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네이버 뉴스에 이런 기사가 떴다. 15살 여학생이 45살인가 하는 여교사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폭행했다고. 시작은 여교사가 급식지도를 하면서 여학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뒤로 가서 서있으라고 한 듯 한데, 이에 불만을 품은 여학생이 뒤돌아선 여교사의 머리채를 잡고 때렸다는 것이다. 현장에 있어봐야 진실여부를 알 수 있겠지만 이같은 기사가 하루에 한건씩 뉴스에 뜨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반대로 교사가 학생들 앞에서 자위행위를 했다는 등 문제있는 교사에 대한 기사들도 가끔씩 뜨곤 한다. 어느 집단이건 꼴볼견은 존재하고, 그 배경이 학교와 교실이 되었다고 해서 예외는 될 수 없다. 

  뉴스로만 보고 듣던 사건이 내가 근무하는 그곳에서 벌어졌다. 학교에 경찰이 들이닥친 것이다. 나는 당시 수업 중이었던지라 옆반에 있던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는데, 3학년 여학생 하나가 수업중에 선생님을 향해 글로 담아내지 못할 욕을 퍼붓고 깽판쳤다는 것이다. 두 시간에 걸쳐서. 앞 시간엔 욕을 하고, 뒷시간엔 욕과 더불어 선생님을 향해 의자를 집어던졌다고 한다. 그리곤 경찰에 신고해서 선생님을 데려가라고 했나보다. 작년부터 좀 문제있는 아이다 싶어 말이 많았다. 어르고 달래서 학교에 문제 없이 잘 다니도록 했는데 결국은 한 건 했다. 시작은 역시 꾸지람이었다. 수업태도의 문제를 지적한 듯 한데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이 학교와서 많이 느끼는 바지만 대개의 많은 아이들이 일단 기분이 나쁘면 자신이 잘못했건 안했건 간에 나를 기분 나쁘게 만든 그 사람이 먼저 잘못한 것으로 간주하고 들어간다. 잘못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적해주면 머리로는 받아들일지 몰라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진 않는다.

  이건 오늘 내게 있었던 사건이었다. 2학년 한 남학생이 내 수업 때마다 환타지 소설을 보길래 오늘은 미리 빼앗고 시간이 끝나면 주겠노라 했다. 그랬더니 이때부터 억지를 쓰기 시작하는데 보다 걸리면 일주일 압수이고, 지금 빼앗고 주면 한시간만 못보는 것이다, 라고 말하며 설득을 했고, 설득이 먹혔다. 이런걸 설득해야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겹다. 어쨌든 수업이 끝났고 나는 수행평가와 관련해 앞에 나온 다른 학생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지우개 조가리가 여러개 날아왔다. 맨 앞에 앉은 그 녀석이 저쪽에서 지우개를 뜯어내 던지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왜 그러냐, 그랬더니 자기가 계속 불러 책을 달라고 했는데 보지 않았다고 내 시선을 끌기 위해 지우개를 던졌다는 것이다. 순간 당황을 넘어서 황당했지만. 옆에 있는 여학생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선생님 얘 아까부터 선생님 불렀어요. 진짜에요. -_-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

  하나 더. 3학년 한 여학생이 수업 시간에 핸폰으로 게임을 하길래 집어넣으라 말했다. 하지만 바로 꺼내어 다시 게임을 하기 시작했고, 초반엔 못본척 했지만 계속 하고 있길래 애초 말했던대로 압수하고 7일 후 돌려준다 했다. 달라 달라 계속 떼를 쓰다가 결국 나를 쫓아와 왜 안주냐고, 그럼 날짜라도 줄여달라고 화를 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_- 어휴. 당연히 수업시간에 핸드폰은 안되고, 더군다나 시작할 때 지적해서 넣으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꺼내어 게임을 했으니 당연히 잘못한거 아니냐, 했지만 막무가내다. 자기자신만 빼앗겨서 기분 나쁘고 잘못한건 생각지 않는게다.

  정말 기본이 안된 사례들을 매일매일 경험한다. 나름 학생들의 입장에서 생각해서 배려한다고 이거저거 다 봐주고 최대한 존중해줬더니 돌아오는건 더 큰 요구다. 내 교육철학이 잘못되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집에 돌아와 패닉상태에서 케이블 티비를 돌리며 멍하니 <공공의 적2>를 봤는데, 강철중 검사가 이런 말을 하더라. "우리가 개냐. 개들 그러잖아. (조용히) 저리가, 그러면 좋다고 따라오고, (무섭게) 이리와! 그러면 도망가고." 여지껏 (조용히) 이리와 그랬는데, 새학기가 시작되면 (무섭게) 이리와! 해야될까보다. 결국 아이들이 기본을 지키는건 그나마 무서운 선생님 앞에서니까.  공맹의 덕치보다는 한비자의 법치가 더 끌리는 요즘이다.

