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쉽지가 않다. 이 곳을 버리는 것이.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곳도 아니었고,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는 곳도 아니었고, 살아가는 이야기 쓰는 블로그도 따로 있는데, 그저 지금 읽는 책에 대해 끄적끄적 거릴 공간일 뿐인데. 서재가 뭐라고. 책을 한권한권 읽을 때마다 의미없는 감상을 적을 곳이 절실해서, 몇번을 발걸음을 향했다가 돌리곤 했다.
알라딘 불매운동에 참가하면서 개인적으로 목표한 지점이 있기도 했고, 배설처럼 감정을 쏟아내는 일들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사실, 내가 받은 상처보다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지켜보는 상처가 컸지만. (무엇보다 바람구두님의 글을 서재에서 더이상 볼 수 없다는 건 굉장한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감정을 여과없이 토해내는 일이, 내가 서재에서 쓰고 있는 글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들 들어 자중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다짐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여러 다짐들을 매끄럽게 맺음한 상태도 아니고, 새로 써나갈 글들도 여전히 감정의 배설에 지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어느 한 책을 만났던 당시의 내 감정이 소중하고 안타까워서 차마 이 공간을 버리질 못하겠다. 참, 변명이 구질구질하기도 하다.
그렇게, 나는 천연덕스럽게, 다시 시동을 건다.
지난 주부터 읽었던 책들을 정리해 보면,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책은 요시다 아키미의 신작 만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시리즈1,2권 <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 <한낮에 뜬 달> 이다. 워낙에 편애하는 작가이기도 하고 오랜만에 신작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넘치는 감정표현들이 다듬어지고 원숙해져서 네 자매의 이야기가 은근하게 마음에 남는다. 특히 가마쿠라 지역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노골적으로 그려져 있어 가마쿠라의 바닷바람과 언덕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천천히 다시 읽고 리뷰를 쓰려고 생각 중이다.

만만치 않게 좋았던 책, 지금까지도 마음을 흔드는 책은 존 어빙의 <사이더 하우스>. 별다른 기대 없이 손에 들었다가 한 동안 호머와 닥터 라치의 눈빛과 손끝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웠던 소설이다. 덕분에 시간을 뛰어넘는 사람의 삶 이야기의 재미에 푹 빠져 책장의 책들을 다시 훑어보고 있는 중이다. 역시, 여건이 되면 리뷰로 정리해 보고 싶다.
그 외에 스쳐 지나간 책들로는 이누이 구루미의 <이니시에이션 러브>.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는 북스피어의 기치를 좋아하고 공감하지만, 이 책은 다소 예외.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었다. 무엇보다 문장이 별로다. 엔터테인먼트 소설을 표방하고 있다고 해도 글맛이 나지 않는다면 재미를 느낄 수 없다. 글 외적인 어떤 장치만이 존재한다면, 결국 속임수, 트릭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이현의 <너는 모른다>는 한국소설의 글맛에 장르적 재미가 더해졌다는 면에서는 후한 점수를 주겠지만, 다소 밋밋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전체적으로 무채색의 느낌을 주는 이야기가 화려하고 강렬한 표지로 포장되어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도 들었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나 인물들의 구성은 훌륭했지만 긴 이야기를 끌고 가기엔 여기저기 느슨하다. 
소설을 읽는 틈틈이 소설이 아닌 책들도 읽었다. 주로 미술에 관계된 책들이었는데, 서경식의 <청춘의 사신>은 이전에 읽었던 <서양 미술 순례>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좋다. 일본의 이런저런 근대 회화를 볼 수 있었던 점도 좋았다. 최영미의 <화가의 우연한 시선>은 그다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녀의 첫 미술책인 <시대의 우울>을 워낙 인상깊게 읽었던 탓도 있고(너무 읽은지 오래되어서 좋은 감상만 남은 건지 몰라도), 높임말로 강의하듯 쓴 말투는 별로 적응이 되지 않는다. '~지요'로 매번 문장이 끝나다 보니 나의 리듬으로 글이 읽히질 않아서 한참을 고생했다.
마지막으로 읽은 곽아람의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는 책과 그림이라는 인상적인 연결점을 가지고 있는 책이어서 오래 기다리다가 집어든 책이었는데, 그녀의 글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화되기 어려운 감정적인 어투를 무척 싫어하는데 (내가 감정이 철철 넘치는 지저분한 글쓰기를 해서) 첫 장부터 그런 문장들이 자꾸 눈에 걸리다 보니 아무래도 심사가 꼬인다. 담백한 글이 좋은데 말이지. 내 경험상 말하고 싶은 주제가 명확하지 않거나 내용이 빈약하면 괜시리 문장만 꾸며대곤 하는데, 확실히 이 책도 주제가 명확하고 내용이 확실한 장은 문장도 좋다. 각 장에 따라 기복이 있고, 무엇보다 치명적인 건 내가 아직 읽지 못한 책에 대한 이야기는 감히 펼쳐볼 수가 없다. 나중에 그 책을 읽을 때 감정적으로 방해가 될까봐. 그래서 아직 다 못 읽고 있다는 이야기.


오늘부터는 왕멍의 <변신인형>과 요네하라 마리의 <마녀의 한 다스>를 시작한다. 온통 봐도 소설 아니면, 에세이. 다 문학밖에 없다. 문학이 아닌 책들도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