한 그녀의 말은 내가 내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들아, 세상에는 유희가 생략된 유년을 보내야 하는 아이들도 있단다. 따스함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단다. 네게는 세 살부터 시작된 이런 여행이, 한평생을 다해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사치가 되는 사람들이 많이많이 있단다. 나는 네가 그런 사람들을 부단히 많이 보아서, 끝없는 속도전에서 비롯되는 초조와 이기심으로 차갑게 마음이 식어버렸을 때마다 스스로 발광하는 태양처럼, 스스로 네 마음을 뜨뜻하게 덥힐 수 있기를 바란다. 가진 것을 느끼고, 가진 것에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으로부터 나누고, 함께함으로써 더 많이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융숭 깊은 사람으로 자라주렴. 네가 살아 있는 한 온 세상이 너의 것이다. 몸과 마음을 담그고 느끼거라. 그 안에 네가 안아줄, 너를 안아줄 모든 것이 다 한데 어우러져 있단다.(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