*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앞에 있던 선생님께서 본인의 경험을 말씀하시더라. 어떤애가 계속 자신을 부르길래 가봤더니 그 학생이 떨어뜨린 프린트를 주워달라는 거였다고. 왜 불렀는데 빨리 안오고 안주워주냐고 따졌다고. 할 말을 잃었단다. 듣고 있는 나도 숨이 막힌다. 거의 매일 나눠준 프린트가 내 앞에 떨어지면 주워다가 주곤 했는데 어떤 녀석은 두 손으로 받으며 고맙습니다, 그러고 대개의 아이들은 아무 말 없으며, 적지 않은 아이들이 저 같은 반응을 보이니까. 선생님들이 강남지역으로만 가길 원한다는 기사를 봤을 때 속으로 그 분들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는데 이제는 고개를 끄덕인다. 좀 더 나은 근무환경이란 교사들에게 공부는 못해도 기본은 최소한 지킬 줄 아는 아이들이 있는 곳이다. 많은 분들이 강남지역 아이들은 최소한 그건 되어있다고 느끼는 듯 하다.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 학교 내에서 체벌을 금지하는 것이 과연 옳은일인지 의문이 든다. 예전엔 교단에 서면 절대 매는 들지 말아야지 했는데, 대화와 설득이 먹히지 않고 모든 것을 잔소리로 받아들이고 자신에 대한 억압으로 받아들이는 '다수' 의 학생들을 대함에 있어 더 이상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생각한 방법은 모두 동원해봤지만 먹히지 않았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매 인데, 몇 차례 가볍게 한 두대 때려본 바로는 효과 있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는데 일단 선생님과 수업시간을 싫어하게 되고 공부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이다. (하긴 공부로부터 먼 건 원래 그런 아이들이니 크게 달라지는건 아니다. 다만 공부를 가까이 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 문제다.) 수업시간에 별 탈 없이 딴짓을 하든 뭘하든 조용히 시킬 수는 있지만 그 학생이 공부하도록 하는 욕구로부터는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즉 그저 무서워서 조용히 있을 뿐이지 자기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뉘우치고 조용히 있는건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매도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다. 다만.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문제있는 소수를 조용히 시킬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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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9 2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렌초의시종 2007-06-19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지 암담하고 답답해요...... 그러고보면 선생이 된다면 아예 아이들에 대해서 많은 걸 포기하자고 다짐하는 저 자신이 한심스럽도록 다행스러울 때가 있어요......

마노아 2007-06-19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학교도 비슷하지만 그곳이 좀 더 심해 보이네요^^;;; 프린트 나눠주고 남으면 저를 불러요. 남았다고..;;;; 그럼 네가 들고와라! 하면 그때 들고 나오죠.
오늘은 한 여학생이 아프다고 했는데, 사실 믿음이 안 가는 녀석이었지만 정말 아플 수도 있으니 엎드려 있으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엠피쓰리를 듣고 있더라구요. 7일간 압수!했더니 자기 것 아니라고 엄청 항의하더군요. 아무튼 뺏어서 갖고 왔는데 여러모로 괘씸했어요. ㅜ.ㅜ

2007-06-19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잘코군 2007-06-19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닥님 / 네...
로렌초의 시종님/ 곧 님도 현장을 경험하겠지요? 제가 너무 의욕이 강해서 많은걸 알려주려하고 많은 이야기를 해주려고 하거나 학생들을 지나치게(?) 인간적으로 대하나봅니다. 갑자기 고등학교 때 '피바다'라 불리우는 젊은 남자선생님이 생각나네요.사실 부드러우신 분 같았는데 학생들 사이에선 악명 높았죠.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이었던 '학주'도 알고봤더니 눈물 많고 부드러운 남자였고.

정아무개님 / 저도 생각할 때마다 답답하고 멍해집니다. 오늘은 직업을 바꿔야 하나 생각도 해봤습니다. 나약한 생각이겠죠.

마노아님 / 그래도 들고오라면 들고오나봐요. 지시를 해서 말을 들으면 그나마 낫죠. 그런 학생도 있지만, 언제나 문제는 극단적인 일부에 의해서 발생하는 법이니까요. 거의 대부분이 기분이 좋고 나쁨의 여부가 옳고 그름의 판단 잣대가 되더군요. 옳고 그름과 기분이 나쁘고 좋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듯 합니다.

데이드리머님 / 매일 힘겹습니다. 수업 준비를 하는 것도 열심히 들으려하는 애들이 많아야 의욕이 생기고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해줄까를 고민하는거지, 순 저런 애들만 있는 교실에 가서는 그런 이야기해줘봐야 듣지도 않는데, 이런 생각이 먼저 앞섭니다. 힘듭니다. 매 말고는 방법이 없는건지. 도덕시간에 아무리 대화와 설득, 합리적 사고 등등을 말해봐야 소용 없습니다. 그냥 진도 나가기 위한 설명일 뿐이죠.


멜기세덱 2007-06-19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들을 확 그냥 다 잡아 패부러!ㅋㅋ 아무래도 이건 아니죠? 이런 이야기들 볼 때마다 우리나라 선생님들이 참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됩니다. 모든 아이들을 감싸안고 바람직한 성인이 되도록 도와주는 선생님이 되는 길은 참 멀고도 험한길이지만 말이에요.ㅎㅎ

2007-06-19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잘코군 2007-06-19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세덱님 / 정말 심정은 그러고 싶었습니다. 전에 있던 학교는 자연스러운(?) 체벌이 어느 정도 허용되는 곳이었고, 실제로 선생님들께서도 - 주로 남자선생님 - 안되는 녀석들은 불러다가 꽤 아프게(?) 때리곤 했습니다. 그럼 잘못하면 맞을걸 알기 때문에 다음부터는 잘못하면 잘못했다고 시인은 하더군요. 잘못을 반복해서 저지르더라도 최소한 시인할 수 있는 정도라면 그 아이는 기본은 됐다고 봐야죠. 매가 무서워서 그러는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그러는건지 모르지만. "모든 아이들을 감싸안고 바람직한 성인이 되도록 도와주는 선생님이 되는 길" 이란건 그냥 이상인가봅니다. 친구처럼 수다도 떨어주고, 최대한 자유를 허용해주고, 청소할 때면 같이 도와주기도 하고 그랬지만, 또 그러면서 제 마음도 편했지만, 최근 그네들을 보면서 이건 아니구나 싶습니다. 벌써 경력이 꽤(?) 되었는데 매번 이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번엔 그러지 말아야겠습니다. 결국 통하는건 강제와 매 인가 봅니다.

이잘코군 2007-06-19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종님 / 교생 선생님은 학생들에겐 삶의 활력소지요. 그리고 교생으로 나가 좋은(?) 경험하고 오신 분들은 희망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지요. 꼭 교단에 서려고. 그런데 6개월 이상을 같은 아이들과 접하는 교사가 되면 다른가봅니다. 나름 젊고 부드럽게(?) 생긴 저는 초반엔 아이들에게 신선함의 대상이지요. 하지만 그 기간은 3개월을 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초반에 절 좋아하고 그래서 저도 의욕을 갖고 가르치고 더 자상하게 대해주지만 그게 함정이더군요. 거기 빠지면 이제 복구불가능의 영역으로 넘어오게 됩니다. 지금과 같은. -_-

2007-06-19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6-19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아이들 3명을 소위, 특목고에 보냈는데.. 아이들은 선생님들을 존경하고 선생님들께서는 아이들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학교다운 학교였지요. 수준에 맞는 아이들을 모아 가르쳐야 제대로 교육이 됩니다. 외고 과학고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매로 다스리거나 아이들이 선생님께 불손하게 대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실력을 갖춘 선생님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authority'와 아이들의 그런 선생님들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아이들 스스로의 자신에대한 자부심이 아이들의 태도를 바르게 하는 듯 했답니다. 저는 그런 풍경을 한 10년간 아이들 학교 보내며 지켜봤답니다. 특목고는 학교다운 학교들입니다.


LAYLA 2007-06-19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잘하면 예의도 바를까요? 공부 잘하는 애들은 예의가 바르다기보단 '눈치'가 빠르다고 여겨집니다만^^ 수행평가도 있고..부모님 체면도 있고(학생성적 좋으면 부모님이 사회적으로 좋은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죠 특히 강남이면 ㅋ)선생님에게 잘해서 아쉬울거 없다는걸 잘 꿰뚫고 있는 애들이죠. 모범생 가면이 도움이 많이 된다는거 잘 알고 있고. 제가 너무 비관적인걸까요? 교사의 입장에선 이러니 저러니 가면이든 뭐든 공부잘하고 말 잘듣는 애가 편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진실된 마음이 없는 교사와 학생 관계라니 좀 안타깝네요.

비로그인 2007-06-20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목고의 특별한 풍경 중의 하나는 '실력이 없는' 선생님은 아이들이 인정하질 않더군요.
실력없는 선생님들은 특목고에서 오래 버텨내질 못합니다. 아이들이 노골적으로 무시합니다.
또 선생님들은 공부 안하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잘하는 아이들하고 공부해 나갑니다. 따라올려면 따라오고 놀려면 놀아라지요. 공부에 관하여 철저히 자율에 맡깁니다. 요는 대학 스타일이지요.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물어보고 서로 경쟁하며 함께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제대로된 학교 교육이지요..


얼룩말 2007-06-20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 애들은..
교사라는 입장에선 그런 애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끌고 가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참..교사 대 학생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 한판 뜨고 싶은 애들이군요.

기인 2007-06-20 0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효... 참.. 그 정도까지인지 몰랐네요..

이잘코군 2007-06-20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 아이들마다 개성이 강하고, 각기 성향이 다른 만큼, 다양한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가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봅니다. 현장에 있으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는데, 똑같은 일괄적인 교육은 그 누구에게도 효과를 볼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특목고에서 실력이 있고 없고의 여부에 따라서 아이들이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차별한다는 건 좀 그렇군요. 교사채용에 대해서 건너 듣고 경험해본 바로는 특목고에 아무나 채용하지는 않습니다. 나름 검증된 사람들을 뽑아 고르고 골라 채용하는건데, 어떤 기준으로 아이들이 그같은 차별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실력이 아니라 성격에 따라 그런 것일수도.

얼룩말님 / 사실은 끝까지 끌고 가야죠. 하지만 매일매일 너무나 지칩니다. 이제 고작 2년정도의 경력을 가진 저부터도 벌써 지칩니다.

라일라님 / 물론 공부 잘하는 것과 기본적인 예의가 갖춰진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대략 눈 앞에서만이라도 기본은 지킬 줄 알죠. 말씀하신대로 부모님 체면이건 아니면 평가 때문이건 그 이유가 무엇이됐든, 그 모습이 가면을 쓴 모습이든 진실된 모습이든 일단 문제는 일으키지 않으니까 수업에 방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같아선 이런 거짓된 모습이라도 보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 정도 생각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기인님 / 그쵸. 저도 뉴스에서만 봤는데, 현실이죠.

비로그인 2007-06-20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이 이야기중이라 못 들었으면 앞으로 나와서 다시 이야기를 하던가,
기다리던가 해야지. 어디서 버릇없게 지우개를 던져!! 수업시간에 딴짓 하는게
자랑이야!! "

"이게 어디서 선생님을 오라가라야!! 자기 앞에 떨어진 프린트는 스스로 주울 것이지!
내가 니 시종이야? 그런 싸가지는 어디서 배웠어?"

위의 글을 읽으며 제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던졌을 말입니다. 정말 어이가 없군요.
엄하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면 체벌은 굳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저도 전에 학원에서 근무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만. 저는 언제나 말로 다스렸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나는 '무서운 선생님'이었겠지만, 화를 내야 할 때 외에는 엄하게
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저를 잘 따르더군요.

그런 개념없고 버릇없는 학생들을 지도해주는 것이 선생의 몫입니다.
너무 착한 성품의 아프님에게는 무리한 권유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이미지를
잠시 접고 '나도 화가 나면 무섭다' '더 이상은 봐주지 않겠다' 라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시는게 어떻겠습니까. 그들로 하여금 '잘해줄 때 잘했어야 한다'라는 후회를
주는 것도 좋은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예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아프님처럼 착하고 아이들을 좋아하고, 인간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지루해하고 어려워하는 역사를 재밌게
가르치실까 고민하신 노력이 보일 정도로 항상 수업을 온갖 액션과 코믹한 이야기들로
엮어 하셨습니다. 물론, 학생들의 반응은 최고였지요. 그러나 그것은 반년만 지속.
아프님처럼 딱 이 시기에 선생님도 아이들에게 '너무 잘해주기만 했다'라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말을 듣지 않고 버릇없는 녀석들이 나오기 시작한거죠.
그래서 내린 그 분의 결단은, '잘해줄 때 너희들도 잘했어야 한다' 라는 것이었죠.
그 후로 그 분은 농담도 하지 않고 무섭게 아이들을 대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학생들은 굳이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후회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것도 인생의 가르침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행동에 따라 좋은 환경 혹은 나쁜 환경을 가질 수 있다'라는.


요즘은 선생도 학생들도 잊고 있는 듯 합니다. '선생'의 뜻은 '먼저 선, 날 생'
먼저 태어난 선배가 뒤에 태어난 후배에게 살아가는 법, 사회에서 적응할 수 있는
기본을 가르치는 것이 교과목의 가르침보다 먼저라는 사실을.

날씨도 덥고, 여러모로 힘드시겠지만. 조금은 덕치와 법치의 적절한 조율을 하시면서
힘내시길 바랍니다. ^^
뜻은 반드시 통한다고 하였으니,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아프님의 가르침의
진심을 알아주는 학생들이 있을 것입니다.

빠샤빠샤 - !!!

이잘코군 2007-06-20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긴 댓글. 한장의 페이퍼군요. 엘신님 감사합니다. 구구절절 맞는 말씀입니다. 제가 느끼고 있는 제 자신의 문제를 지적해주셔서 뜨끔했습니다. :)

홍수맘 2007-06-20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난감하다는 말이 생각났어요.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이렇게 힘들구나, 아이들과의 신경전이 정말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멋진 아프님!!!. 잘 해내실거죠?

이잘코군 2007-06-20 13:15   좋아요 0 | URL
댓글 달기가 여기 따로 창이 뜨는군요. 이걸 왜 몰랐었지. -_-
감사합니다. 어제는 거의 패닉 상태였는데, 오늘 또 좋아라하는 아이들 반에 들어가서 그나마 좀 나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네꼬 2007-06-20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선생님이었으면 만날 울고 다녔을 거예요. 누군가는 맡아주셔야 할 교육, 요즘 같은 때 꿋꿋하게 버텨주시는 선생님들께 고맙습니다. 어수선한 곳이라고 도망치지 않으시는 것만으로도요. 아프님, 마노아님, 모두 ♡

이잘코군 2007-06-20 20:41   좋아요 0 | URL
네꼬님 도망치고 싶단 생각 했었는데 부끄럽습니다. 도망치지 않고 딴 맘(?) 품지 않고 자리 잘 지키겠습니다. :) 감사.

logos678 2007-06-20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아이들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반항과 공격성이지만, 내면엔 불안과 우울, 소외감과 절망감이 담겨있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에요. 가정에서 신뢰와 지지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구요. 어쩌겠어요?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을... 기운내세요.

2007-06-20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6-20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춤추는인생. 2007-06-21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중고생들은 너무 잘해주면 기어오르고. 또 엄하게 대하면 그것을 싫어하고.
참 입장 난처할때가 많은것 같아요.
전 개념없는 애들보면 아이들도 문제지만 부모님 한번 뵙고 싶더군요.
그런집은 늘 교육상문제가 있쟎아요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들에게 들려주는 행복의 길 청소년 철학창고 6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홍석영 옮김 / 풀빛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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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까? 이 물음에 대해 사람들은 다양한 대답을 내놓는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대답들은 모두 '행복'으로 모아진다. 행복은 우리가 삶에서 추구하는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 즉 최고의 선이다. 어떤 사람도 불행해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람마다 추구하는 행복은 서로 다르고, 때로는 같은 사람도 경우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고유한 일과 기능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고유한 일, 자기에게 어울리는 일을 탁월하게, '매우 잘' 수행할 때 사람은 가장 행복해지며, 그런 행복은 생애 전체에 걸쳐 완전한 덕을 성취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인 '정신의 덕이 있는 활동'을 행복이라고 규정하고, 행복한 사람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탐구한다.
(1부 행복에 대하여) -12쪽

행복이 완전한 덕에 따른 활동이라면, 이제 덕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그래야 행복에 대해 더욱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덕은 '인간의 덕'이다. 인간의 덕이란 신체의 덕이 아니라 '정신의 덕'을 의미한다. 정신의 덕은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으로 구분된다. 철학적 지혜나 이해력은 지적인 덕이고, 너그러움이나 절제는 도덕적인 덕이다.

그러면 덕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 있는 사람이 되려면 정념, 즉 감정을 잘 다스리고 관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념이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중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간은 수학에서 말하는 평균과 같은 것이 아니다. '마땅한 때에, 마땅한 일에 대하여, 마땅한 동기로, 그리고 마땅한 태도로 행동하는 것'이 바로 중간 상태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용이며, 또한 참된 덕이다.
(1부 행복에 대하여) -22쪽

국가의 통치 형태에는 세 가지가 있다. 그리고 이것의 타락한 형태에도 세 가지가 있다. 세 가지 통치 형태는 군주제, 귀족제, 그리고 재산 능력에 기초를 둔 유산자제(재산이 있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국가 형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화제라고 부름)이다. 이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군주제이고, 가장 나쁜 것은 유산자제이다. 군주제가 타락하면 참주제가 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1인 지배의 정치 체제이지만 커다란 차이가 있다. 즉, 참주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군주는 백성의 이익을 추구한다. 군주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백성들의 이익을 돌본다. 따라서 참주제는 타락한 정치 형태 중에서 최악의 형태다.

귀족제는 그 통치자들의 악덕으로 인해 과두제로 타락한다. 과두제에서는 국가에 속하는 것을 제멋대로 분배한다. 즉, 좋은 것을 전부 혹은 대부분 자기가 갖고, 관직을 언제나 같은 사람들에게 주며, 무엇보다도 재물에 연연한다.

유산자제는 민주제로 타락한다. 사실 이 둘은 거의 비슷하다. 유산자제는 다수의 지배를 이상으로 하며, 재산이 있는 사람은 모두 평등한 것으로 여긴다. 한편 민주제는 다른 타락한 정치 형태들보다는 덜 나쁘다. 시민들 스스로의 선거에 의해 지도자를 뽑기 때문이다.
(6부 다시 행복에 대하여)-165-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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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잘코군 2007-06-17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리뷰 카테고리 목록을 보시면 금방 아실거에요. :)
전공 맞습니다.
 
몽매한 자를 깨우치다 이이의 격몽요결 Easy 고전 10
김세서리아 지음, 김우정 그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삼성출판사 / 2006년 12월
절판


"모를 섬기는 자는 한 가지 일이나 한 가지 행실이라도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하지 말고, 반드시 부모에게 명을 받은 뒤에 그것을 행해야 하는 것이니, 만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도 부모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반드시 자세히 말씀드려서 부모님이 허락하신 뒤에 행할 것이다. 끝애 허락하지 않으신다 해도 곧바로 자기 마음대로 제 뜻을 이루어서는 안된다."
(밑줄그은이 주 : 그 정신은 본받아 마땅하나 언제나 문자 그대로의 말이 옳아보이진 않는다) -89쪽

예전엔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의식의 개념이 들어 있었다면, 요즘의 장례식은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그 사람을 공동체에서 영원히 제외시키는 의식의 절차라는 생각이 듭니다. 장례식장이나 납골당 같은 것이 집 주변에 생기는 것을 꺼리는 것도 그러한 생각의 일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죽음을 자꾸만 삶과 동떨어진 것으로 이해하려는 현실의 세태가 조금은 아쉽게 느껴집니다. -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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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잘코군 2007-06-12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내용은 그다지 깊이있진 않습니다. 이이와 관련된 주변머리들을 훑으신다고 보면 돼요. 이지고전 시리즈 네 권짼가 보는데 다른 책에 비해 내용은 별로 없습니다. 워낙 또 <격몽요결>이란 책이, 맹자나 공자 처럼 뭐 말할거리가 많은 책도 아니라. 그럭저럭 볼만해요. <격몽요결>은 1차 서적 붙들고 있긴 힘드니깐.

이잘코군 2007-06-12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사실 잘 모릅니다. :) 그렇담 요 책으로도 괜찮을거 같아요.

2007-06-12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간을 위한 약속 사회계약론 나의 고전 읽기 3
김성은 지음, 장 자크 루소 원작 / 미래엔아이세움 / 2006년 6월
품절


루소에게 독서는 훗날 자기 머리로 생각하기 위한 철저한 훈련이었다. 그는 자기 입맛에 맞는 책 몇 권만 읽고 세상을 모두 아는 양 잘난 척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우선 자신의 입장을 하얗게 비워두고 저자가 전해 주는 지식을 머릿속에 저장하는 데만 힘을 쏟았다. 그렇게 수많은 저자들의 얘기를 편견 없이 모두 섭렵한 다음에야 그것들을 비교하고 성찰하여 자신의 독특한 생각을 만들었다. -42쪽

홉스가 보기에 세상에는 본질적으로 선하고 악한 것이 따로 있지 않았다. 선하고 악한 것, 옳고 그른 것은 상대적이며, 국가와 법이 성립되었을 때 비로소 판정 기준이 생긴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 끝까지 추구하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다른 인간에 대하여 이리나 늑대와 다름없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진다. 이처럼 살아남기도 벅찬 자연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계약으로써 국가를 만들어 자연권을 제한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의지에 권리를 양도하여 복종한다. -77쪽

가족은 정치사회의 최초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지배자는 아버지에 해당되고 국민은 자식들에 해당된다.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태어난만큼 그들이 자유를 양도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이다. 다만 가족과 국가에 차이가 있다면, 가족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는 것이 자녀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지만, 국가에서는 지배자가 국민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지배의 즐거움 때문에 국민을 지배한다는 점이다. (사회계약론 1부 2장) -101쪽

사회 안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왜냐하면 오로지 욕망의 충동을 따르는 것은 노예적 굴종이지만 스스로 만든 법을 따르는 것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사회계약론 1부 8장) -113쪽

사회계약이 유명무실한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일반의지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사라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단체에 의해 일반의지를 따르도록 강요되어야 한다는 약속이 사회계약 내에 암암리에 포함되어 있다. (사회계약론 1부 7장) (밑줄그은이 주 :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 -141쪽

영국 국민은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크게 착각하고 있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회의 대의원을 선출할 때뿐이며 일단 선출이 끝나면 그들은 노예가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된다. (사회계약론 3부 15장)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투표일에만 자유롭다. 딱 하루 국민으로서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나면 나머지 날들은 국가가 어떻게 돌아가든 나 몰라라 살아간다. 그나마 투표일마저도 무관심하게 지나치고 그것을 자랑이라고 떠든다. "누가 되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그놈이 그놈인데." 그러나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해서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감시를 게을리 하는 국민은 잘못된 정치에 침묵으로 동의하고 있는 셈이다. 빌헬름 라이히라는 학자는 저서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가장 심하게 정치를 타락시키는 것은 스스로 비정치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소극적이고 사회에 무관심한 태도다"라고 경고했다. 루소가 일찍이 간파한 대로, 사회에 속한 이상 그 누구도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170-171쪽

본질적으로 전원 일치의 동의를 요구하는 법은 단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사회계약이다. 왜냐하면 시민들의 협동은 가장 자발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나 스스로 다스리고 있는 만큼 어느 누구도 어떤 구실로도 당사자의 동의 없이는 예속시킬 수 없다. 노예의 아들이라고 태어나면서부터 노예로 결정짓는 것은, 그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같다. (사회계약론 4부 2장) -202쪽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고 얘기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루소의 후예로서 칸트가 깨달은 것은 모든 인간은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한 개인이 아니라 '인류'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자신을 넘어서서 인류의 입장에 설 때 비로소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다. -210쪽

"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일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
(마르크스가 가장 좋아하는 고대 로마의 명언) -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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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11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소하면 다섯명?의 자식을 고아원에 버린 것이 생각나요..

이잘코군 2007-06-11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네 정확하십니다. 9살 연하의 여관하녀와 다섯 아이를 낳았는데 다 내다버렸죠. 그거 때문에 쉬이 비판받죠. 근데 당시엔 그런게 또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여건이 안되는데 아이를 낳으면 고아원에 버리는게.
 
인간 생명의 시작은 어디인가 - 배아줄기세포 연구와 생명 윤리, 윤리 이야기 지식전람회 6
최경석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6년 1월
절판


인간 개체복제는 체세포복제배아를 착상시켜 약 10개월 간의 임신기간을 거쳐 출산시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경우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 두 사람이 존재하게 된다. 흔히 사람들은 인간 개체복제를 '인간 복제'라 부르는데, 어떤 이는 인간 배아복제 역시 '인간복제'라 부르기도 하므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혼동하지 않도록 '인간 복제'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32쪽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은 항상 법으로 규정하는 것의 영역보다 크다. 예를 들어, 자선을 베푸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옳고 권장할 만한 일이지만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법으로 명시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법이나 관습 안에서 용인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은 아니며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법이나 관습으로 규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을 법률로서 규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관습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우리도 생명 윤리에 관한 법률이 윤리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허용하지는 않고 있는지 검토해 보고, 그것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그 개정을 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46쪽

수정논증의 지지자들은 잠재성을 '될 잠재성'과 '산출할 잠재성'으로 나눈다. 정자나 난자는 배아와는 다른 지위를 지니는데, 정자나 난자가 지닌 잠재성은 '산출할 잠재성'인데 비해, 배아가 지닌 잠재성은 '될 잠재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80쪽

만약 이에 대해 인간 개체로 발전할 잠재성의 소유자는 반드시 수적 동일성을 유지한 단일 존재자여야 한다고 답한다면, 이런 생각은 도덕 공동체의 일원은 개별적 개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도덕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되는 존재자의 범주는 최근 확대되고 있다. 물론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개별적 인간이 아닌 집단이나 법인, 동물, 자연 등도 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착상 후의 배아부터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다소 편협하다고 말할 수 있다. -85-86쪽

샌들은 배아를 사람과 사물 사이에 위치한 존재자로 간주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것을 주장하고자 한 것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소나 돼지의 생명을 함부로 여기지 않고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소나 돼지를 인간의 양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배아의 생명도 존중되어야 하나 사람의 생명은 아니기에 인간의 정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을 수 있다. -105쪽

그렇다면 착상 전의 배아를 단순한 세포덩어리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배아는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부에 있는 유전적 정보에 따라 자신의 발달 과정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배아가 성숙한 인간 존재자로 발달하기 위한 생물학적 프로그램을 자신 내부에 지니고 있다는 점은 배아를 정자나 난자와 구분하는 중요한 차이점이기도 하다. -106쪽

또한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정자나 난자가 23개의 염색체를 지닌 것과 달리 배아는 인간 개체와 동일한 46개 염색체를 지닌 생물체라는 점이다. 배아는 이후 여러 인간 개체로 분화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들 개체와 동일한 유전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특성은 이후 발달단계에서 연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107쪽

'도덕적 지위'라는 것은 상당히 포괄적인 개념이다. 도덕적 지위는 어떤 존재자가 지닌 도덕적 권리와 책임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래서 도덕적 지위는 생명권이나 자율권의 소유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또 자율권의 소유 여부는 능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라고 해서 누구나 동등한 자율권을 지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는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책임질 만한 판단 능력이 없기 때문에 자율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잘못된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어린 아이의 행위에 있어서 도덕적 책임과 성인의 행위에 있어서 도덕적 책임은 다르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는 그 둘의 도덕적 지위가 동등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차이는 심각한 정신병을 앓고 있거나 판단능력을 상실한 환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자율권 행사는 능력에 따라 도덕적 지위는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능력에 따라 어떤 존재자의 도덕적 지위가 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생명권과 관련된 도덕적 지위에 대해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명권에 대해서는 동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13-114쪽

최근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요구할 수 없는 동물도 생명권을 지닌다는 주장은 감각 능력을 지닌 존재자에 대한 도덕적 배려를 강조하는 입장에 서 있다. 더 나아가 식물도 그리고 자연도 존중되어야 할 가치를 지닌다는 견해는 생명 일반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권리의 주체가 자기 동일성을 지니고 있느냐, 감각능력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판단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 달리 말해 도덕적으로 존중해야 할 대상자의 범주가 반드시 자기동일성의 확립이나 감각 능력의 소유여부만으로는 결정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34쪽

도덕적 논란에 대한 의견 불일치는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상의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금까지 다루어 온 인간 배아연구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낙태에 대한 문제, 안락사에 대한 문제 등,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도덕적 문제에 대해 일치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의견의 불일치는 어느 한편이 잘못된 논증을 사용하거나, 선입견이나 오해가 개입되었거나, 정확하지 않은 논거를 사용하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불일치는 이런 문제점이 없는데도 발생하는 의견의 불일치이다. 즉 서로가 논리적 잘못이나 선입견이나 오해에 근거하고 있지 않고 사실이 아닌 논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의견의 불일치이다. 이런 종류의 의견 불일치를 철학자 존 롤즈는 이성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견의 불일치로서 '이성적 불일치'라고 불렀다. -136쪽

위 사례는 기술적인 의미의 도덕 상대주의와 규범적 의미의 도덕 상대주의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도덕 상대주의를 단지 사회와 문화에 따라 예절이나 규범이 다르다는 사실을 말하는 정도라면 그것은 현재의 사실을 기술하는 기술적 상대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이 그렇다는 기술에서 그치지 않고, 도덕이란 것이 사회와 문화에 따라 다른 것이 하나의 규범이론이라는 식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규범적 상대주의라고 해야 한다. -145쪽

롤즈에 따르면 이성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은 구별되는데, 이들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합리적이라는 것은 주의 깊게 선택된 목적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선택하거나 추구하는 것과 관련된 지적 덕목이지만, 이성적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이성적인 목적이나 관점에 대한 동등한 또는 공정한 고려를 요구하는 윤리적 덕목이다. -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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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08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을,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라 할 것인가?"
논란이 구구합니다. 시점에 대한 시시비비는 별로 의미가 없는 듯합니다.
때때로 '철학함'에 거시적 관점을 취하는 것이 합리적일 때가 있는 듯 합니다.
이를 테면 상기 문제와 같은 논란 시에..